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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27화 (127/175)

127화

‘예의 없는 새끼.’

류쉰은 대머리 부장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격렬한 증오를 불태웠다.

그것은 너무나도 뜨거운 불길이어서 지금도 류쉰은 최선을 다해 이를 억눌러야 했다. 가슴을 태우는 듯한 격노에 잠시라도 틈을 주었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대머리 부장의 머리를 의자로 후려칠 것만 같았으니까.

누구라도 그의 입장이 된다면 그럴 만했다.

‘영, 배워 먹지 못한 새끼.’

오늘은 류쉰, 그의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차를 내고 쉬려고 했던 것으로, 그럴 자격이야 충분했다. 신년은 물론이고 여름휴가마저 반납한 류쉰의 한 해는 어느새 겨울만을 남겨 두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저 빌어먹을 대머리 부장 놈, 평소 그의 능력과 성과를 시기하며 빼돌리려고 호심탐탐 기회만 노리던 저놈이 연차는 무슨 연차냐며 반려하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다.

‘일이 바쁘기는 개뿔. 분기 결산도 다 끝났는데, 바쁠 일이 뭐가 있어?’

그냥 자기가 쉬는 걸 싫어할 뿐이란 걸 알고 있다. 부모님의 기일이라는 이야기를 뻔히 들었음에도 회사가 어렵다느니, 일손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물론 부장 놈이 가족 건드리는 예의범절 따위 모르는 못 배운 새끼라는 것도 한몫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찢어 죽여도 할 말이 없을 놈 같으니.

‘아… 진짜 직장 생활 왜 이러냐.’

늘 이랬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유달리 공부를 잘하던 그가 다른 성도로 가서 학교를 다니던 사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부모님, 그 기일을 어째 제대로 챙길 기회가 오지 않은 건.

임종의 순간조차 지키지 못한 한으로 어떻게든 일 년 중 이 하루만은 홀로 부모님의 기일을 기리려고 해도 어째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많이 생겼다.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다든지, 도로가 통제된다든지. 그도 아니면 공안에서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붙잡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남들보단 수월하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것도 잠시.

만나는 상사마다 전부 이 모양이고, 들어간 회사마다 전부 이 모양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비인간적 대우들.

이성적으로 용납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행태의 적대적 인간들까지.

‘에휴. 오늘도 날 넘기고 돌아가겠네.’

여기에 격분하며 회사를 옮기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다. 어디를 가도 바뀌는 것 하나 없이 늘 이렇게 부모님 기일을 놓치는 게 비일비재했고, 비단 류쉰의 문제가 일 년 중 하루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이지. 정말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은 건가?

“휴.”

그런 생각을 하며 류쉰은 대머리 부장이 모아 온 책상 위 쓸데없는 잡무들을 내려다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래도 죽을 것처럼 노력해서 먹고사는 일은 겨우 해결했다지만, 그것말고는 내세울 것도, 밝을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 덕엔 최근엔 정신병원마저 가 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감시의 눈길과 누군가 일부러 행하는 듯한 불운의 연속은 류쉰으로 하여금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게 만들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되레 어디서 누가 본 건지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라는 치명적인 평판만 얻었다.

인생은, 최악이다.

‘일하자, 일해.’

비단 이 불행이 회사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살면서 몇 번의 연애를 해 보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석연찮은 이별 통보.

개중에는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그 집 부모가 자신을 찾아오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내 딸이 널 만나고 불안에 떨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면서.

뭐, 정작 그렇게 얘기하며 따지고 화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오지 않게 되었지만, 아무튼.

좋은 것 하나 없던 류쉰의 인생은 그리고 이제 곧 난입할 불청객에 의해 박살이 날 예정이다.

“류쉰?”

서류 사이에 머리를 박고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들의 오와 열을 들여다보던 류쉰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와 충혈 직전의 눈으로도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냉막한 표정, 얼굴을 비롯해 몸 곳곳에 놓인 아물어 가는 잔상처가 남자에게서 무척이나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고 있었다.

