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29화 (129/175)

129화

지구에서 가장 어두운 곳, 사실은 바로 옆에 있는 같은 민족의 국가가 너무도 밝아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곳, 북한.

많은 면에서 21세기 다른 국가들과 사뭇 다른 체제를 취하고 있는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미지의 땅,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악의 축이지만,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북한 역시 사람 사는 곳.

새벽 1시쯤이 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자는 법이었다, 고뇌에 빠진 어떤 사람들을 제외하곤.

그래서 무극검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연화존자, 그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무극검문이 연화존자와 연수, 다른 마교 문파들을 제압한 지도 시일이 제법 흘렀지만, 이후의 국제 정세는 이들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있었다.

귀가 있으니 들릴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대한민국 무림의 영향력을.

국가무공원은 우방국에서 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미국으로부터 수혈되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의 홀대에 가까운 취급에서 벗어나 주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려는 게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나라에 있는 무극검마에게까지 들려올 정도.

어디 그뿐인가?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일어난 말도 안 되는 내전은 또 어떠하단 말인가?

중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서로 간의 총질은 북한을 침묵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태였다.

처음엔 중앙에 반기를 든 상하이에 대한 진압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공산당 고위층 간의 권력투쟁에 가까워진 이 기이한 형태의 다툼에서 북한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언제나 미국의 제재를 비웃듯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 중이던 중국 공산당에게서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집안 단속도 제대로 되지 않는 판국에 북한의 사정을 챙겨 줄 여력이 될 리가 없던 것.

그렇다고 북한으로 물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디든 이런 기회에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을 뿐.

중국 쪽 상인들은 북한에 수출하는 가격을 오십 프로가량이나 올려 버렸다. 자기들도 위험수당을 받아야겠다며.

여기에 응하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당장 중국으로부터 식량과 연료가 수입되지 않는다면 아사자와 동사자가 몇이나 나올 것인지.

그리하여 무극검마는 얼마 전 있었던 젊은 지도자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상기한다.

“대국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라…….”

형과 고모부마저 잔인하게 숙청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반기를 든 모든 이들을 거침없이 숙청한 이 젊은 지도자는 언제나 북한의 정상 국가화를 꿈꿔 왔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못했다.

늘 그래 왔다. 북한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모순, 수십 년간 쌓인 부조리 위에서 미국과의 단독 협상으로 종전을 이루고 보통 국가가 되겠다는 건 야심을 넘어 꿈과도 같은 일.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아야 가능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결국 북한이 할 수 있는 건 소위 벼랑 끝 전술. 끊임없는 무력 도발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현재 북한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란 걸 잘 아는 무극검마는 그렇기에 일이 이렇게 된다면 다시 한번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을 갈고닦아 공화국의 자존심을 바로 세울 수밖에 없다는 젊은 지도자를 말리지 못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비록 얼마 전,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을 제압하며 북한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거듭난 무극검문이라고 하지만, 백두 혈통의 권위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백두 혈통을 위주로 짜여진 강박적인 국가, 군대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평양으로 진격할지도 모르는, 내부의 적을 감시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나라가 북한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 한들 마음만 먹는다면, 무극검마가 진심으로 마음먹고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한다면, 공화국의 지도자를 암살할 수도 있으리라. 아예 못 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북한의 지도자가 죽은 후를 무극검마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먹을 쌀이 없어 굶어 죽을 위기의 아이들을 거두고, 제자로 받아들이고,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과 대립하며 끝내는 굴복시키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에게는 이 사태를 타파할 힘이 없다.

혼자서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나?”

무극검마는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여상하게 물어오는 연화존자의 모습을 보며 당혹스러움과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다.

“…정말이지,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거 칭찬이지?”

연화존자의 무공이야 질리도록 겪어 봤다만 그것이 평양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럴 수가 있나?

“자네가 원한다면 정말로… 아니. 이 말은 하지 않는 걸로 하지.”

그래도 금방 마음을 수습한다.

상대는 천마격살자였다. 그에 더해 직접 검을 섞어 본 바, 21세기의 천하제일인이 분명하기까지 한 사람.

거기에 더해 악연도 있지만 분명 선연도 있는, 그러니까 술 한 잔 정도는 내줄 수 있는 사람.

“한잔하겠나?”

무극검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잔과 술을 준비한다. 그 자신의 처지상, 북한의 어려운 상황상 편하게 술을 마실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찾아온 손님에게 이 정도 내줄 여유는 있었다.

“나보다는 이 친구에게 주지?”

그 잔을 받은 건 연화존자가 아니었지만.

“서로 오랜만에 보는 사이 아닌가?”

“…자네는?”

무극검마는 따르던 술잔을 순간 놓칠 뻔했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 탓이라고.

“오랜만이군… 무극검마.”

“…귀령살.”

그가 나이를 먹었기에, 그간 쌓인 세월이 두껍기에 이런 일에 동요하는 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 설령 그 사람이 예전에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심지어 죽이고 싶기까지 했었지만, 그럼에도 세월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들어 이제는 반가움마저 느끼게 한다는 것.

무극검마와 귀령살은 서로를 보며 그런 감상을 느끼고 있었다.

“자네도 많이 늙었군.”

“남 말 하기 있나?”

한때 공산주의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던 암살자와 마교답지 않음으로 유명했던 고수는 제 안의 생경한 감정으로 각자의 얼굴을 본다.

지나가 버린 세월, 잃어버린 영광. 그리고 이제는 죽고 없어진 많은 사람과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이 두 마교 고수의 사이에서 회오리치는 것 같다.

