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44화 (144/175)

144화

연화존자는 당가그룹에서 보인 내분과 배신 그리고 처리에 개입하지 않았다.

당가그룹이 흔들리면 그동안 해 왔던 많은 다른 것, 예컨대 대한민국에서의 기반과 중국에서의 시작 같은 것들이 어그러질까 불안할 법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당가그룹 내부의 일이었고, 그들 집안의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당군명과 당청영을 믿었다.

그들이라면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설령 독군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그랬다. 비록 자신이 한 손 보태긴 했어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의 거인, 다 무너져 버린 사천당가를 당가그룹으로 재탄생하게 한 거목이라면 마무리마저 깔끔하리라고 연화존자는 믿었다.

그렇기에 국가무공원 측의 선제적 조치를 묻는 조심스러운 문의에도 일단은 기다리라고 대답했다.

당가그룹은 이러한 연화존자의 믿음에 부응했다. 제 욕심으로 움직이던 자들이 모두 처리된 건 바로 그런 의미.

그룹 내부의 동요와 진행하던 일들의 일부가 멈추거나 지연되었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기에 연화존자와 국가무공원의 인내는 어느 정도 보상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터.

하지만 정작 그가 직접 움직인 일인 인도에서는 아니었다.

군대마저 움직여 압박하던 그 노골적인 움직임에 곧바로 반응했던 연화존자는 정작 도착해서는 하염없이 대기할 뻔했던 것.

이것이 비단 인도의 수도, 뉴델리가 크고, 많고, 복잡한 도시여서 그랬던 건 아니다.

먼저 만남을 청했음에도, 먼저 그러한 의사를 밝혀 왔음에도 정확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도의 고위급 인사들은 연화존자를 기다리게 했다.

‘이게 바로 인도식 시간표인가?’

악명이 높다 못해 전설적이기까지 한 인도식 타임 테이블에 대한 격언을 떠올리지만, 그건 아닐 거라는 생각을 연화존자는 했다.

단순히 늦기만 한 거라면 이토록 번뜩이는 감시의 눈동자를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빛낼 리 없었으니까.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짜증이 솟구쳤다.

연화존자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교의 신물 속에서 수십 년간 닿지 못하고 헤매던 실마리, 무공의 상승에 대한 단서를 찾고 얼마나 큰 갈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가?

중국에서의 일이 과격하고, 그 주변부의 일이 과감했던 건 바로 그와 같은 마음과 비례했다.

대한민국을 어느 정도 정리하며 믿을 만한 사람들과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음에도 떠나지 못했던 것. 그것은 자신을 노리는 비수를 참지 못한 격한 감정의 발로가 아니었던지.

어쩌면 조급함일 수도 있었다. 마교의 신물이 존재함을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을 부른다는 걸, 알 수 없는 안배가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장의 일이 급해 떠날 수 없는 건 연화존자의 마음에 자칫하면 큰 화가 될 심마가 될 뻔하기까지 했으니.

연화존자가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컥.”

“큭.”

빈민들이 사는 움막만도 못한 빈민가를 지난 연화존자는 담벼락을 넘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바깥의 악취와 가난과 달리 잘 정돈된, 부유하고 권력 있는 몇 명만을 위해서 존재하기에는 과분한 크기인 장소에는 삼엄한 경계가 여럿 있었지만 연화존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탁월한 감각으로 멀리서부터 발치에 치이는 돌 따위를 차올려 감시 카메라와 센서 등을 부수고, 반응할 틈도 없이 쇄도하여 경계 인력들을 모조리 기절시키는 연화존자의 침입은 파죽지세.

뒷일 따위는 생각조차 않는 침투, 아니 침입이었다.

그래서 그리 금방 알아챈 걸까? 잠든 줄 알았던 거대한 저택이 깨어나며 부산스럽고, 소란해지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연화존자는 이번에도 걱정하지 않는다.

침입은 들켰을지언정 정체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그에겐 있었다.

“안녕하신가?”

설령 들킨다 한들 어쩔 거란 말인가? 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어 놓아 줄 수밖에 없게 될 텐데.

인도의 오랜 정치 명문가, 그 안에서도 얼마 전 총리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거물급 정치인을 잠옷째로 붙잡아 자리를 피한 연화존자는 그런 자신감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멍청함을 발휘하진 않을 거라고 믿어.”

바깥 경호 인력들의 소란에 상관없이 자고 있던 전직 총리를 연화존자는 주머니의 물건 꺼내듯이 데리고 나왔다.

최첨단의 기술도, 눈에 불을 켠 인력들도 그런 연화존자를 찾지 못했기에 두 사람은 방금 지나온 가난의 악취, 아직도 남아 있는 카스트의 견고한 담장 아래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을 더듬어 돌아와 인적이 끊긴, 빈민가 안에서도 주인을 잃은 지 오래인 폐가 안에 기감으로 벽을 세운 절대 고수는 조용히 물었다.

“내가 인내심이 좀 없어서 말이야. 무슨 소린지 알겠지?”

전직 총리는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차분히 헤아렸고, 연화존자는 그럴 시간을 주었다.

평소처럼 엄했던 경계를 뚫고 들어온 복면의 남자. 확신할 수 없지만 보이는 부분만 봤을 때 느껴지는 동아시안의 느낌, 무공을 익혔을 게 분명한 모든 징후 하나하나를 인도의 전직 총리는 차근차근 헤아린다.

