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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30화 (130/175)

130화

혈마제는 티베트인들 사이에서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믿어진다는 판첸 라마에게 어떤 기대를 품기도 했었다.

‘그래도 부처의 화신이라는데, 위기에 처하면 갑자기 무슨 놀라운 힘이라도 발휘하지 않을까?’

평소에는 능글맞고 약아빠졌지만, 그럼에도 싸울 때만큼은 흉포하기 짝이 없어 물러나는 법이 없는 혈마제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게 아니다.

그간 자신의 악명과 흉성을 증명한 그에게도 판첸 라마 11세, 중국 공산당에 의해 태어난 지 3일 만에 납치되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게둔 최키 니마를 데리고 안전지대로 도주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

그만큼 중국 공산당의 추적은 집요하고도 맹렬했다.

그것은 더는 밀릴 수 없다는 절박함, 가뜩이나 흔들리는 중국 공산당의 확고부동한 지배에 또 다른 균열을 가져올 수 없다는 갈급함 때문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판첸 라마마저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추적에 불을 지폈으니, 그리하여 혈마제와 천지극뢰는 무공 하나 모르는 일반인을 데리고 포화 속을 통과하는 처지가 된 바.

3선 재임이 불투명해진 가운데 한계에 다다른 히스테리로 눈이 돌아간 총서기의 겁박, 저들을 놓치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인민해방군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화력을 투사했다.

포병 부대가 좌표를 따고, 베이징 인근임에도 전투기가 날아다녔다. 포탄이 쏟아지고, 흙바닥이 뒤집어지기가 여반장.

그럼에도 감히 접근하는 멍청이들은 이제 없다. 그러기에는 혈마제와 천지극뢰의 중국 본토 내 악명은 극에 달했으니, 적어도 교훈 하나는 남았던 셈.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혈마제와 천지극뢰는 뼈를 묻어도 벌써 묻었으리라.

‘빌어먹을 짱개 새끼들!’

이 사실이 혈마제에겐 그리 위로가 되지 않아 정체성을 부정하는 욕설마저 속으로나마 주워 삼키게 만든다.

그만큼 추적은 가혹할 정도.

인민해방군은 물론이요, 중국 공산당의 중앙 간부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장 인원을 이끌고 혈마제와 천지극뢰를 쫓고 있었다.

여기엔 비단 ‘하나의 중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판첸 라마에 대한 경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태를 여기까지 몰고 온 일등 공신인 혈마제와 천지극뢰에 대한 살의 또한 진하게 묻어 있다고 봄이 옳다.

그리고 혈마제는 작금의 위기가 비단 적들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여간 섬에 있는 놈들이라고 다르지가 않아!’

그간 혈마제와 천지극뢰를 든든하게 여기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이번 일에만큼은 명백히 소극적이었으니, 이는 전부 한 가지 단어로 귀결된다.

하나의 중국.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겨야만 목숨과 재산을 부지할 수 있는 상하이의 권력자들뿐 아니라 정파 연합을 동원하고 연일 유권자들에게 대만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정치인들마저도 하나의 중국이라는 절대 명제가 깨질 위기에 영 마뜩잖아 했다.

그것이 혈마제와 천지극뢰가 투입된 이유였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자란 천지극뢰와 중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중국을 버리고 도망갔다 돌아온 혈마제가 아니고서는 판첸 라마를 구출하는 일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벌써부터 사태 이후를 바라보는 자들이 생겨났다.

‘벌써부터 잿밥들에 관심만 많아 가지고… 내 기필코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티베트에서의 무장봉기는 그런 의미였다.

