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미국 안팎에서 진행 중이던 마약 퇴치 운동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 중이던 ‘권리를 수호하는 순수한 시민들의 모임’에서 역대급 변절자가 나온 후 그 여파가 미국의 정계와 시민사회를 강타했고.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활약과 환골탈태한 정신무장으로 정계를 휘어잡았으며.
남미에서는 칠익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돈 까를로 씨가 자국을 넘어 남미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저명인사로 부상, 세계의 새로운 공장이 되겠다는 야심만만한 포부를 밝히는 사이.
중국의 내부 상황은 혼돈으로 치닫고 있었다.
상하이 사태로 촉발된 곳곳의 분쟁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명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이 사태의 주범, 직접적인 당사자라 부를 수 있는 자들조차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압제에 저항하는 억눌려 있던 분노가 이제 더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중국 공산당을, 아니 세상 전부를 덮쳤다.
‘우리는 더 이상 짓눌려 살지 않겠다!’
달라이 라마가 망명정부를 벗어나 티베트 자치구에 입성했다. 밀종 대수인의 고수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달라이 라마는 맨발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다.
다시는 이 길을 고통스럽게 걷지 않겠다 선언한 그는 이윽고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판첸 라마 11세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였지만, 역사가 끊겨 가던 티베트 민족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노스텔지어였다. 하지만 비단 그러함만이 달라이 라마의 가슴을 격동시킨 건 아니었다.
그는 연화존자의 그림자를 느꼈다.
자신의 귀환에 맞춰 실종되었던 판첸 라마를 찾아내고 여기까지 데려온 그에 대한 번뇌를 달라이 라마는 느낀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나 그 감정은 접어 둔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연화존자에 대한 두려움과 이 모든 일을 이룬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을 견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분열된 티베트 민족을 통합해야 했다.
갈등은 산재해 있었다. 무장봉기가 성공한 지 시간이 꽤 흘렀건만 아직도 티베트 자치구에 남은 공산당 소속 간부들, 한족들. 심지어 중국 정부에 협조했던 티베트인들에 대한 잔인한 폭력 사태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말려야 했다. 그간 취해 왔던 비폭력 노선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한 이 사태를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할 책임감을 달라이 라마는 느끼고 있었고,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다짐은 위구르족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가장 극단적인 자들에게 위구르인들을 구원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티베트 자치구의 상황이 안정된 지금, 중국 공산당의 혹시 모를 기습을 막아 낼 최소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 내리는 달라이 라마의 권유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티베트 민족 내 극단주의자들이 순순히 따른 건 위구르 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달라이 라마를 지지하는 밀종 대수인의 고수들과 그 옆에서 살벌한 웃음을 짓는 제갈패밀리의 존재 때문이었다.
제갈패밀리는 티베트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봉기는 성공하지 못했을 일 아닌가?
제갈패밀리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의 자금, 무엇보다 무공과 독심이 아니었다면 희생은 컸을 것이고 성공은 장담하지 못했으리라.
그 가혹한 손길마저도 말이다.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모든 자를 가차 없이 ‘처형’하는 모습을 누구보다 옆에서 많이 지켜본 티베트 내 극단주의자들은 그러니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쪽에 활약할 일이 많기도 했다. 현재 위구르 자치구는 티베트 자치구 이상의 혼란과 격렬한 분노로 가득했으니까.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전투 인원들이 그곳엔 가득했다.
외부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슬람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사실 정도만 알려진 그들은 복색부터 훈련도가 천차만별이었는데, 중국 인민해방군은 물론이고 미군조차 깜짝 놀랄 장비를 지녔음에도 허약한 이들부터 무장 상태는 별 볼 일 없어도 살기 가득한 숙련된 전투 인력까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이 정체 모를 이들에 대해서는 중동의 왕들이 전례 없던 결심을 했다는, 믿기 힘든 소문만이 떠돌 뿐이었다.
그리고 중국 중앙정부는 이어지는 일련의 모든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지 오래.
“…다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시오.”
3선 연임은커녕 작금의 위치조차 매일같이 위협받는 처지로 전락한 총서기는 죽은 듯이 침묵만 지키는 관료들과 간부들을 돌아본다.
“대체 일이 왜 이 지경이 된 건지 말을 해 보란 말이야!”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던지 전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지고 눈 밑이 거뭇한 총서기였지만, 눈빛의 광채만은 잃지 않았다.
전과 결이 다르긴 했다. 예전의 눈빛이 은인자중하며 한 가지 목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21세기 황제로 거듭나고자 하는 절대적 목표가 있는 자의 자신감 있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광기와 집념 같은 것으로 가득 찬 것에 가까웠으니까.
그만큼 중국 공산당은 몰려 있었다.
상하이 자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크고,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 기반이 있는 곳이었다지만 전력이라고 댈 것도 없이 커다란 중국의 작은 부분이었을 뿐이다.
아니, 뿐이었다. 외부의 종자들이 끼어들어 판을 키우지 않았을 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차단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대만은 물론이요 미국의 암묵적 동의와 막대한 이득,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위구르 사태에 개입한 아랍 세계까지, 중국 공산당은 막지 못했다.
“이유를 모르겠으면 대책을 말해 보란 말이야, 대책을! 병신처럼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말고!”
그래서 총서기는 이성을 잃었다.
