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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24화 (124/175)

124화

“원래 가족 일이라고 하면 서로 이해하고, 더 묻지 않고, 이해와 존중을 보이며 넘어가야 되는 거 아닌가?”

화려한 방 안의 그 방만큼이나 화려하고 한편으론 이지적인 한 미인이 앉아 있다.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사람의 눈을 확 사로잡을 만한 미녀였지만, 만약 그녀의 나이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많이 쳐줘 봐야 이십 대 후반은 되어 보일까 하는 그녀의 실제 나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의 두 배는 족히 되었으니, 저 아름다운 외모보다 놀라운 것은 실로 놀라운 주안술의 경지.

“정말이지, 굉장히 무례하군.”

“죄송합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앉아 있는 건 색이 바랜 금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넘긴 잘생긴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비단 여인의 외모에 혹한 청춘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급한 안건이었다.

“휘하 클랜들 사이에서 말들이 계속…….”

-쾅!

더불어 젊은이는 여인에게 압도되어 있다. 내공이라도 실었는지 책상을 내리치는 그 강한 동작에 움찔하는 추태를 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건 강력한 조직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육신은 평범한 일반인인 그에게 여자가 가진 일신의 무력이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었고, 실상 조직의 힘이라는 것 역시도 여자 쪽이 월등했기 때문.

유럽 남부의 밤을 지배하는 여왕은 그만큼 두렵다.

“내 말이 우습나?”

여자, 제갈패밀리의 수장인 제갈연은 눈앞의 애송이를 보며 분기를 보인다.

“가족의 일이라고 하는데 꼬치꼬치 캐물으며 묻는 건 대체 어느 곳의 예절이지? 어디서 그런 배워 먹지 못한 짓을 하는 거야? 자네의 집안이 그런 막돼먹은 집안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남자 역시 은드랑게타의 일원으로 어디 가서 고개를 숙일 처지가 별로 없던 인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제갈패밀리의, 그것도 전설적인 부흥을 이끌고 있는 수장 앞에서 목이 빳빳하게 할 만큼 강단 있는 입장은 못 되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일도 아니었지만.

“내가 우리 가족 사이에 얽힌 내밀한 사정을 다른 이들에게 밝혀야 하나? 나에게는 그 요구가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다. 우습기 짝이 없군. 내게 대답이라도 맡겨 놓은 거야? 물어보면 대답을 척척 내놓아야 하나? 도대체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토록 무례한 줄 모르겠어.”

남자가 휘하 클랜들의 불만을 취합한, 사실은 은드랑게타 전체 조직의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 위해 제갈패밀리를 찾아온 것은 맞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와 모든 마피아를 제압해 하나로 통합한 제갈패밀리에 대한 반발은 요즘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으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전쟁이 날 지경이었던 것으로, 그렇다고 해도 그걸 제갈패밀리의 대모 앞에서 털어놓을 만큼 남자가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건 말 그대로 무례, 그 자체였기 때문에.

“하나같이 존중이 없어. 이봐, 꼬마. 난 말이야, 아버지를 따라 각 패밀리들을 만날 때도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 언제나 너희의 문화와 이 전통이란 걸 존중했다고. 알고 있나?”

물론 남자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거지꼴로 쫓겨나듯 나타났던 제갈패밀리의 처음이 어땠는지에 대해.

“우리는 이 땅의 거주민들이 지켜 온 것들에 대해 기꺼이 인정하고, 수긍했어. 그것은 외부에서 온 우리가 취해야 할 예의이자 인간적인 도리, 그 자체였지. 그 이후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협력과 싸움이 반복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언제나 우리 제갈패밀리는 이러한 예절이란 걸 지켰다는 말이야.”

여기까지 말한 제갈연이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본다.

“자네 패밀리만 해도 그렇지 않나? 자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탈리아의 모든 마피아의 항쟁을 멈추게 함으로써 존중을 보인 게 누구였나?”

“…대모님이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뒤 사정이 있던 것이다.