달라이 라마가 곧 티베트 자치구에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고, 포달랍군의 밀종 대수인을 익힌 고수들이 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중국 인민이라면 어느 편에 서 있건 상관없이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설령 이러한 문제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겉으로 표출하는 어리석은 이는 얼마 없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수많은 인구, 쌓이고 쌓인 부유함을 선점하는 데 악영향을 끼칠까 다들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눈치를 보는 게 전부였다

만약 연화존자가 강력하게 나서지 않았다면 판첸 라마, 사실은 제 운명도 모르고 속은 채로 살아온 그를 데려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저 당가그룹마저 이번 일만큼은 부담을 느낄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오래전에 이 땅에 바라는 게 사라진 범죄자, 한국으로 도망가 떵떵거리며 살다가 연화존자에게 붙잡혀 원치 않는 무력 투쟁 중인 악명 높은 살인자는 그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하나의 중국은, 염병.’

그는 그저 불만만 많을 뿐이며, 비웃음만 차오를 뿐이었다.

정파를 자처하는 놈들이 불의를 보고도 제 처지만 생각하는, 그것도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부터 생각하는 게 우스웠다. 무공은 알아도 협은 모르는 새끼들 같으니.

제 욕심으로 연화존자의 계략에 빠져 죽을 날만 받아 놓은 처지에서 막강한 중앙과 힘겨루기를 하는 권력자로 부상하니 딴생각을 하는 상하이 놈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누가 보면 자기들이 대단한 인물이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줄 알겠어, 아주.

복수를 부르짖으며 내분을 일으킨 자안혈조인지 뭔지 하는 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랑 비슷한 처지라 좀 안타깝게 보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작 판첸 라마의 위치를 알려 주면서 뭘 그리 벌벌 떨던 것인지.

아무튼 간에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집중해라.”

옆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천지극뢰, 저놈을 포함해서도 그랬다.

첫 만남에서 미친놈처럼 날뛰던 게 거짓말처럼 묘한 침묵이 주를 이루는 인간이었다. 뭐 덕분에 나름 친밀감도 생겼지만, 연화존자에게 잡혀 와서 이렇게 구르고 저렇게 구르며 본의 아니게 많이 친해졌지만, 그렇다고 천지극뢰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다 알겠다는 건 아니었다.

“정신 놓으면 훅 간다.”

“니미, 가긴 어딜 가.”

제일 어이없는 건 자기 자신이었지만.

혈마제는 자신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나? 여기서 뒤지나, 연화존자 손에 뒤지나 뒤지는 건 뒤지는 건데.

이게 다 연화존자 때문이었다.

그 인간이 절대 고수인 것도 알겠고, 엄청난 무공 실력과 말도 안 되는 부유함, 무서운 인간들과 두려운 사람들을 부하와 친구로 둔 대단한 사람인 것도 알겠지만, 혈마제가 보기엔 그냥 연화존자, 그 인간이 미친놈이었다.

제일 미친놈이었다. 그런 힘으로 왜 이렇게 세상을 어렵게 산단 말인가?

“난 안 죽어, 이 새끼야!”

끝없이 쏟아지는 포격 사이로 천지극뢰와 혈마제는 달려간다. 방향을 남쪽으로 잡은 채, 혈마제는 한 손에 거의 혼절 직전의 판첸 라마를 끼고 한 손으론 날아오는 파편들을 쳐 내며 맹렬하게 달려 나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한 사람을 생각했다

혹 연화존자가 오지 않을까?

귓가에 작은 생채기를 내고 스쳐 가는 돌조각을 온몸의 피부로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가장 시급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 내던 그를.

한때는 자신을 사로잡아 부려 먹음에 증오를 품기도 했고, 한때는 그 놀라운 수단과 기이한 언동에 이해 불가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니 그저 순순하게 궁금하다.

대체 대한민국, 그 좁은 땅에 잠시나마 어떻게 붙어 있는지 모르게 온 세상을 떠돌고 있는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우리 셋을 이 사지로 몰아넣고?

“크아아아악!”

생명을 태워 내력으로 바꾸며 혈마제는 고함쳤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겠노라고, 자신들의 위험을 외면한 채 하나의 중국인지 뭔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얼굴에 똥을 집어 던지기 위해서라도 절대 여기서 죽을 수도, 죽게 놔둘 수도 없다는 생각을 혈마제는 했다.

