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신분이 드러날 것을 저어해서 놓았던 천마도검을 오랜만에 쥔 연화존자는 비록 하고자 하는 일이 벽에 막혔음에도 그리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은 좋은 편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다마는 개중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 함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왔기에 마음이 홀가분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국가무공원의 출현을 경계하고, 견제할 모든 세력을 눌러 놓고 오는 길이 아니던가?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다 못해 전보다 대한민국에 간절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게 만들었으며, 중국을 조각내 숫자를 불린. 많은 것이 바뀌어 마땅할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며 좌충우돌했던 시간들.
지난 몇 년은 연화존자에게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보람이 있었다 하겠다.
이전, 그러니까 조국의 민주화 이후에 받았던 실망을 뒤로 한 채 은거 아닌 은거를 할 때는 자유로웠다.
적어도 신체적으로 그랬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건드리는 법이 없던, 혹은 건드릴 수 없던 시절의 연화존자는 천마를 죽인 뒤의 여운을 제법 오랫동안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여행을 하고, 혹 할 일이 있으면 했다.
갖고 싶은 무공이 있으면 가졌고, 무공을 얻기 위해 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러저리 동분서주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나고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그는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무공이란 것에 천착하고 있었음을. 실은 더 높은 무공의 경지, 더 완벽한 무위란 뜬구름과 같았다는 것을.
대한민국에 들러 윤아영 검사를 만나고, 얼어붙었던 마음을 바꾸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예전의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기껏 반로환동이라는 기연을 얻고, 일개인으로는 상상조차 못 할 부와 힘을 손에 넣고도 이룬 것 하나 없던. 다시 얻은 청춘을 길바닥에 내버리듯 떠돌며 하나 이룬 것 없던 과거가 이제는 너무 아깝다.
물론 그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변화, 지금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가득한 것이 사실.
무엇보다 무공, 그가 가장 잘하고 원하는 무공 공부마저 제대로 해낸 게 없지 않나?
반로환동 이후 연화존자의 무공은 답보상태였다. 누군가와 다툴 것도 없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천마를 죽였던, 어쨌던 간에 상관없이 어쩌면 연화존자는 천마격살의 그날 이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리라. 단 한 발자국도.
그렇기에 무공을 수집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 옛 선인들의 지혜, 노도처럼 밀어닥친 20세기에 끊겨 버린 옛 선인들의 지혜에 길이 있을까 싶어 애타게 헤매었던 날들.
칠익회, 자신의 후원으로 새 삶을 얻었음에도 그것을 모두 버리고 희생한 아이들 쪽에서 오히려 더 난리이기도 했던 일.
그러나 보라. 결국 변한 것은 마음이었고 길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지.
이것이 마교의 가장 비밀스러운 지파의 흔적을 더듬으며 든 생각이다.
“죄송합니다. 이 근방에선 이 정도 말고 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주 작은 동굴에는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작은 흔적만이 남았다.
거기에서 건져 낸 거라고는 옷가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넝마와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로 만든 원시적인 도구들.
연화존자의 명으로 어느 정도 안정화된 티베트 자치구 인근부터 수색에 나선 제갈패밀리는 물론이고 아마도 이 근처를 가장 잘 알고 있을 현지인 중 누구도 이것이 마교의 흔적이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여기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실까요?”
이와 같은 장소는 이 거대한 산맥 곳곳에 널려 있었다.
왜 아니겠나? 인간은 어디에서나 산다. 굳이 마교도가 아니더라도 무슨 이유에서든지 간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산속으로, 동굴 속으로 숨었던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다.
개중에 마교도가 섞여 있었는지, 어쨌는지 단숨에 알 수 없을 만큼 산맥은 크고 넓고 오래됐다.
그리하여 제갈패밀리는 연화존자가 이제 맡은 바 일들을 서서히 정리하고 출발한다고 했을 때 기함을 토해 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직 마교의 흔적을 특정 짓지도, 위치를 한정하지도 못한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의 무능을 연화존자에게 고백하는 것만 같아서 애써 말리려 시도를 하기도 했다.
중원 본토로의 귀환을 이끌어 낸 영웅에게 그런 추한 꼴을 어찌 보일 것인가?
하지만 연화존자는 왔다, 세 명의 제자를 남기고서. 언제고 다시 일어설지 모르는 중화의 심장에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은 채,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공을 익힌 세 명의 제자들이 어떤 식으로 성장할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는 미뤄 두었던 마교의 마지막을 보고자 이곳으로 왔다.
“그래.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단숨에 될 거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이 일을 빠르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상하이에서의 무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화존자의 입장에서 엄연히 성공적으로 끝난 일이긴 하지만 그건 꽤나 무리한 행위였다. 중국까지 헤엄쳐 가는 것부터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상하이의 부유층과 권력자들을 속이고 이후의 혼란을 불러오는 일까지 어느 하나 과도하지 않은 게 없었다.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중국은 혼란하다. 이후 중앙당과 지방 조직 간의 암투가 횡횡할 것이다. 상하이가 했는데 자신들도 못 할 리 없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또한 이것은 그동안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기 위해 거의 모든 정치적 욕구를 탄압해 온 결과.
고로 각자도생이 일어날 것이었다.
연화존자의 협조자들은 이러한 흐름에 불을 지르리라. 대만과 티베트인들, 위구르. 거기에 마찬가지로 억압받아 온 민족들,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야심가들까지.