당시 은드랑게타 내부의 전쟁이 격화된 끝에 파벌의 수장이었던 남자의 할아버지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고, 당시 신흥 강자로 떠오르며 세력을 일구는 중이던 제갈패밀리는 이 일을 자신들의 영향력을 떨치는 데 사용했다.

존경받는 원로였던 남자의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모든 마피아가 폭력을 사용하는 걸 금지했던 것.

당연히 말로만 하지는 않았다. 말로 한다고 들을 리도 없었을뿐더러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조금 아쉬울 뻔했다.

고분고분한 자들을 상대로 비축한 힘을 발휘할 일이 없지 않았겠나?

당시 국공 내전의 여파로 인해 유럽으로 도망 온 게 제갈세가만이 아니었고, 마피아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던 당시 제갈세가주는 개중 쓸 만한 이들을 세가로 받아들여 힘을 기르는 강수를 두었다.

그러니 은드랑게타의 수장 중 하나가 죽은 일은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으로, 다만 이러한 제갈패밀리의 선포를 비웃었던 자들의 장례식이 곧바로 치뤄졌기 때문에 뒷말이 없었을 뿐이다.

어찌 되었건 이는 은드랑게타 내부에서도 남자의 패밀리가 유독 제갈패밀리와 가깝다고 생각했고, 이렇듯 가깝다고 여겨지는 건 그때 보인 ‘존중’ 덕분.

그래서 남자에게는 제갈패밀리가 더욱 각별한 면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자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소개했지. 무슨 말인지 아는가? 내가 아니었다면 자네는 이 세상에 있을 수도 없었어.”

이 또한 옳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도 얽힌 사정이란 것이 존재한다.

남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패밀리는 각기 은드랑게타 내에서 가장 격하게 싸우던 사이였다. 실제로 어머니의 집안이 남자의 할아버지를 죽이기도 했었으니, 여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지.

이에 아버지의 패밀리에선 무제한적인 복수를 천명했고, 당연히 어머니의 패밀리에서도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 이에 대응하던 차.

제갈패밀리가 이들을 중재했다. 바로 남자의 부모를 결혼시킴으로써.

이 또한 마찬가지로 말로 될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은 둘째치더라도 패밀리 내부에도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 데다가 그 안에서만 해결할 문제 역시 아니다.

다른 마피아 계파들 또한 이 결합을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은드랑게타 내의 가장 강성한 두 세력의 결합은 견제와 시기, 질투를 유발하는 일이었기에, 남자의 부모에 대한 암살은 비번하게 시도되었다.

그리고 제갈세가는 그 모든 암살 시도로부터 젊은 부부를 보호했다. 심지어 남자가 어릴 때까지도.

그런 의미에서 제갈연은 진실로 남자의 대모.

“하지만 대모님, 그 말씀대로라면 저희는 가족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제갈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는 이 부분에 착안한다.

“저 또한 대모님과 제갈패밀리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에 제갈연이 잠시 침묵하다 걸음을 옮긴다.

스르르 드레스가 끌리는 소리가 나고, 남자의 긴장도가 높아진다.

어느새 그녀가 남자의 옆에 서 있다.

“대, 대모님.”

제갈연에게서 나오는, 말로 형언키 어려운 달콤한 향이 남자의 정신을 지배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앉아서 굳어 버린 그의 머리를 제갈연은 부드럽게 감싼다. 아까와는 다른, 따뜻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태도로.

“가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짙은 슬픔이 남자에게는 손으로 잡힐 듯이 느껴져 부르르 떨고야 만다.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 패밀리의 ‘사업’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저 간교하고 냉혹한 여인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가족끼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진실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모든 건 가장인 나의 책임이니, 너는 그저 돌아가 그들을 달래라. 머지않아 금지령이 풀릴 거라고.”

남자는 그렇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은드랑게타의 다음 후계자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아무것도 못 하고 바보처럼 돌아간 뒤, 방 안으로 들어온 잘생긴 남자가 투덜대며 불퉁댄다.

“누님, 애새끼 놀리니까 재밌소?”

“그럼. 재밌지.”

제갈패밀리 최고의 히트맨이자 제일의 기재인 제갈승수는 오랫동안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제갈연의 악취미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어느새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제갈연은 눈 하나 찡긋하지 않음에도.