불쌍한 인생 아닌가? 그 자신도 별로 아름답게 살아오진 않았다만, 태어난 지 삼 일 만에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고의적인 괴롭힘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니.

유물론자라는 놈들이 하여튼 이상한 종교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만 강해가지고.

그와 같은 생각으로 분노하며 양발에 내공을 집중하는 혈마제를 보며 천지극뢰 역시 마주 내력을 이끌어 냈다.

겁쟁이 놈들이 손을 섞기는 두려우니 고작 세 명을 죽이겠다고 막대한 포격을 퍼붓는 것이 멀리서 보면 희극일 테지만,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기절한 판첸 라마 11세가 정신을 차릴 때 즈음 깨닫는다, 포격이 멈췄다는 것을.

추격이 끝났다는 것을.

며칠이 지나 거지꼴이 되어 양가적 감정으로 가득한 사람들, 상하이의 권력자들과 대만 정파 연합 그리고 당가그룹의 사람들을 만나고서야 알았다. 왜 판첸 라마에 대한 추적이 멈췄는지, 그 이유를.

독립의 불꽃이 위구르족에게서도 피어 올랐다.

* * *

“…신앙의 형제들이 받는 탄압에 언제나 마음이 아팠던 것이 사실이라 하겠소.”

“이렇게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왕세자.”

대한민국을 떠나 북한에 들러 거물급 마교도를 떨구고 온 연화존자의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적어도 지금 앞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고귀한 신분의 사내는 연화존자의 속마음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담대한 구상이 자리 잡아 타인의 마음 같은 것엔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다.

“덕분에 이슬람 세계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지 않았소?”

연화존자는 왕세자의 저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실제로 통치권의 위협을 받는 이 젊은 왕족이 그와 같은 것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이미 예전부터 이슬람 세계의 왕족들을 대상으로 무공을 전수하던 칠익회 일원들에게 보고받으며 알고 있던 일.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잘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와 척을 지다니, 저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하하. 그 무슨 겸손한 말입니까?”

왕세자는 겸양을 보이는 김철민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중국과 척을 지는 게 아니라 그대와 척을 지지 않으려는 거요.”

비록 친족 대다수를 숙청하고 그들의 막대한 재산과 권한 등을 회수한 철혈의 왕자임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연화존자라는 막을 수 없는 존재의 위험성을.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집안이고, 남자라지만 괜히 막대한 돈을 들여 연화신공을 구매하고 칠익회 인력을 상주시키는 게 아니었다.

건강이 좋다지만 그만한 금액을 그 이유 하나로만 지출할 수는 없는 법이지.

“필요하다면 세상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남자가 중국과 분쟁하는데, 누구 편을 들어야겠소?”

왕세자의 넉살에 연화존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더해 필요한 것들을 얻으실 테고요?”

“바로 그거요.”

그리고 왕세자는 원하는 것이 있었다.

“초대 국왕 폐하의 유언을 어기게 된 이상 내게도 권위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지. 그건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이루어야 할 테지만, 결국 개혁이 필요하오. 이 나라에는 개혁과 새로운 위상이 필요해.”

그 기회가 연화존자를 통해 왔을 뿐이다. 비교적 안전하고, 가능성 있게.

“허약했던 군대를 실전을 통해 강하게 만들고, 탄압받던 위구르 형제들을 도움으로써 신앙의 형제들이 공고함을 밝힐 거요.”

연화존자는 중국 공산당에게 유린당한 이슬람 형제들을 돕기엔 너무 늦었지 않냐고 비꼬지 않았고,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붓고도 반군 따위에게 수모를 당하던 군대가 아니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필요하지 않다. 피차 아는 사실이었고, 바뀌지 않는 과거의 사실이며, 앞으로 할 일에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 관건은 미래.

“그러한 왕세자 폐하의 결단에 감사드리며 조만간 있을 대한민국과의 정상회담에 성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를 말이요?”

연화존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정 국가를 끌어들였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미국에 있는 인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마지막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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