키와 골격은 또 어찌나 좋은지, 아무리 보아도 체계적인 운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였지만, 류쉰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를 아는 것 같았다.

“맞군. 류쉰, 따라와라.”

“…저기 다른 부서에서 오셨나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억양의 남자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혹 높으신 분 중 누군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그가 했던 일 중에 뭐가 잘못된 건지. 류쉰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남자가, 연화존자의 명을 받고 류쉰을 찾아온 천지극뢰가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참 순진한 상상이었다.

“이봐, 당신! 뭐 하는… 흡!”

“역시. 공안의 끄나풀이 있을 거라더니.”

천지극뢰는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그가 찾아온 이 베이징 인근 대도시, 스좌장은 아직 상하이 연합의 세력권이 아니다.

시간을 끌어서는 자신과 소수인 그의 팀이 불리했고, 처리할 놈이 바로 옆에 있기도 했다.

가령 자신의 극뢰수의 내력을 양손을 뻗어 흘려 낸 대머리의 사파 무림인 같은.

“네놈! 천지극뢰!”

평범한 직장인인 척하고 있던 중국 국가안전부의 비밀 요원은 곧바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봤다.

모를 수도 없다. 작금 중국 본토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당의 적 아닌가?

얼굴은 비록 많은 부분에서 가리고 감췄을 지라도, 이 무공이란 것만은 그럴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지 않나? 누가 있어 양손에서 벼락을 뿜어낼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개중 누가 있어 중국 공산당이 엄중히 감시하는, 극히 주의를 요망하는 보안 인물에 접근할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네놈이 여기에 왔지?”

“알면서 뭘 묻나?”

하여 국가안전부의 비밀 요원은 조금의 정보라도 캐기 위해 천지극뢰를 도발하려 하지만 문답무용이라.

다시 한번 굵은 벼락이 류쉰을 감시하며 괴롭히던 비밀 요원에게 떨어지니, 이번엔 아까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으그그그극!”

없는 머리털을 제외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선 채 이를 악문 비밀 요원은, 그러나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비록 천지극뢰가 극성으로 전개한 혈뢰수에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지만, 여태까지 상대해 온 적들에 비하면 놀라울 만치 그는 잘 버텨 낸다.

이에 천지극뢰는 혀를 찼다.

‘처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는데…….’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상하이 사태 이후 인민해방군과도 맞서 보고, 국가안전부의 타격 부대와도 싸우며 생사를 오간 그의 현 수준이란, 예전의 그것을 월등히 뛰어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홀로 숨어 무공을 익히던 때와는 다른 차원의 고수가 되었음을. 그러니 중국 공산당의 최중요 보안 인사를 비밀리에 감시하던 요원이라 한들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문제는 시간이 그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홀로 몸을 빼는 것도 아니고 류쉰을, 자신의 진짜 정체는 짐작도 못 하는 중요한 사람을 데리고 탈출해야 하지 않나?

“절대로 네놈들 뜻대로는… 크헉!”

하지만 천지극뢰의 고뇌는 어이없이 끝이 난다.

“뭐야? 왜 시간 끌어?”

대치 중이던 둘 사이로 끼어든 사나운 인상의 남자가 벌레를 쫓듯 손을 흔들면서였다.

무림에 문외한인 류쉰이었지만, 그런 그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핏빛 강기였고, 그러자 이들이 누구인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반도쌍마…….”

최근 상하이 사태에서 맹활약하며 중앙당을 고전하게 만든 이들을 꼽으라면 당가그룹 소속으로 추정되는 독공의 고수들과 대만 정파 연합의 검객들이 있지만.

그 이상으로 악명을 떨치는 것이 이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두 명의 범죄자였다.

한 명은 대량 살인을 저지르고 밀항했던 살인마, 한 명은 제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여서 중국인들은 이 두 사람을 묶어 반도쌍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당연히, 당사자들이 듣기에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뭐라고?”

당장 혈마제가 반도쌍마라는 말에 눈이 홱 돌아 노려보자, 류쉰은 그만 하체에 다리가 풀릴 뻔했을 정도.

