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자신을 주시하는 모든 눈을 따돌리고 가장 비천한 이들이나 입을 법한 거적떼기를 뒤집어쓴 채 한참이나 이동해야 했던 노인은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늙은 육신은 이러한 긴장과 육체적 스트레스를 버텨 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그 또한 한 사람의 인간.
그에 더해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안정과 스스로의 욕심을 경계하는 수행자인 그는 오늘의 만남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게 정말 맞는 일인지…….’
만남의 장소로 결정된 집은 주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폐가에 가깝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노인은 오직 지금 만나기로 한 자와 그가 속한 세력을 떠올린다.
놀라운 자들이었고, 두려운 자들이었다. 가능할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연일, 그것도 동시다발적이고도 무차별적으로 행하고 있는 자들.
그러한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이 하는 일 중에서도 그의 민족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일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집착일진대…….”
그는 배제되었다.
그의 민족이 하고 있는 무장 봉기에 대한 정보는 제한되었다. 뜨문뜨문 들려오는 것들이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들려오지 않고 있다.
마치 누군가 귀와 입을 막은 것처럼.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허하면서도 두렵다.
“이것이 다 어찌 되려는 것인지.”
비폭력 투쟁에 대한 그의 신념은 노벨 평화상의 수상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라의 독립은 요원했다. 불합리와 부조리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타오르는 듯하던 독립의 열망은 어느덧 만성적인 무기력으로 수렴 중이었으니.
그러니까 자치구의 유력 한족들이 일제히 암살당하며 시작된 무장 봉기의 성공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하고 있던 노인은 언제 들어왔는지, 처음부터 들어와 있었던 건지 모를 낯선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린다.
한가로운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누가 왔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이 모든 일을 기획한 자 그리고 실행한 자, 성공시키고 있는 자.
“그대가 연화존자군.”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달라이 라마.”
일본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급하게 인도로 온 연화존자가 달라이 라마와 만났다.
그들 사이에는 논의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온 세상을 떠돌며 온갖 일들을 이루고 도착한 그대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렇습니까?”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반이나 다름없는 자. 티베트 민족에게 티베트를 수호하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신분의 그는 연화존자의 눈에 달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전 건강하고, 활력이 넘칩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아서요.”
그저 지치고, 외로운 노인이 보일 뿐.
반면 달라이 라마는 어느새 멀어진 소음과 주변을 감싸며 내려앉는 고요에 연화존자가 인세에 쉽게 볼 수 없는 무공의 고수임을 자각한다.
“실로 대단하군.”
연화존자의 놀라운 점이 무공보다 다른 능력에 있다는 것 역시도.
“나는 무공의 고수라는 말에 과장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과장이 아니었어. 오히려 축소된 소문이었군. 그대야말로 천하제일인이오.”
만약 무공만으로 이루고자 한 일들을 모두 이룰 수 있는 시대였다면, 티베트는 중국 공산당에 병합되지 않았으리라.
포달랍궁을 가득 채웠던 밀종의 수련자들이 오죽 많았던가? 예전에는, 지금도 매달릴 게 밀종의 무공밖에 없어 오히려 뛰어난 고수는 예전보다 더 많다고 자부해도 될 상황.
하지만 그들 모두는 밀고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의 총칼에 너무도 무력하게 패배, 피와 육이 되어 스러졌다.
무공으로는 현대식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티베트의 독립은 벌써 이루어졌을 것이며, 중국 공산당원을 부모로 둔 판첸라마의 책봉 같은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달라이 라마는 연화존자에 대해 샘솟는 경외와 질투,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을 애써 눌러야만 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소.”
요즘 같은 시기에 그런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 입에 올리는 건 좋지 못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제 환생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달라이 라마의 인간적인 감정들이 아니지.
“나 또한 그대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믿소.”
“맞는 말입니다. 우린 서로 해야 할 말들이 있죠.”
그보다는 급변하는 현실과 이번이 지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민족 독립의 기회였다.
그래서 그는 성급하지 않으려고, 서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담담한 표정의 연화존자에게 질문한다.
“지금 우리 티베트 민족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그대의 개입이 있는 게 사실이오?”
“물론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시원스러운 대답, 현재 일어나고 있는 티베트 무장 봉기의 배후에 자신이 있음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그 모습에 오히려 입을 다물게 된다.
필시 내공으로 주변의 개입을 막았을 기막 안, 그 소름 돋을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흩날리는 먼지가 달라이 라마의 착잡함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연화존자는 거침이 없다.
“그것만이 티베트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피가 흐를 것이오, 많은 피가.”
이리 말하는 달라이 라마의 목소리에는 노여움보다 후회와 서글픔이 깃들어 있지만 말이다.
“그것 말고 티베트의 독립을 이룰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연화존자의 생각은 확고하다.
“물론 당신의 비폭력 투쟁에 대한 신념과 설명을 존중합니다. 폭력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티베트 민족은 비폭력으로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잔혹한 현실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의 잔혹함은 상식을 부정하고, 그들이 쌓아 올린 권력과 금력의 탑은 인권과 세계 보편 질서라는 걸 잠시 내려놓게 만들 만큼 크고 휘황찬란합니다. 오죽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가 그들을 위해 자국의 의회에 로비를 하려고 들었을까요?”
