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근래 대만의 분위기를 설명하자면 여러모로 복잡하지만, 대체로 흥겹고 희망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공의 위기와 몰락에 가까운 타격은 이 섬나라로 하여금 그런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것을 이웃의 고난에 즐거워하는 못된 심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대만이라는 나라, 국가로서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존속해 온 아시아에서 가장 긴 역사의 공화국에게는 섬으로 쫓겨 왔던 국부천대 이후 중공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해도 무방하다 해도 될 지경이었으니까.
존재 자체를 위협하던, 언제고 대만을 점령하여 완전한 하나의 중국을 이루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중국 공산당이 돌이키기 힘든 타격을 입은 것에 한숨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의 위협에 더더욱 마음 졸여야 했을 것이 뻔한 일.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중국 공산당의 힘이 약해진 작금의 사태는 긍정적이었고, 이것이 대만 정파 연합이 상하이 사태에 개입한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현 상황에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중국 쪽에 선이 닿은 이들, 경제적으로든 뭐든 간에 아무튼 중국의 손해가 자신의 손해로 이어지는 입장이라면 몸과 마음이 좋을 수는 없겠다만 적어도 그걸 겉으로 표출할 만큼 무모한 사람은 딱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상하이 사태의 주도자들이 위풍당당하게 베이징에 입성,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며 기존 고위직들의 하야를 요구하는 가운데, 대만의 정계와 무림계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고 있다.
‘우리에게 마땅한 승자의 권한이 있다.’
대만의 정치인 중에는 공공연히 본토로 군대를 보내 무력 점령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마저 나올 정도였으니, 대중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
그간 공식화하지 않았던 정파 연합의 활약상이 알려진 건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지르다시피 했다.
그럴 뻔하기도 했다, 만약 미국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아직 인민해방군의 무장 해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면 한번쯤 건드려 보는 무력 도발은 정말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실질적 승리자인 상하이의 주도자들 역시 대만의 이러한 움직임을 심히 경계했던 바.
또 다른 충돌로 이어질 뻔하기도 했다.
실제로 대만 정파 연합에서 파견된 고수들과 당가그룹이 충돌을 빚을 뻔한 사건마저 있었으니, 그 사태를 겨우 막아 내고 쉴 틈도 없이 합류한 혈마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미, 쌔빠지게 고생한 게 누군데…….”
그리고 연화존자는 그런 혈마제의 투덜거림을 관대하게 받아 준다.
“저들에게 기분 좋을 일인 건 맞잖아?”
그러한 연화존자의 말에 한참이나 혈마제는 울분을 표출한다.
아직 제대로 된 후속 조치조차 끝나지 않았으며 티베트와 위구르에서는 소규모 접전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정파 연합의 무인들이 상하이에 머무르며 더 이상의 도움을 거부하고, 이를 핑계 삼아 당가그룹과 충돌한 건 있을 수 없는 배신이라며 그는 열변을 토했다.
만약 자신이 목숨을 걸고 둘 사이를 중재시키지 않았다면 충돌은 일어났을 거라며 이를 가는 혈마제를 연화존자는 좋은 말로 달랜다.
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연화존자 또한 알고 있다. 이 범죄자가 자신의 지시로 얼마나 많은 고생과 사선을 넘어왔는지, 작금의 결과를 도출하는 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모르지 않다.
모를 수가 없다. 늘어난 상처, 전과 달리 많이 가라앉은 눈빛, 상승한 무위와 늘 도망가고 억울해하던 전과 달리 자신에게만큼은 순순한 분위기.
그에 더해 죽이니, 살리니 했던 천지극뢰와의 평화로운 모양새까지.
저 정도 불만이야 넘어가고 달래 봄직 하지 않은가? 대우받을 만한 이가 대우받아야 한다는 건 연화존자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논리였다.
“중공이 강해질수록 중화민국이 두려워했던 건 사실이니까, 욕심이 날 만도 했겠지.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어서 우리가 온 거지만. 고생했다.”
