122화
잘 꾸며진 정원 한쪽에서 왜소한 몸의 노인이 주섬주섬 손을 거둔다.
그는 지금 막 하루 일과 중 가장 마음 쓰는 일을 마친 참이다.
“…조금 솎아 낼 필요가 있나.”
연못을 거닐던 잉어들의 크기를 가늠하며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지만, 뒤에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서 있던 이들에게는 심장이 턱하고 내려앉는 소리와도 같았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저것들, 너무 많이 크지 않았어?”
“제, 제가 보기에도 어르신의 눈썰미가 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옆에 서 있던 이에게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적절한 온도로 준비된 젖은 수건을 건네받아 손에 묻은 잉어 먹이 부스러기를 닦아 낸 노인은 그 와중에도 시선을 오직 연못에만 고정한 채 혼잣말을 이어 간다.
“가끔 이런 일을 해 줘야 해. 제 주제를 알게 하는 일 말이야.”
그 눈빛이 자못 서늘하다.
“이 아담한 연못도 처음의 작은 새끼일 때는 광활한 우주나 다름없지. 어디를 가도 신기하고, 재밌고, 긴장되고. 하지만 점점 몸집이 크면 이제 모든 게 당연해져. 누리는 모든 것이 마땅한 자신의 권리인 줄 아는 거야.”
“그, 그렇습니까?”
“그래. 종국에는 갑갑하다고 느끼고, 권태롭다고까지 느끼게 되는 거지. 이 연못은 자기 크기에 맞지 않고, 쉽고 아무것도 아닌 거라는 것처럼 투덜거리고. 제놈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까불며 한가롭기만 하는 거지. 결국 한 마리 미물일 뿐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 낸 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묻은 물기를 날린 노인의 시선은 그제서야 뒤에 서 있던 양복 입은 사내에게 향한다.
“제놈의 힘으로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참 건방지지 않아? 할 줄 아는 거라곤 주는 먹이를 먹고 똥이나 싸는 게 전부인 놈들이 말이야. 제놈들이 살 연못을 파고,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먹이를 준비하고, 천적을 치워 준 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들이 좀 컸다고 건방을 떨며 오만한 표정을 지어.”
양복 입은 사내는 이제 숨소리가 아니라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된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그렇게 되더군, 본보기를 보이기 전까진.”
일본의 정재계를 한 손으로 주무르는 노인의 시선이 심장에 와서 꽂히자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다.
“이거는 할 수 없다, 그렇게는 안 된다… 쓸모없는 놈들.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놈들을 이 내가 키웠다는 말인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양복 입은 사내은 정원의 흙바닥 위에 무릎 꿇고 엎드려 빈다. 처절하게 빈다. 그 모습만 봐서는 일본 자민당 소속 4선 의원이자 소위 ‘어르신’의 전령으로 통하며 권세를 누리던 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사내가 누리던 그 호가호위의 권력이란 본디 이런 것이었다. 주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생존조차 불가능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제 처지를 잘 아는 자라고 하겠다. 앞서 그와 비슷한 지위에 있었으나 주제를 모르고 건방을 떨다 정치적 스캔들로 죽느니만 못한 처지가 된 전임자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다.
“반드시 놈들을 잡아오겠습니다!”
“흥! 그놈이 놈인지, 놈들인지 알기는 하고?”
어르신은 바닥에 파묻힌 사내에게 싸늘한 냉소를 보이곤 손을 내민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기모노 입은 여인이 노인의 손 떼 묻은 오래된 지팡이를 조심스레 건넨다.
온갖 좋은 것을 먹고, 온갖 검사를 다 받으며 건강관리에 힘쓴 덕에 아흔이 넘은 지금에도 무릎관절이 튼튼한 노인은 이 지팡이를 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울 때 쓰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굴복한 상대의 어깨 등을 내려치는 식으로.
노인은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사내를 후려쳤다. 짧지만, 강하게.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뭔가? 항상 정치하는 놈들은 그래.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와서 엎드려 비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냔 말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 흥, 죄송의 의미를 아는지나 모르겠군.”
그렇게 지팡이로 사내의 어깨를 쿡쿡 찌르고, 내리치며 분을 풀던 노인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어르신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들고 와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어르신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잡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와, 분명 조센징 놈들일 테니까.”
“저희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지만 일단 확실한 증거가…….”
“그놈의 증거는 무슨!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그 늙고 작은 몸 어디에 그런 분노가 남아 있던 건지, 노인은 결국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지팡이를 집어 던진다.
멀리 날아간 지팡이가 연못의 한가운데에 뽀글뽀글 거품을 내며 가라앉는 걸 보면서 이 무서운 사람의 고용인 중 누군가는 저걸 누가 건져 낼 지 궁금했지만, 벼락이 떨어지는데 그런 한가함을 오래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내가 말하지 않았나! 조센징이라고! 저 버러지 같은 조센징 놈들이 분명하다고 말이야!”
어르신은 역정을 낸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당장 가서 잡아와! 저 조센징 놈들이 알량한 힘을 좀 가졌다고 건방 떨어 대는 게 분명하니까 잡아오라고!”
그리하여 무릎 꿇은 사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종종거리며 뒷걸음질로 나가려던 그 순간, 급하게 박차고 들어오는 누군가와 부딪쳐 쓰러진다.
“아이쿠, 이, 이 사람?”
“하, 미안, 미안합니다.”
달려 들어온 이는 평생을 어르신을 보좌해 온 개인 집사였고, 이 모습은 사내는 물론이고 어르신에게조차 의아함과 불안감을 선사했다.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숨은 권력자의 심복이라 불려 마땅한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조급함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 무슨 일이야?”