대한민국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혼란, 최대한 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긴 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지 않을 수없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연화존자는 안다.
그러나 남겨 둔 이들을 믿으며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한다.
“몇 년이 걸려도 좋아, 찾기만 해.”
그는 마교의 암해를 건너기 위해 그만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 * *
이렇게 연화존자는 다짐했지만, 온전히 여기에만 집중될 수는 없는 것이 현실.
첫째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 즉 마교지파 묵혈성의 흔적을 도통 찾아내지 못한 것이 컸다.
살령지문의 문주, 연화존자를 암살하고자 놀라운 이적을 보인 직후 오랫동안 사로잡혔다가 금제를 당한 채 북한으로 돌아간 귀령살의 증언은 꼼꼼히 채집되었지만, 그것이 묵혈성의 행방에 대한 큰 단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세월부터가 많이 지난 것이다. 묵혈성의 마지막 생존자로 추정되는 자의 거처를 귀령살이 제대로 기억해 내지도, 정확히 묘사하지도 못한 것도 그렇지만 그것부터 이미 과거의 이야기.
설령 묵혈성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걸 구분할 능력이 연화존자를 제외하곤 다른 수색대엔 존재하지 않았다.
연화존자 김철민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기이한 예감, 만약 가야 할 곳에 왔다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만 있는 게 전부.
아직까진 느껴지는 것이 없어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전부다.
두 번째 이유는 수색 외부의 이야기.
이곳은 온전히 연화존자의 영역이 아니었다.
수색 범위가 티베트 인근도 인근이지만 위구르 자치구 지역 쪽으로 뻗어 있다 보니 혼란이 다 가시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 살던 이들은 물론이요, 이슬람 형제들을 구하겠다며 뒤늦게나마 손을 뻗은 외부 인사들로 위구르 자치구는 제법 북적이는 중.
이 넓은 지역, 그것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훑어가기엔, 제갈패밀리의 숫자가 적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숫자가 소수였던 것은 아니어서 주변의 관심을 샀다.
연화존자의 신분은 자연스레 알려졌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날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라.”
연화존자는 자신의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는 검은 피부의 인도인을 보며 중얼거린다.
여기에서 발목이 잡힐 거라고는 그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 인도는 크고 부강한 국가요. 그리고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 숙부께서 중앙에 연줄이 좀 있다오. 우리가 서로 도울 일이 있지 않겠소?”
연화존자가 생각하기에 혹 항의가 들어온다면 천산 산맥 서쪽의 세 국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서 들어올 거라 예상했었다.
위구르 자치구와 접해 있는 이들 세 나라에는 그의 영향력이 적었기에 했던 생각이다. 당장 위구르도 연화존자의 개입으로 악의 어린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긴 했지만, 티베트와 다른 이슬람 국가들을 움직인 간접적인 방식 때문에 도움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아무리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해도 제갈패밀리의 수색이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리 산맥이 크고 넓다 해도, 티베트 자치구 쪽 히말라야 지역을 수색하는 이들과 반으로 나뉘어 나섰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리 없지.
하지만 의외로 천산 산맥 서쪽 세 국가에서 별다른 항의는 없었고 오히려 인도 쪽에서 이 난리라.
“내게 바라는 게 있나 봅니다?”
중국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덕에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세 나라는 연화존자의 행동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실질적으로 말리기 힘들다는 점도 있었겠지. 무력은 둘째치더라도 중국에 대해 유감이 많은 이들은 연화존자에 대한 호감이 깊은 상태이니, 굳이 벌집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인도 쪽은 조금 달라 제갈패밀리의 수색을 군대가 헬기와 보병들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감시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날 불러낸 걸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나?”
인도군 쪽에서 뭔가를 먼저 요구하진 않았지만, 다방면의 정보 수집과 도통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는, 군의 돌연한 개입에 제갈패밀리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 인도군의 움직임을 분석했고 이들이 원하는 것이 연화존자와의 접촉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대한 여유로움을 가장하지만 부정맥이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험한 심장박동 수와 긴장된 냄새를 풍기는, 이 지방의 군인이 아니라 인도 정부 차원에서 원하는 접촉이라는 것을.
“…눈치가 빠르시구려.”
“안 그랬으면 이때까지 못 살아남았지. 잘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하여 연화존자는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무공 또는 국가무공원을 통한 협력을 원하는 걸까?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이야기하며 막대한 군비를 쏟는 핵보유국인 나라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미군이 쓰는 걸 자기들도 쓰고 싶을 수도 있다. 무공이라는 기예의 대규모 보급에 유혹을 느껴 이렇게 나왔을 수도 있지.
어찌 되었건 간에 나라 자체가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나라였고 대가만 맞다면, 결국 결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내릴 것이며 또 많은 고민을 해야 되겠지만, 조건이 갖춰진다면, 조금 수정을 해야 하긴 하겠지만, 넘겨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걱정이 되는 게 한 가지 있을 뿐.
“왜 나를 중앙에서 보자고 하는 거지?”
“중앙에서는 거래라고 했소, 미스터 김.”
쏘아보는 연화존자의 강렬한 시선에 인도인 군인의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군 경력을 걸고 이 자리에 나온 인물.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입이 열린다.
“그대가 원하는 걸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전해 왔소. 나는 그 말을 전달하는 게 전부요.”
그 말에 연화존자는 뉴델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래도 마교에 대해 인도 정부가 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