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포효는 어둠과 함께 왔다.
처음에는 연화존자 정도나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하 깊숙이 있던 기척. 대체 얼마나 아래로 내려가야 했을지 모를 말라 버린 우물 아래의 어떤 존재는 시시각각 빠르게 포효하며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았다. 자신을 가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을 잊어버리고자 시도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그 존재는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한편으론 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분명 울부짖음이었지만, 분노와 노여움으로 가득한 괴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확실한 웃음이 있었다. 기쁨, 올라가는, 어둠을 벗어나게 하는 생사 대적의 존재에 대한 희열, 누가 왔는지 확실히 아는 듯한 목적지가 분명한 감정들.
대체 얼마나 깊은 우물이었던 것일까? 얼마나 긴 암흑이었던 것일까? 연화존자는 순간 어둠에 사로잡힌 남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고 동시에 저 불쌍한 남자, 권력자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벗어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인 자를 조금은 동정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지상에 다다르고, 우물 위를 덮은 두꺼운 돌판이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안개처럼 쇄도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오행무극도의 내력을 가득 담아 상대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키에에엑!”
그렇지만 마음 가득한 동정심으로 날린 일수, 한 번에 목숨을 끊겠다는 연화존자의 자비는 실패한다.
전직 총리가 가둬 놓은 아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솟아오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연화존자의 일격으로 날아가 버린 남자의 전신은 이미 검은 안개에 잠식되어 사람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으니까.
그건 차라리 검은 안개의 형태를 한 새로운 모습의 무언가라고 부름이 옳았다.
어둠에 먹힌 채 끊임없이 요동치며 모습을 바꾸는 그것은 마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괴물 같았다.
21세기, 인간이 우주로 떠나는 것도 모자라 온갖 놀라운 과학과 기술로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들을 벌이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무림의 신비가 땅에 떨어진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불안하도록 원시적인 무언가에 좌중은 얼어붙는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이건 좀… 역겹군.”
이 역겨움은 외관 때문이 아니다.
연화존자에게는 보인다. 한 사람의 육신과 정신에 기생한 채 움직이는 무언가가. 천의무봉의 경지에 도달한 내공의 조예는, 인간의 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단련된 무인인 그는 검은 안개의 흐름이 완연한 기생충의 그것임을 단박에 간파한다.
말라비틀어진 강처럼 미약한 생명력, 검은 안개를 뿜어 대는 저것과 다른 흐름의 선천진기가 명백한 압제의 형태로 흡수되는 것을 연화존자는 느낀다.
그건 마치 온 강호가 두려워하며 혐오했던 전설적인 마교의 무공, 흡성대법의 한 갈래를 이은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이 저절로 든다.
“크르르… 흐으으… 죽인다… 너…….”
아마도 그 예상은 옳으리라. 그게 아니고서는 저토록 완벽하게 작용하는 기생과 흡수의 메커니즘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마교의 숨겨진 신물을 찾으러 온 상황에서 마주친 괴현상에 흡성대법이 있으리란 짐작은 과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극도로 주의해야 하며,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옳은 진술이겠지.
“죽인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며 괴이한 것과 손을 섞은 연화존자였지만, 역시나 쉽지는 않다.
‘…명불허전이군.’
검은 안개의 괴인은 폭발적인 기세가 무색하게 무력하다. 연화존자의 공격에 변변한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얻어맞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
이상할 정도로 단단한 몸뚱이를 믿고 무식하게 들이대는 것이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공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수준.
몸이야 튼튼해서 연화존자의 진심 어린 일격조차 맨몸으로 받아 낼 정도라지만, 그게 다였다.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고수였다면 감당할 수 없을 테지만, 어디 연화존자가 경지를 논할 수준이던가?
그럼에도 연화존자의 안색이 보기 드물게 펴지지 않는 건 미미하게 흡수되는 아주 적은 양의 내력.
흡성대법이 옳았다.
“크흐흐흐… 흐흐흐…….”
순식간에 온몸이 격타당하면서도 괴소와 함께 놈이 밀고 들어오는 건 아마도 그래서였을 터였다.
남자의 전신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둘러싼 채 조금씩, 연화존자의 내공에 대한 장악력을 뚫고 조금씩 연화신공을 흡수하는 희열.
상대하는 입장에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이다. 천금 같은 내력을 보도 듣도 못한 것에게 흡수당하는 그 기분이란, 연화존자에게도 전례 없는 것.
그리하여 손과 발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궁리한다. 한 번 출현할 때마다 강호를 피바다에 잠기게 했던 흡성대법의 전인들을 과거 선인들은 어떻게 상대했던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대저 이종의 진기를 몸 안에 받아들인 마인들이 결국 견디지 못해 폭주한 끝에 심맥이 갈가리 찢겨 종결된 게 전부. 상대하는 입장에서 뾰족한 수를 냈던 기록을 연화존자는 떠올리지 못한다.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칠색홍예수의 사나운 무지개가 괴인의 웃는 얼굴을 후려친다. 장심을 내밀어 이를 부러뜨릴 요량으로 내민 손길이었건만 이해할 수 없는 질김으로 버텨 낸 괴인, 마교지파 묵혈성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여전한 괴소와 으르렁거림만을 표출한다.
버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뒤로 구르며 온 주변을 부수고 다니면서도 말이다. 그 와중에 아까보다 흡수된 내력의 양이 조금이나마 늘었다는 사실에 연화존자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놈이 일으킨 흙먼지 너머를 노려본다.