“아무리 그래도 누님이 나의 삼분의 일도…….”

“그만. 어디 여자의 나이를 함부로 말하려고 그래?”

서릿발 같은 기세를 품는 제갈연의 지시에 제갈승수는 입을 다물더니, 곧 어깨를 으쓱한다.

“뭐, 덕분에 싸게 먹히긴 했수다. 저 멍청이가 돌아가서 전력을 다해 자기 패밀리를 설득할 테니,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죠.”

“남자들은 왜 이리 바보 같은지 몰라. 안 그래?”

“난 안 그렇수다. 그럴 시간도 없고.”

다시 기분이 괜찮아진 제갈연에 안도하며 제갈승수는 가죽 소파 위에 몸을 던지듯이 앉는다.

그는 대모의 부름을 받고 온 차였다.

“때가 된 거요?”

“어. 됐지.”

그것은 지시이자, 설명을 듣기 위함이었던 바.

“곧 1차 부대가 넘어갈 거야. 대만 정파 연합에서 곧 합류할 거고.”

“진짜, 전쟁이네요.”

이탈리아에 머물던 제갈패밀리가 티베트 반군을 지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제갈승수의 목소리에는 감개무량함마저 깃들어 있다.

실로 고단한 일이었던 게 사실이다. 대체 이를 위해 패밀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나 많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단 말인가?

“그동안 주변국에 뿌린 뇌물만 해도 얼마고 죽이고 회유한 놈이 몇 놈인지, 진짜… 연화존자께선 우리의 노고를 아시나 몰라.”

“그럼. 그분은 다 알고 계시단다.”

제갈연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하지만 여전히 제갈승수를 보지 않은 채 책상 위의 서류에 사인하며 대답했다.

제갈승수는 다르다.

“…연화존자께서 뭐 보낸 거라도 있소?”

그는 자신의 누이가 저렇게 말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연화존자 역시도.

“연화존자께서 새로운 무공을 보내셨다.”

“새로운 무공이라 하시면?”

“연화신공의 삼 단계.”

언젠가 제갈패밀리에 잠시 머물던 연화존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 있는, 그래서 연화신공의 일 단계와 이 단계를 전수받은 바 있는 이 검증된 천재는 그 말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네 것이라고 하시더구나.”

그런 동생에게 제갈연은 서랍의 문을 따고 뻣뻣한 재질의 종이책을 건네준다.

제갈승수에게는 아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보내셨다고?

하지만 다음 말에는 정신을 못 차린다.

“우리는 본토로 돌아갈 거란다.”

“네?”

“본가로 돌아갈 거야. 우리만 가는 것도 아니지. 당가그룹도 마찬가지야.”

제갈패밀리의 고위급인 자신도 처음 듣는 얘기에 당황하여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대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려운 길이 될 거야.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의 뿌리가 저 중원에 있음을, 가증스러운 공산당의 폭거에 의함이었음을 난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누님,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아버지와의 약속이었지.”

제갈연의 눈에도 불꽃이 튄다.

“절대로, 절대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라고 하셨어. 이 땅에 뼈를 묻을 것처럼 살라고, 잊고 살아야만 이들의 모든 것을 뺏을 수 있을 거라 하셨지. 난 그 말씀에 충실했다, 동생아. 중원 따위 얼씬도 하지 않을 것처럼 다 잊고 살았었어.”

제갈패밀리 안에서 누구도 알지 못했던 대모의 말에, 제갈승수는 그만 할 말을 잊는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 건 오직 연화존자뿐이셨다. 그분은 말씀하셨지. 언젠가 때가 된다면 있는 힘껏 힘을 써 보겠다고. 잃어버린 제갈세가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노력해 보겠다고 하셨어.”

그런 뉘앙스는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누이가 마피아들을 제압하고,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의 암흑가를 주무르며 천년만년 살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분은 약속을 지키셨고, 우리는 돌아갈 거야. 그 전에, 이 땅에 사는 모든 쓰레기의 재산을 뺏어서 간다.”

그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대모의 말에, 제갈승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탈리아의 마피아 대부분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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