그것은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소리를 치거나, 되도 않는 겁박을 하거나, 발악하며 공포에 질려 떨 줄 알았는데, 그를 이곳으로 불렀다고 알려진 거물급 정치인의 반응은 묘하게 차분했으니.

타고난 천성이 대범한 탓일까? 아니면 수십 년간 혹독한 정계에서 경험을 얻은 탓일까?

연화존자가 보기에 정답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오.”

노회한 정치인은 이 사태가 불운하다는 점을 알림으로써 책임을 축소하려 든다.

“나 또한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오.”

“아, 우리 모두가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상황과 맞닥뜨리곤 하지. 난 그걸 인생이라고 부르곤 해. 혹은, 후회나 잘못이라든지 말이야.”

연화존자의 날 선 반응에 상대방은 쓴웃음을 짓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고, 그로써 떠오르는 다른 일들이 여럿 있는 모양새.

“옳은 말이군.”

그러고 둘은 말을 않는다. 번져 가는 소란, 결국 억누르지 못하고 저택의 담벼락을 넘는 당황과 공포를 배경 삼으면서도 두 사람은 잠시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할 말이 있는 자는 차마 떼지지 않는 입을 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이 있는 자는 대범하다. 자취를 더듬어 오는 추격에도 연화존자는 시간을 준다.

애초에 귀찮음에도 국가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온 자리 아니었던가? 급하게 서둘러서 놓치지 않는다. 알게 될 사실은 알게 되며, 나와야 할 말은 결국 나올 것을 안다.

과연 그렇다.

“…맹세코 그것이 마교의 물건인 줄 몰랐소.”

저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대한 땅덩어리, 독립과 함께 종교와 정체성 등으로 찢겨 나간 나라에서 마교는 조금 나중 문제였던 바.

마교에 신경 쓰기엔 산적한 문제가 많던 국가였고 냉전의 틀에 끼워 넣었다가 한쪽으로 튀면 여러 나라가 곤란했던 곳이었으니 마교의 물건, 무공, 사람에 무지하다 해도 영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자의 경력과 집안만 아니었다면 연화존자도 믿어 줬을지도 모른다.

“진실된 대화를 할 생각이 아무래도 없나 보군.”

손등으로 턱을 괸 연화존자는 슬슬 지루해진다. 슬슬 기분이 그렇다. 언제까지 이런 뻔한 수작, 눈치가 빤한 거짓말을 들어 줘야 하는 걸까?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부터 존귀했고 이후로도 가장 권력 지향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신이 마교의 물건인 줄 몰랐다? 이봐, 최소한 앞뒤 상황 정도는 설명하고 거짓말을 하는 게 좀 더 진정성 있지 않겠어?”

그의 시간은 소중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경고 한마디를 남긴 채.

“적어도 난 정성을 보였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해. 앞으로 내 작업을 방해하는 놈들은 국적 상관 없이 실종 처리 할 준비하는 게 마음 편할 거라는 것도.”

연화존자로 하여금 인도로 오게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치인은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신비로운 동양인, 세상 그 어떤 무림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저 극동아시아의 남자가 이 자리를 빠져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중국이 저자의 손에 의해 조각났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중국과 여러 면으로 경쟁하던,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나라에서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연화존자 덕분에 중국이 전 세계 산업에서 가지고 있던 위치를 뺏어 올 생각을 하며 남몰래 웃음 짓던 나라의 정치인이었기에, 그 반대급부로 연화존자에 대해 안다. 극히 위험하고, 통제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처리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사람.

“…10년 전의 일이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장을 겨우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입을 떼지 못한 건 과연 방법이 있겠나 싶은 기이한 현상 때문.

“내 아들놈 중 하나가 방황을 좀 했소. 내게 불만이 많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젊은 날의 치기라 여겼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었소. 어쩌면, 그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거물급 정치인이 밝히는 집안의 치부 자체는 차라리 흔한 것이었지만, 비슷한 상황의 불량한 친구들과 부모들의 눈을 피해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의 현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는 내 책망에 아들놈은 크게 화를 내고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소. 그리곤 사라졌다가 한참이 지나서 나타났지. 무슨 수를 써도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더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인맥과 힘을 발휘해도 내 자식의 자취는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끝이 났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조차 여지껏 의문이오.”

어두운 눈빛, 바깥의 고함을 들으며 가라앉는 늙은 정치인이자 아버지의 눈빛은 깊은 검은색을 띠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내 아들의 속에는 다른 것이 있었소.”

그것은 권력으로 뭐든지 해낸 이조차 닿을 수 없는 심연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사악하고 또 사악한 것이란 것만은 알 수 있었소. 평소에는 공허하여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삭이지만 아주 간혹, 주변을 돌아보는 그것의 시선에는 측량할 수 없는 악의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능숙한 정치인인 그조차 인간인 걸까? 불가해한 무엇에 대해 설명하는 눈빛에서는 아비로서의 근심과 인간으로서의 공포가 담겨져 있었지만, 연화존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 빨리 듣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가공할 무공으로 아들을 고쳐 달라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닐 텐데.”

궁금할 뿐이다. 그가 마교의 흔적을 찾는지조차 저쪽에서 알고 있다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런 얘기를 왜 하는지.

기대하는 바가 없진 않지만 빨리 듣고 싶었고 그러한 연화존자의 기대는 곧 보상받는다.

“내 아들이 친구들과 향했던 곳이 그대가 수색을 진행하는 부근이라 추정되고 있지. 이 정도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렇군.”

연화존자는 여지없이 인정했고, 한밤의 납치극은 그것으로 종결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