어느새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 사무실에서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하여 그만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구원은 바로 옆에서 왔지만.

“적당히 해라. 네가 업고 갈 거냐?”

“…에이. 젠장.”

그 말에 순순히 살기를 거둔 혈마제와 천지극뢰의 사이란, 예전의 앙금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해 보였다.

함께 생사의 위기를 겪은 탓일까? 아니면 버거운 임무에 긴장과 벅참으로 어딘지 모를 곳이 풀어진 것일까? 어찌 되었건 서로 원수가 분명한, 한쪽은 가족을 죽였고 한쪽은 국가무공원에 사로잡히게 만든 원흉인 두 사람은 이제 제법 친밀감이라는 게 생겨난 것 같다.

목숨을 건 작전에 투입되고도 연화존자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봐, 류쉰… 네 이름을 그렇게 알고 있지?”

그리고 거친 말투의 혈마제의 말에 류쉰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게 알고… 있다니요?”

“그거 네 본명 아니야.”

불안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시간 없으니까 빠르게 들어. 너랑 너희 부모, 원래 여기 사람 아니야. 티베트 사람이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마구 쏟아 내는 혈마제의 말에 류쉰은 귀를 막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야속한 양손은 벌벌 떨기만 할 뿐, 도통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굳어 있었다.

“강제로 납치되어 여기로 온 거지. 본래 이름도, 신분도 잊게 만들어서 말이야.”

움직일 수 있는 건 뛰는 심장과 물어야 할 것을 묻는 입과 혀뿐.

“누, 누가 그랬다는 겁니까?”

“누구긴 누구야. 잘나신 공산당의 높으신 분들이지.”

혈마제는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입매를 비틀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토해 냈다.

“살면서 이상한 느낌 못 받았어? 누가 네 인생을 자꾸 방해하는 것 같고, 뭔가 제대로 된 걸 할 만하면 어그러지고, 그런 거?”

여기까지 말한 혈마제가 가슴에 구멍이 난 채 쓰러진 대머리 부장, 아니 무림인을 곁눈질했고 류쉰은 그걸로 그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이 명쾌히 이해되는 쾌감을 느꼈다.

지금 상황과 자못 어울리지 않게도 말이다.

“유물론자이긴 해도 뒷구멍으로 다들 미신을 믿기 좋아하는 놈들답게 혹시라도 네가 기억을 떠올릴까 봐 그렇게 했다더군. 부모의 죽음 같은 거 챙기지 못하게 하고, 가족 같은 것도 못 만들게 하면서.”

“우리는 널 구하러 왔다.”

이죽이는 혈마제를, 시간이 없는데 말이 많다는 투로 바라본 천지극뢰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너에게 주어진 진정한 운명을 위해 우리가 왔다. 함께 가자.”

“왜, 왜 당신들만…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강력하고 예민한 귀를 가진 그의 청각이 경고한다. 반도쌍마의 출현을 중국 당국이 알아챘고, 이제 그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여기는 베이징과 너무 가까워서 대규모로 인원을 움직였다간 전면전이 벌어질 게 뻔했거든. 거기에 더해 널 다른 데로 옮겼을 게 뻔해서 비밀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상하이로 갔다가 티베트로 갈 거야. 거기에 너의 운명이 있다, 평생을 속아 온 젊은 녀석아. 불쌍한 놈 같으니라고.”

천지극뢰가 들은 걸 혈마제가 듣지 못했을 리 없기에, 방금 전까지의 난폭한 기세를 버린 혈마제 또한 진지하게 거든다.

그와 같은 악독한 이에게서 보기 힘든 한 줄기 동정심을 담아서.

“알려졌던 네 어릴 적 이름은 게둔 초에키 니마다.”

“게둔……?”

“그래. 네가 바로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의 화신, 판첸라마다.”

혈마제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류쉰, 아니 게둔 초에키 니마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 미뤄 왔던 일을 비로소 했다.

기절한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쉰 천지극뢰가 그를 어깨에 얹는다.

다시 한번 필사의 탈출을 행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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