“사이좋게 지내니, 보기 좋구만.”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인생이란 무릇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침묵이 길어질 법도 했지만, 자리한 다른 사람의 무심함에 가까운 여유가 이를 막는다.

“진작 데려올 걸 그랬네.”

빙글빙글 웃으며 연화존자는 무극검마의 손에서 술병과 잔을 받아 간다. 무방비한 그 순간에조차 빈틈이 보이지 않음에 무극검마와 귀령살 모두 움찔하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저 괴물 같은 작자는 이 순간에도 완전무결하여 틈이 없었다.

얄미움은 있을지언정.

“…자네, 정말 한 대 때려도 되나?”

“나도 한 손 거들고 싶군.”

두 마교 고수의 엄포에도 연화존자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무사할 자신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그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평양에 한번 오긴 와야 했겠지만.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세력이 많이 줄었더군.”

본격적인 일 얘기에 무극검마는 감상을 접고 응한다.

“해야 할 일이었지.”

아직도 무극검마는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을 친 뒤를 수습하며 보았던 것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들의 축재와 비인간적인 쾌락 추구의 흔적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강자지존의 율법을 추구함에 있어 다른 마교 지파와 조금 달랐던 그는 더 빨리 손을 쓰지 않았음을 자책했다.

“진작 해야 할 일이었어.”

강자에 의한 억압이 아닌 강자에 의한 다스림을 원하던 최후의 강자존주의자는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쾌락주의적 행태, 거기에 수반된 비인간적 행위들에 노여워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접어 둔다. 지파의 수장을 잃고 힘을 잃은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이야기는 약간 뒤로 미뤄도 될 터이니.

“연락도 없이 온 건 그렇다 치고, 귀령살. 이 친구와 여기는 어떻게 온 거지?”

그보다는 질문이 먼저였다.

러시아에 숨어 있던 살령지문이 칠익회의 손에 멸문한 것도, 기이한 방식으로 연화존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던 귀령살이 제거 혹은 체포 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던 무극검문에게는 이 뜻밖의 방문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가지 공적인 일과 한 가지 사적인 질문이 있어서 말이야.”

“공적인 일과 사적인 질문?”

영문을 모를 일이니 일단 듣기로 한다.

“그래. 우선… 귀령살을 자네가 거둬 줬으면 해.”

“거둬 주다니? 이자를 풀어 주겠다는 건가?”

“왜? 그럼 죽였으면 좋겠나?”

연화존자의 반문에 무극검마와 귀령살 모두 거북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이지만, 연화존자에게는 그저 농담.

귀령살을 죽일 이유가 없다.

“버리다시피 한 제자들과 문파라지만, 어쨌든 갈 곳 없는 노인네 아닌가?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잘 대해 주게.”

“말을 해도… 이렇게 풀어 줘도 되냐는 말이네.”

“이 치는 전폭적으로 협조했거든.”

살령지문은 멸문했다. 그건 연화존자 자신이 칠익회를 동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귀령살 쪽에서 거기에 대해 큰 유감이 없다.

죽음을 업으로 삼은 이라면 자기가 죽을 거라는 생각도 해야 하는 법이라며 무감각한 모습을 그는 보였다. 그런 그도, 자신을 북한으로 보내겠다는 연화존자의 말에는 의아함을 표시했지만.

“그리고 그냥 풀어 주는 건 또 아니고.”

그제야 무극검마는 연화존자의 금제가 어떤 식으로든 귀령살에게 더해졌음을 알았다. 그의 오랜 악우는 여기까지 듣고도 별 표정의 변화가 없지만, 이 자리가 파하고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되리라.

아직 궁금하긴 했지만.

“계속 물어봐서 민망하네만, 왜 이 친구를 공화국으로 보내는 건가?”

“우리보단 이쪽에 필요할 거 같아서.”

이러한 연화존자의 말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손이 닿던 이들의 불만이 아직 많을 테지? 무극검문이 무공은 괜찮을지 몰라도 숫자는 적어서 손이 부족할 테고. 잘 부려 먹도록 하게.”

사실 귀령살을 대한민국에 그냥 두는 것도 부담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거물급 마교 인사인 그를 계속해서 보호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 정치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후손이 많은 만큼, 물밑에서의 여러 압박이 있어 연화존자는 귀령살을 북한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커다란 구상이 하나 있기도 하지만 그거야 나중 일.

연화존자는 준호, 진호 형제를 가르치며 얻은 패월삼락공의 묘리로 귀령살의 내부에 패도적인 화기를 심어 놓았다.

발작의 주기를 여유 있게 잡은 채로 북한으로 데려왔고, 그로써 무극검마가 북한에서 조금 더 오래 버텨 주기를 희망한다.

“당장은 자네와 뭘 어쩔 여유가 없지만… 내가 벌이고 있는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우린 분명 대화를 해야 할 거야.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중대한 이야기가 남았음을 직감한 무극검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사로잡힌 후 많은 것을 내려놓은 귀령살은 그저 담담하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되었지만 여기 오기 전, 연화존자의 구상이란 것을 어느 정도 들은 그는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 지를 기다리며 모진 목숨을 더 붙여 놓기로 결심했다.

천마격살자가 어떤 귀결을 맞이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내게 할 사적인 질문이란 건 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극검마가 물었을 때, 연화존자가 주섬주섬 품속의 무언가를 꺼내어 무극검마에게 내밀었다.

오래된 검은 피리였다.

“이것은…….”

눈이 커진 무극검마에게 연화존자는 물었다, 사뭇 진지하게.

“내가 곧 히말라야를 오르게 될 거 같아서 말이야.”

묵혈성의 신물, 묵죽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어둔 밤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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