달라이 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수십 년간의 망명 생활로 지친 그의 속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말이었고, 현재 티베트 민족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말이었다.
적들은 나날이 강성하여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민족은 적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불자인 자신이야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고 악업의 카르마가 굴러감을 믿지만, 어디 모두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맥이 끊긴 지도 한참이 된 티베트의 무장 봉기가 돌연 일어났고, 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걸 보면 그건 모를 수도 없다.
“물론 전 외부인입니다. 법왕께서 무엇을 우려하실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합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있다면 적어도 전과 같은 무력한 처지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예전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편을 들었다가 함께 대만으로 넘어가지 못한 무림의 세가들이 본류를 회복하고자 연화존자와 함께함을 아는 달라이 라마는 저 말이 허언이나 망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당가그룹과 제갈패밀리는 이미 예전의 성세를 뛰어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들의 그늘 아래 숨은 다른 무림인들이라고 다를 것인가?
그리고 티베트 민족은?
“내게 무엇을 원하오?”
“함께 히말라야를 넘으시죠.”
연화존자는 대담한 계획을 요구한다.
“히말라야를 넘어,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무척이나 바라왔던 일 아닙니까?”
수십 년에 걸쳐 중앙과의 동화가 진행되었던 티베트 자치구의 혼란은 대단했다. 어느 민족이 아니 그랬겠냐마는 티베트 내에서도 중국 한족과 결탁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이들에 대한 폭력 행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지는바.
이런 종류의 증오는 함부로 막기도 힘들다는 걸 연화존자와 그 조력자들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괜히 르완다에서의 비극이 믿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일어났던 게 아니지.
고로 내부의 조력자, 모두의 존경을 받는 큰 권위와 적어도 그 진의만큼은 의심하지 않을 그런 이가 작금의 티베트 자치구, 머지않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하게 될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법왕께서 함께 가셔서 그들의 분노를 잠재워 주십시오, 더 많은 피가 흐르기 전에.”
달라이 라마는 당연하면서도 절묘한 수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미뤄 둔다.
“대만의 정파 연합과 함께한다고 들었소. 그들 또한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고 있지.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셈이오? 중국과 수교하며 우리를 놓았던 미국 역시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현실을 먼저 묻는다. 얽히고 설킨 국제 관계에서 티베트의 미래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용만 당할 수도 있으니.
“그건 저희가 해결할 겁니다. 미국은 한동안 우리 일에 딴지를 걸기 힘들 거고 대만은… 다른 나라는 신경도 못 쓸 정도로 바빠질 거거든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연화존자의 말에 더는 묻지 않는다. 오래 보진 않았지만 연화존자가 허언을 입에 담는 이가 아니며 또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해 왔음을 듣고 보았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을 던질 뿐이다.
“이로써 당신들이 얻는 게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그는 궁금했다. 수없는 환생을 해 왔고, 또 환생자를 감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티베트의 법왕. 관세음보살의 화신은 한 인간이 취하는 행동과 결과가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알고 싶었다.
오직 제 이익만을 좇는 사바세계의 중생이 어찌하여 이런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하는가?
“얻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행하고자 하는 바를 취할 뿐입니다.”
우문현답이었다.
“그저 거대한 폭력이 짓누르는 걸 보고 있기 싫었을 뿐입니다. 그 안에 티베트가 있었기에 움직입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구름 위가 궁금해 오른 산에서 낙엽 하나를 주워 왔다고 낙엽을 줍기 위해 올랐다고 하지는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에 달라이 라마는 한참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티베트행이 그가 불자로서, 티베트의 법왕으로서 행해 왔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신중하게 고민했다.
따라야 하는가? 말려야 하는가? 침묵해야 하는가?
하지만 대답은 연화존자를 만나기 위해 나왔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 가실 예정이오?”
그 말에 연화존자는 씩 웃었다.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한 그 표정을 보며 저자도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구나 하고 달라이 라마는 알았다.
“곧 일정을 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혹시나 해서 그런데 며칠 함께 지내도 될는지요?”
“그러십시다.”
이에 밀종 대수인의 고수들이 보일 솜씨를 연화존자는 기대한다.
그간 온갖 세상을 떠돌았어도 포달랍궁의 고수들은 견식한 적이 없다. 그건 그들이 오직 달라이 라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 서원했기 때문이었으니, 이번 방문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본래라면 밀종 대수인의 법승들이 지켜야 했던 다른 한 명이 떠오른다.
“참. 한 명이 더 합류할 겁니다.”
“한 명이라면… 그대, 설마?”
함께 나와 거처로 이동하며 달라이 라마와 연화존자는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를 어디에서 찾았냐는 것부터 어떻게 알았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달라이 라마의 얼굴은 심각해져서 그들로 되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연화존자는 이번에도 자신했다.
자신이 보낸 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하나 그것이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한 사람을 쉽게 데려올 수 있을 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