이것은 그의 야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방당해 온갖 치욕을 받는 와중에도 커져만 갔던 야심, 그것도 달성 직전의 절대 권력이 모래알처럼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 중국 공산당은 힘이 있다. 이 정도에 공산당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14억 인민을 다스리는 이 강대한 조직에게도 작금의 사태는 위기지만 어떻게든 위기에서 벗어날 여지는 있다.
문제는 총서기 개인.
“이 개자식들!”
총서기는 알고 있었다.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그 자신이 순교자 혹은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애초에 세 개의 정파로 나뉘어 돌아가며 총서기 자리를 주고받던 것이 무엇이던가? 그것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의 실천으로 하나가 몰락해도 나머지가 살아남아 공산당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현대사의 여러 위기를 겪으며 마련된 이 안전장치는 곧 발동될 것으로 보인다,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만약 총서기가 3선 연임에 성공하며 공산당 특유의 안전장치를 무력화시켰다면, 이런 불온한 분위기는 떠돌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총서기와 하나가 되었다면 감히 총서기를 버릴 생각을 하며 싸늘한 눈빛과 굳은 침묵으로 지켜보지는 않았겠지.
사태의 무용함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으며, 외세의 개입에 빌미를 준 현 사태가 총서기의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기 위안과 함께 모두의 공감대로 자리 잡았다.
만약 한 사람이 총서기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사태는 이쯤에서 끝이 났으리라.
“핵을 쓰시지요.”
누군가의 느긋한 말, 그러나 감히 꺼낼 수도 없던 단어에 장내에 자리한 이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경악을 담은 눈초리였다. 오죽하면 당장의 반박조차 없었을 정도.
“…핵?”
총서기조차 그랬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만 금기나 다름없던 마법의 단어를 꺼낸 노인, 중국 국가안전부의 여전한 권력자 청혈백사는 다르다.
“우리가 당의 적들에 비해 가지고 있는 가장 압도적인 우위 아니겠습니까?”
그는 나직하지만 강경하게 주장한다.
“우리에겐 핵이 있습니다. 이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인민의 피땀이 얼마나 소모되고, 희생되었습니까? 그건 다 지금과 같은 사태에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를 적대할 때, 우리의 손에 핵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마음 말입니다.”
청혈백사의 입장에선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당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지금이 아니고서야 언제 인민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쓰겠습니까? 어디에 써야겠습니까?”
청혈백사 또한 총서기의 순장품이 되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중국 공산당의 사파 고수 중 가장 큰 권력을 쥔 이로 군림해 온 그는 살면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당장 중국 공안 대다수가 중앙당의 통제에서 이탈한 것부터가 그랬다.
자신을 가지고 무공 실험을 한 청안혈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자안혈조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대다수의 당 간부는 생각하고 있었다.
혈마제마저도 사실 청혈백사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행되었던 인체 실험이 대체 몇 건이었는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지만.
“티베트 자치구에, 위구르 자치구에, 상하이에, 대만에 우리는 핵을 써야 합니다.”
일이 잘되어 갈 때는, 그로 인한 이득을 누릴 때는 왜 아무 말이 없다가 어그러지니 난리란 말인가?
다들 성인군자, 도덕자였던가?
아니었다. 국가안전부의 기획으로 실행된 인체 실험으로 만들어진 고수들로 당의 위세와 권위를 높였을 때만 해도 자신은 추앙받았었다.
성실한 당의 일꾼, 가장 열성적이고 실력 있는 무림의 고수로 자신을 치켜세우던 자들을 청혈백사는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총서기와 함께 자신을 버리겠다고?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아울러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도 마찬가지요.”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를 버린 자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 꼴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여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청혈백사였다.
문화혁명의 광기조차 피해 갔던 그가 아니었던가? 상대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러기 전에 먼저 죽이는 것이 무림인의 덕목.
“당을 건드리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 지 세상이 알아야 할 거요.”
청혈백사는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게 될 거요.”
그의 마무리에 정신을 차리고 헛소리 말라 일갈하려던 자들이 있었지만, 곧 침묵하게 됐다. 그것은 오직 청혈백사의 명령만을 듣는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그들 모두의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
끝까지 성격을 부리던 자 중 일부가 그 자리에서 참살당하는 일이 몇 발생하고 나니, 더는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살인이었고, 그만큼 청혈백사의 의지가 굳다는 반증.
“핵… 핵이라.”
사람이 몇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총서기는 죽은 자들의 시체가 대충이나마 치워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감정은 다른 이들과 사뭇 다른 듯해 보였다.
“그래. 그게 있었군.”
그는 공범자의 모습이었다.
“역시 당을 위하는 건 정찰국장밖에 없소. 대안도 없이 반대하는 자들과 다르다, 이 말이오.”
총서기는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감출 생각 없는 흡족한 미소와 아까보다 더 커진 광기는 그를 격동시켰다.
그래, 인민의 핵이 있었다. 북한이라는 저 작은 나라도 가지고 있는 핵, 언제든지 쏴 버리겠다고 까부는 그 핵이 당에도 분명히 있는데, 왜 자신이 그것을 잊었단 말인가?
“이를 말이겠습니까?”
청혈백사가 총서기의 치하에 허리를 숙인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유연한 허리는 필요에 의해 움직인다. 혹 총서기가 핵미사일 발사를 거부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사그라들며 편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만이 마음을 놓는 가운데 전 세계 정보 자산은 중국이 핵미사일 발사를 준비한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이에 연화존자가 베이징으로 급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