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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28화 (128/175)

128화

윤아영 전 검사는 학교 폭력으로 딸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사건을 진행하면서도 국가무공원과 관련된 소식들을 대체로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애써 챙기지 않아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가령 청해마도가 이끄는 의료 재단이 미국에서 거액의 마약 퇴치 프로그램 계약에 성공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제2의 아메리칸드림의 붐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언론에서 제법 비중 있게 다뤄졌다.

미국인들이 거액의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내공을 이용한 진기요상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무림인들이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받는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적어도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는 그랬다.

사실 교육열이 유난스러운 대한민국이지만 적어도 무공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기에, 늘 배움과 학업이라는 것은 유행과 대세를 따르는 것이기에, 대한민국 무림계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늙어 가고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며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당신들이 원하는 걸 입에 담는 부모가 세상에는 얼마나 많던가?

그리하여 무공은 기피되었다.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이라며.

하지만 이제는 아닐 것 같다. 이제 학부모들은 무공을 익힌다고 하여 꼭 고생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건 바로 주먹과 발이 아니라, 칼과 총이 아니라 좀 더 평화롭고 대접받는 고액 연봉자가 될 길이 열렸기 때문.

능력이 되고 운이 좋아 진기도인과 진기요상이 가능한 고수가 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국가무공원이라는 요즘 가장 잘나가는 거대 공적 집단이 존재하고, 대한민국의 무공 인재들이 세계로 뻗어 가는 요즘이 아니던가?

실제로 청해마도와 그의 처가가 합작하여 만들고 국가무공원이 대거 투자한 의료 재단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무림 고수를 상시 채용하겠다고 밝힌 차였다.

꼭 마약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건강 케어 사업을 벌이겠다는 의지였다. 찾아가는 게 아니라, 방문하는 게 아니라 이 나라로 무공을 통한 건강 증진을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그들은 밝혔다.

이는 대한민국 국가무공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갔다 온 모든 성인 남성에게 무공의 한 조각이라도 보급하는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의무 복무를 마친 인원 중 재능이 있는 상당수는 전역 후 국가무공원에서 스카우트해 갔다. 무공이 전부는 아니어도 많이 필요한 국가무공원에서는 그렇게 인재 영입에 열을 올렸다.

복무 중 그런 제의를 받지 않았더라도 진기도인으로 내공이 안착하는 데 성공한 건강한 성인이라면, 청해마도의 의료 재단의 문을 두드리기 마련.

직업군인, 경찰과 소방관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지원 자체를 퇴직 후에 가능하게 내부 규정을 정비했다.

윤아영은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고생하여 만든 선순환의 기틀이라고 생각한다. 길고 길었던 재판의 끝에서도 느끼는 바와 같이.

“…에 따라 각각 징역 7년의 처벌에 처한다.”

고작 감옥에서의 7년으로 딸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달래지겠냐마는 적어도 윤아영의 의뢰인은 이 순간, 감격과 안도로 가득한 모습이다.

참혹하게 딸을 잃고 여기까지 온 이영덕 씨는 더는 바랄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윤아영 또한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렸던 힘듦과 보람 그리고 씁쓸함.

느끼는 게 많은 재판이었다.

반면 이영덕 씨의 딸아이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뒤 SNS 등에서 반성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을 보였던 가해자들이 판사의 말에 고개를 떨군 채 흘리는 눈물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저건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악업의 대가일 뿐. 후회도 뭣도 아닌 가증스러운 자기 기만과 자기 연민일 뿐.

‘가당치도 않지. 그딴 짓을 저지르고도 먹고, 숨 쉬고 살아갈 텐데.’

윤아영이 이영덕 씨의 딸아이가 괴롭힘을 당한 뒤 목숨을 끊은 사건을 맡았을 때, 가해자 측 부모의 첫 번째 시도는 회유였다.

사회 지도층… 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호칭이 아까운 졸부들이자 나름의 권력자인 그들은 그래도 눈치를 봤던 것이다. 윤아영에게 얌전히 재판을 포기하면 섭섭지 않게 챙겨 주겠다는 제안을 던진 걸 보면.

이에 윤아영은 내가 검사가 아니어서 가장 한스러운 날이라며 그딴 돈으론 엿이나 바꿔 먹으라는 화끈한 역제안을 했고, 이에 분노한 가해자의 부모 중 하나는 급기야 손까지 들어 올렸지만 결국 이 행동을 후회해야만 했다.

운하신권의 와병 이후 국가무공원을 새로이 이끌 것으로 기대되는 전 현천문의 장문 제자는 이 소식에 가해자의 부모가 소유한 무림 문파를 뒤집어 버렸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끝까지 저항하던 이들은 단전마저 깨진 채 비루한 개처럼 질질 끌려갔으니.

대한민국 무림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며 모든 무림 문파를 총괄하는 권위와 힘을 지니게 된 국가무공원은 그만큼 거침이 없었고 이는 한 가지 경고로 남게 되었다.

-저분을 건드리지 말아라.

이후의 재판은 그래서 법리 싸움이 되었고, 윤아영은 다시 한번 체감했다.

이 나라의 사법 체계는 낡았다고.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나날이 깊어 가는 각 분야의 전문 지식에 매몰되어 있지만 정치인들은 이걸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체감했다.

그녀는 펴 보지도 못한 소녀의 인생을 끝장내고, 한 가족을 파멸시킨 자들이 고작 징역 7년으로 끝나 눈물을 흘리는 데에 착잡함이 샘솟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던 걸까?

“소식 들었네, 재판이 잘 끝났다고.”

오랜만에 만난 운하신권은 많이 야위었다.

“고생이 많았네.”

“…괜찮으십니까?”