놈의, 괴인의, 저것의 기쁨 또한 커졌다.
마교와 관련이 되었다고만 생각되는 전무후무한 기사의 주인공, 무슨 조화로 저런 괴물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가련한 희생자의 몸속에서 어두운 무언가는 기쁘다며 킬킬대고 있었다.
연화신공을 흡수한 것이 기뻐서 저렇다는 걸 모를 수는 없다. 연화존자에게 잘 없는 종류의 낭패이기도 했고, 당장은 방법이 없어 보이는 곤란함.
그렇지만 조급해하지 않는다.
다만 차분히 관조한다. 이 상황과 마교의 괴물, 흡성대법. 무엇보다 제 자신을 연화존자는 어려움 속에 돌아본다.
고작 저런 것에 무너지기 위해 살아왔던가?
“크하하하하하!”
아니었다.
“흠.”
크게 웃으며 자신 있게 달려드는 괴인 또는 괴물에게 다시금 손을 쓴다. 아까와 다른 방식이었다. 연화존자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빛, 타오르는 강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거기에 직격당함에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드는 것이 아까와 똑같은 상황.
연화존자가 상대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무식할 정도로 튼튼한 상대는 변하지 않는 연화존자의 대응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바위도 부수는 연화신공의 강기를 맨몸으로 맞으면서 웃음과 포효를 흘리는 건 그렇게 보였다.
이 상황을 멀찍이 떨어져 보는 자들조차 걱정과 함께 고민을 하게 했다. 도망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개입해야 하나? 그러나 개입한다면 어떻게? 무슨 수로?
강기조차 뚫지 못하는 자를 상대로 총이라고 먹힐지 의문이기도 했지만, 저기 날뛰는 그는 인도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의 아들이었다.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실질적 의미로 죽일 수도 없지만 함부로 죽이기에도 두려운, 그런.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여기까지 왔다는 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의미.
하지만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며 어쩔 줄을 모르던 그때.
불현듯 살아 있는 검은 안개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크흐… 크흐어… 크하아아악!”
그것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 완벽히 다른 분위기로 그것은 비명을 지른다. 온몸으로 소리 지르며 나뒹구는 모습에, 보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연화존자의 강기도 먹히지 않던 게 아닌가?
대체 왜 저 검은 안개가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는가?
답은 오직 연화존자만이 알고 있다.
“…추잡스럽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다가간다. 괴로워하던 검은 안개는 두려운 듯 뒤로 물러나려 하지만, 팔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지 구르다시피 하며 흙먼지를 들이켠다.
그럴 수밖에. 연화존자가 저것의 맥을 끊어 놨으니.
연화존자가 주목한 건 저것, 그러니까 저 불쌍한 남자를 지배하고 있는 마교의 무언가, 신물이 되었던 아니면 더러운 어떤 것이 되었든지 간에 흡성대법의 원리를 운용하는 정체불명의 저것과 지배당하는 자 사이의 연결 고리였다.
길고 긴 세월에도 완전한 하나가 아닌 둘 사이를 연화존자는 갈라 놓기로 했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자신의 감을 믿었다.
드러내 놓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연화신공의 오행무극도의 묘리는 은밀하여 마교의 무언가조차 제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알아채지 못했다.
은밀하고 차가운, 한편으론 뜨거운 그 치우침 없는 내공이 자신의 사이로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날뛰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의 내력을 흡수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연화존자가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고 여기며.
그 결과 쓰러져서 벌레처럼 뒹굴고 있다. 술에 취한 취객처럼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것은 이제 제대로 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꿈틀대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분 꼴의 결말.
연화존자는 쓰러진 그것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그걸 기회라고 여겼던 걸까? 바닥에 얼굴을 박고 덜덜 떨던 그것이 최후의 발악을 한다. 최후의 힘을 모아 팔을 뻗어 연화존자의 발을 잡으려는 건 아마도 흡성대법을 기대하는 것이었을 터.
그 기대대로 연화존자의 발에 닿지만, 비록 연화존자가 재빠르게 발을 들어 그것의 손을 콱 밟은 것에 불과했지만 잠시간의 미소가 지나갔다.
하나 다음 순간에는 아니었다.
“소용없어.”
흡성대법의 총화이자 묵혈성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 낸 의식체는 절망이란 감정을 배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숙주와의 연결을 끊어 낸 것도 모자라 결코 길지 않았던 공방의 사이, 흡성대법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에 대한 지배력을 완성한 연화존자에게서 비롯된 감정.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이지만 흡성대법의 공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건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몰이해가 채워질 일은 없으리라.
“지겹군. 끝내지.”
연화존자의 손에서 다시 한번 유려한 무지개빛 수강이 타오르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검은 안개를 스친 뒤 보이는 건 피폐할 정도로 빼빼 마른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직 총리의 유폐된 아들이었음을 연화존자는 알았지만, 용케도 숨이 붙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연화존자는 그에 대한 관심을 잠시 뒤로 미룬다.
흩어진 검은 안개가 그의 주변을 감싼다.
이제는 안개가 아니라 마치 먼지처럼 켜켜이 둘러싼 그 알 수 없는 기운은 수많은 속삭임을 담고 있었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 해도 보통의 집중력 이상을 요구했던 바.
거기에는 깨달음이 있었고, 선함과 악함이 있었으며, 삿된 것과 바른 것이 있었다. 이 길고 긴 수색을 충분히 보람이 있게 만드는 귀한 것들.
김철민과 그의 일행이 자리를 뜬 건 그 속삭임들이 멀어지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