“…하지만 누가 보면 저들이 제 힘으로 다 해낸 줄 알겠소.”
그것도 중공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혈마제이니 말이다.
“결국 그래 봐야 제놈들이 한 거라곤 우리가 깔아 놓은 판에 들어와서 숟가락 얹은 게 전부면서…….”
“숟가락치고는 조금 컸지. 주걱, 정도는 될걸? 뭐, 얹은 건 맞지만.”
중국은 휘청이고 있었다.
그 여파는 보통이 아니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건 몰라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분을 생각하면 작금의 사태가 각국 정부와 가계에 그리 행복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집단지도체제를 유지 중인 중국 공산당은 현 상황을 내전 혹은 내부 다툼 정도로 축소하고 싶어 하며 그 말인즉슨, 대만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히 시도하고자 한다는 말.
이것이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갈수록 전운이 감도는 이유였다.
이에 으르렁거리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일갈하던 사이인 대만은 물론이요, 국경을 맞대고 언제나 불편한 이웃 사이를 유지하던 인도, 거기에 연화존자의 요청으로 위구르에 병력을 파견한 중동까지.
대만의 움직임을 자제시켜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어디 혼쭐을 내러 가 보자고.”
그리하여 중재를 위해 나선 연화존자는 오직 혈마제와 상하이 사태 이후 더더욱 과묵해진 천지극뢰만을 데리고 대만의 정파 연합을 찾아왔다.
그건 그의 직속 수하라 할 수 있는 칠익회 출신들이 다른 곳에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그에 더해 한국은 현 사태에 개입한 적이 없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고수하기에 그랬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오만불손함은 쉽게 넘어갈 수 없었으리라.
“…약속도 없이 찾아왔으니, 만나 줄 수 없다?”
“그렇습니다.”
타이베이시 한복판에 위치한 크고 높은 빌딩 앞.
연화존자는 문전 박대를 당했다.
“현재 연합의 어르신들이 모두 부재중이신지라 연화존자께서 만날 수 있는 맹의 간부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자격으로 대만에 도착한 연화존자는 시간 끌 거 없이 곧바로 정파 연합의 무림맹 본부로 향했다.
회원 대부분이 무림의 문주와 기업가를 겸하는 현실을 반영하듯, 부유한 무림맹의 건물은 잘 지은 빌딩이어서 찾아가는 것 자체는 쉬웠지만, 정작 만나야 할 자들을 만나는 건 이토록 난항이었다.
하지만 연화존자는 화가 나기 전에 궁금해 질문한다.
“부재중이라면 권성과 도제를 말하는 건가?”
연화존자가 왔다는 소식에 잠시 부산스러웠던 무림맹 본부는 그를 로비에서 기다리게 했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타난 멀끔한 인상의 젊은이, 자신을 무림맹 제3총관직을 맡고 있는 팽휘라고 소개한 젊은 남자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두 분은 물론이고 대부분 부재중이십니다. 현재 대만 정계가 혼란하고, 기업 상황도 어려워서… 무림맹 본부에 자리할 만한 분들이 있을 수가 없지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연화존자의 초청으로 상하이 사태에 개입하고 활약하여 대만 내에서의 위치가 수직 상승 중인 정파 연합이 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경우 없는 행동에, 혈마제의 눈에 살기가 치솟고 침묵하는 천지극뢰마저 눈빛이 깊어지는 그때.
여전히 화가 나지 않은 연화존자는 궁금함으로 다시 묻는다.
“그럼 맨 위층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그러자 팽휘는 움찔한다.
“내 기감에 잡히는 존재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닌데 말이야.”
“그, 그것이.”
“대단한 고수야, 누군지는 몰라도.”
연화존자의 갸우뚱하는 말에 팽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낀다.
그도 물론 무림인이고, 연화존자의 명성이야 이곳저곳 안 들리는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빌딩이 몇 층이고 그 안에 사람이 몇이나 있는데 저와 같은 발언이라니.