재판이 끝나고 이전의 도움, 비록 무공을 익힌 채 겁도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닌 무림 문파를 징벌한 일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안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에 대한 감사를 위해 윤아영은 운하신권을 찾아왔다.

요즘 유행한다는 약과 같은 것을 나름 유명한 곳에서 구매해 신경 써서 들고 왔지만, 양손이 민망할 정도로 운하신권은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겠나?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거늘.”

누워서 상반신만 겨우 일으켜 국가무공원의 기초를 잡은 동료를 맞이하는 운하신권이었다. 그나마도 윤아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왔다면 만나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 했다.

어디 장관이니, 기업가니 하는 자들이 지금도 문지방이 닳게 오고 가고 하지만, 운하신권은 누구도 만나 주지 않고 자리보전만 하며 몇 마디 말들로 국가무공원에 지시를 내렸다.

그럼에도 어긋남이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운하신권이 윤아영을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가진 위상이란 걸 짐작할 수 있으리라.

“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운하신권의 허허로운 모습. 평소의 강맹하고도 굳건한 모습은 어디로 간지 모르게 다 늙은 모습에 윤아영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한다.

이에 운하신권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 강직한 사람은 검사여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네. 두 주먹으로 못 할 게 없었고, 못 이룰 게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이 좁다 외치며 살았었지.”

그런 그녀에게 운하신권은 할 말이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능력도 없는 놈의 오만이었네.”

“원장님.”

하늘에 닿은 무학으로도, 천지 사방으로 뻗어 가는 내력으로도 시간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아쉬움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당장 반로환동이라는 무림사 다시 없을 기연을 맞이한 이로 연화존자가 있고 또 최후의 기사가 있었으니.

그러나 시간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운하신권은 욕심을 버렸다.

“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네. 젊었을 적에는 그랬어. 제대로 살고 있다고, 난 당당하고 힘이 있어 내 마음대로 하고 산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네.”

다만 노파심으로 남기는 당부가 남았을 뿐.

“철민이, 그 친구가 돌아오고 나서야 그걸 알았네.”

생의 끝자락에 선 노고수는 그의 젊은 동료에게 할 말이 있다.

“내가 잘했다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타협의 결과물이란 걸 깨달았네. 동방요선 같은 자를 잡아넣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만 해도 그래. 그때는 현천문을 지켜야 한다고, 나까지 무너지면 이 나라 무림에 피바람이 몰아닥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넘어갔지만, 그 사특한 자로 인해 피눈물을 흘린 이들은 이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겠나?”

노환으로 인한 육신의 쇠퇴로 좁은 방 안에 은둔하며 운하신권은 자신의 삶을 반추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니지, 아니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나? 가령 자네 같은 사람들 말이야.”

운하신권의 눈동자가 무섭도록 빛을 낸다.

“젊은 시절엔 오만했고, 중년에는 지키는 데 급급했으니, 다 늙어서야 운을 만나 피었네.”

그는 연화존자의 귀환과 그것을 가능케 했던 윤아영이라는 사람을 보았다.

한밤의 우연이었지만 필연이라고도 생각한다. 있어야 할 사건과 있어야 할 사람들의 조우가 지금 대한민국의 변화를 일으켰음을 실감하며.

“그래서 자네에게는 고맙네. 내 마지막이 헛되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니.”

윤아영은 운하신권의 말에 쑥쓰러움을 느낀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녀는 자기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냥 그랬다. 검사이기 때문에 범죄자들을 잡았고, 공무원이기 때문에 권력자와 부자의 유혹과 외압에 굴복하지 않았던 게 다였다.

운하신권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아닐세. 이 노인네 말재주가 없어 더 말을 못 하는 게 아쉬울 정도야.”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일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운하신권은 많이 봐 왔다.

모든 문제가 그랬다. 당연한 것들을 지키지 않는 이들로 인해 당연히 하는 이들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

해야 할 일을 지키는 신념이 세상에서 가장 귀함을 운하신권은 뒤늦게야 체득했다.

“그래. 정치에 뜻이 생겼다고?”

“맞습니다.”

윤아영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설명했다. 덤덤하지만, 단호한 의지가 담긴 그 말을 들으며 운하신권은 미소 지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네의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했다.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 내가 평생 동안 해 온 것들이 헛되지 않아 이어질 거라는 강한 확신을 얻는 것이야말로 자기 처지에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이 아닌가?

무림을 통제하는 거야 젊음마저 되찾은 절대고수인 연화존자가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지만, 이놈의 정치인들이라는 족속들이 걱정이 되었던 것인데, 윤아영의 저 단단한 모습을 보니 그런 우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잘하실 걸세. 정진하게나.”

그러니 무슨 걱정이 있고, 무슨 회환이 남겠는가?

윤아영이 다녀간 뒤 일주일. 운하신권이 세상을 떴다.

국가무공원의 초대 원장이자 무림의 원로로 오랜 시간 각계각층의 존경을 받아 왔던 그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윤아영은 조문을 와서 절을 하고, 홀로 식사를 하며 ‘어르신이 원한 게 과연 이런 걸까’라는 감상을 느낀다.

‘그분이라면 그저 조용히 가시길 원했을 테지만…….’

불가능한 일을 떠올리며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런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인맥을 쌓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주변을 감싼 국가무공원의 눈길이 따가워서인지 자중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하여 조용히 망인에 대한 추억을 회고하는 그녀 앞에 앉은 건, 달리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오랜만입니다, 검사님?”

윤아영은 낯선 모습으로 익숙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에 놀라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었다.

“공사가 다망해 소식이 없었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렇게 연화존자와 윤아영 전 검사는 오랜만에 만나 그간의 소식들을 나눴고, 며칠 뒤.

연화존자가 다시 바다를 건너기 전 어디 한 군데를 들르러 떠났다.

혼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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