어르신의 물음에 집사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총리가 죽었습니다, 어르신!
“…뭐라고?”
“거리 유세 중에 즉사했습니다! 현장에서 손을 쓸 틈도 없었다고 합니다!”
믿기 힘든 참담한 소식에 어르신의 눈이 굳게 닫힌다.
* * *
연화존자와 칠익회에게 있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단 대부분 방법의 문제, 즉 어떻게 죽이냐의 문제였다.
정 여의치 않으면 연화존자가 맨손으로 침투해 목을 뽑아 버린다는 최후의, 하지만 성공률이 지극히 높은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세상 모든 죽음은 그런 식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일종의 방법론적 문제였던 것인데, 그런 이유로 일본의 유력 정치인을 죽여 ‘어르신’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칠익회의 위세를 떨친다는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이 가장 나은지, 이들은 고민을 거듭한다.
퍼포먼스가 필요했던 것이고 개중 연화존자의 마음을 끈 건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전통과 한민족의 트라우마와 울분이 얽힌 한 가지 방법이었다.
“…역시 일본 놈 죽이는 데는 도시락 폭탄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 죽여야 어르신으로 대표되는 극우 세력에게 강력한 경고가 될 수 있을지를 의논하던 회의의 막바지에 나온 아이디어는 연화존자의 마음에 들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추종하며 평화 헌법을 폐기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소위 ‘정상’ 국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을까?
연화존자는 이 역사적인 오마주를 실행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전격적으로 채택한다.
그리하여 사제 폭탄을 제조하기로 했다. 연화존자의 일을 서포트하기 위해 들어온 칠익회 출신 국가무공원 요원들은 이에 따라 차근차근 할 일을 진행했다.
어르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 중 불법적인 일을 맡은 이들을 잡아서 실종 상태로 만드는 가운데, 폭탄은 세심하게 준비된다.
폭탄의 위력이 강하면 좋을 테지만, 그래도 추적이 불가능한 재료로 만들어야 하는 한계가 있는 이상 일정 이상으로 위력을 키울 수는 없었다.
뭐,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위력이 너무 세도 의도치 않은 민간인 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었고 어차피 실행자가 연화존자인 이상 그리 강할 필요도 없을 터.
총리가 꽁꽁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것입니다, 여러분!”
연일 흉흉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총리는 대중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의 계산, 어르신의 심기를 건드려 숙청 당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겠다는 일종의 결의이기도 했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용기였다. 폭탄을 준비하고 총리 암살을 기획하는 와중에도 연화존자와 칠익회는 어르신을 비롯한 일복 극우계의 재산과 사람을 여지없이 손상시키고 있었지만, 총리는 거기에 아랑곳 않는 기개 비슷한 것을 보였으니까.
이게 정말로 기개인지 아니면 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본 국민들이 보기에는 한 치의 물러섬 없는 투사 같은 모습이었던 게 사실.
물론 이를 위해 경호처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을 통제하려 들고, 둘러싸고, 긴장을 높였지.
‘많기도 해라.’
총리를 보고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숨은 내공 사용자들을 보며 느낀 연화존자의 감상이다.
일본 정부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고용한 이들일까? 뭐가 되었든지 간에 이것만 보아도 이 거대한 경제 대국의 저력이란 게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다는 걸 느낄 정도로 총리를 지키는 무림인의 수준은 꽤 높아 보인다.
그렇다고 연화존자를 막기는커녕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가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연화존자는 천변만화의 기예로 얼굴과 체형을 바꿨다. 그리 많이 바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을 알아챌 수 없도록 철저하게 했다.
키를 조금 줄이고, 체형은 약간 여유롭게 했으며, 걸음걸이마저 약간 뒤뚱이는 식으로 바꾸었다.
얼굴은 살짝 팽팽하게 했다. 내력의 힘으로 피부와 근육을 움직여 인상이란 것이 확 달라진 그를, 주변의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품 안에는 칠익회 인원들이 조심스레 만든, 도시락통 안에 들어 있는 폭탄이 들어 있다.
뭔가 든든하면서도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조선 무림인들의 일본 제국에 대한 투쟁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쓸 만한 재주를 가진 이들은 기득권에 붙는 게 먹고살기 편했기에, 변절자는 무림인 중에도 많았다.
그렇지만 길이길이 기억되는 건 실패했을지언정 뜻이 높았던 의거.
연화존자는 일본 극우 세력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어르신과 그 뜻을 정계에 투사하는 역할을 맡은 현 총리를 처단하는 일에 감상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뭔가 느껴지는 바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이웃 나라와의 건설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저런 자들이 없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덮어 놓고 국적만 보고 싫다 하는 것도 추하겠다만, 뻔히 보이는 문제를 외면하고 넘어가는 것도 눈 뜬 장님이지.
‘총리 다음은 그놈의 어르신 낯짝을 좀 보러 가야겠군.’
이런 생각을 하며 폭탄을 꺼내는 연화존자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었다. 그의 평범한 태도가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았다는 거니까.
다음 순간엔 달랐지만.
제법 거리를 두고 날아간 도시락 통을 장내에 가득했던 경호원 중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날아가던 그것을 경호원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총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던져서 그런 걸까?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쳐다만 보던 그것은 둥실 떠돌며 연단에 안착.
곧바로 터져 버린다.
“아아악!”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장내에 혼란이 인다. 불꽃과 연기가 치솟고, 사람들이 뛰어가며 도망가니, 폭탄을 던진 연화존자의 행방은 그토록 손쉽게 사라졌음이라.
진정한 혼란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