“저만한 고수가 정파 연합 소속이 아니라는 건가?”
헷갈리기까지 했다.
이 안에 권성이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인가? 그래 놓고도 모르는 척인 건가?
연화존자는 그런 팽휘가 머리를 굴리도록 시간을 주지 않는다.
“확인해 봐야겠군.”
“자, 잠깐……!”
거침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연화존자를 팽휘는 자신도 모르게 잡아채려 했다. 팽가의 금나수를 펼쳐 묘한 궤적을 그리며 연화존자의 어깨를 잡아 말려 보려 했던 것인데, 문제는 그걸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
다음 순간, 젊은 나이에도 무림맹 제3총관직을 맡을 만큼 무공과 머리 쓰는 일에 빈틈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팽가의 일원은 구겨진 모습으로 로비 한가운데를 데굴데굴 굴러간다.
“어딜, 감히.”
가뜩이나 이 의도적인 무례와 무시에 화가 잔뜩 나 있던, 실은 대만으로 오기 전부터 정파 연합에 유감이 많았던 혈마제는 연화존자의 몸에 손을 데려던 무뢰한을 잔혹하게 응징했다.
“크아악!”
“막아!”
“지원 병력 불러!”
팔이 부러져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팽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절대로 명시적인 적대적 행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려 했지만, 상황은 벌어진다.
팽휘의 낭패를 본 주변에서 대기하던 정파 연합의 무림인들이 우르르, 연화존자의 걸음을 막기 위해 달려든 것이 그것.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거기에는 연화존자에 대해 널리 퍼진 열등감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연화존자가 대만의 경거망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협조하라는 요구를 하면 여러 가지로 곤란한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도 있었을 테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 이유 따위 아무래도 좋을 일이 되었다.
그들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혈마제와 천지극뢰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과 투쟁하며 호흡을 맞춰 온 두 고수는 그 경지가 완숙하여 한국을 떠나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고수가 되었던바.
수십 명이 몰려옴에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내력을 끌어 올려 잡고, 던지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차고, 후려치며 단둘이서 압도한다.
여전히 난폭한 기세의 혈마제와 깊게 가라앉아 끌어 올리는 뇌전공의 위력에 정파 연합의 무인들은 속수무책.
각 건물의 계단과 엘리베이터에서 우르르 몰려나오지만, 전부 혈마제와 천지극뢰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연화존자가 있었다.
“아악!”
“괴, 괴물…….”
누구도 연화존자의 걸음을 멈출 수 없어 걸음을 뗀 이후로 그의 속도는 한 번도 줄지 않았고 또 서두르지 않는다.
내력조차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가오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던지고, 날아오는 것이 있으면 받아서 돌려 주며 연화존자는 묵묵히 나아갔다.
표정조차 화가 나지 않아 보여 더욱 두렵게 느껴지는 이 절대 고수의 발자취는 쓰러지며 몸이 굳은 자들로 점점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한 층, 한 층 올라가 닿은 곳은 빌딩의 최상층.
장대한 체구와 짧게 자른 흰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가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입구를 등지고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연화존자의 표정은 그때가 되어서야 좀 바뀐다.
“정파 연합의 권성이 당신이군, 팽무월.”
웃으며 말하는 그를 권성 팽무월이 돌아본다.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표정의 연화존자에 비해 돌아보는 이 대만의 최고수 중 하나의 얼굴은 다소 복잡한 모습.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그에게 연화존자는 싱글거리며 물었다.
“쪽팔리게 이럴 건가?”
서로가 사진으로, 영상 정도로 얼굴을 아는 사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말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권성은 허겁지겁 쫓아 올라오는 연합의 무인들을 손짓으로 물렀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 꼴이 되어 쓰린 마음에 낯빛은 좋지 못하다.
“아예 만나지 않는 게 우리를 위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네. 용서해 주겠나?”
“그건 그러도록 하지.”
권성의 사죄를 선선히 수락한 연화존자는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남은 이야기가 있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