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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51화 (151/175)

151화

이제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어 가는 윌리엄의 삶은 암울하기만 하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의 아래로는 세 명의 이부동생들이 딸려 있었고, 지역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하루 13시간씩 일하는 어머니의 수입은 네 명의 자식들을 겨우 입히고, 겨우 먹이는 것으로 한 달 노동의 효용을 다한다.

그러니 윌리엄이 가외 수입을 얻기 위해 동네 형들 혹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다들 이렇게 사는걸, 뭘.’

어린 윌리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길에는 돈 벌 구석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최소한 가계에 보탬이 되는, 비록 아버지가 다르긴 하지만 가족임이 분명한 어린 동생들이 굶지 않게 해 줄 돈, 돈이란 걸 길에서는 벌 수 있었다.

아무 쓸데없는, 듣기만 좋은 소리여서 영 들어 주기 힘든 학교와는 다르게 말이다.

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진작 바뀌어야 했겠지. 삶도, 세상도, 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웃기는 소리. 윌리엄에게는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그럴 돈도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런 건 자기 같은 까만 놈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길거리의 형들은 말했다. 그건 깜둥이답지 못한 일이라고, 까만 피부 가진 놈들이 어딜 하얀 놈들 흉내를 내는 거냐며 형들은 공부 열심히 하고 인내하는 다른 검둥이들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속에 풀리지 않는 분노와 같은 어떤 것들을 품은 채 소소한 가외 활동을 벌인 대가로 어린 윌리엄은 경찰에 두 번이나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이거야말로 깜둥이 놈의 운명이니까. 지나가다 아무 이유 없이 검문을 당하고, 아무 이유 없이 위협당하고, 사람들이 피하는.

백인 흉내를 내지 않고 흑인, 그 자체로 살아가자면 어쩔 수 없는 삶이 바로 이런 거니까.

그리고 그런 윌리엄의 철저할 정도의 관념, 견고했던 세계관은 오늘. 그를 방문한 뜻밖의 동양인으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고 있는 중이었다.

“네가 윌리엄이군.”

검은 정장을 입은 동양인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칼 같은 기세가 어려 있어 윌리엄을 주눅 들게 했지만, 이미 거리 위를 방황하며 온갖 일일 다 겪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어린 소년은 이를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갱단의 형제들에게서 배운 생존 철칙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겁 먹은 걸 상대방이 알게 하지 말라.

그리 성공적이진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무슨, 무슨 일이죠? 저 보호관찰도 잘 받고 있어요.”

여기서의 ‘잘’이 뭘 의미하는지 설명할 용의도 윌리엄은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공기마저 팽팽히 당겨진 알 수 없는 기분에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을 뿐, 스스로의 추태가 부끄럽다고 생각되지 않았다면 기꺼이 입을 열어 자신이 얼마나 조심히 살고 있는지 전부 다 털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어느새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무릎과 허벅지, 그 중간 어디쯤에 팔꿈치를 댄 채 손바닥으로 턱을 괸 남자. 아직까지 자기 이름과 정체도 밝히지 않은 남자가 보내는 속을 파내 버릴 듯한 눈빛에 오금이 저려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기에.

다행히도 구원자는 바로 옆에 있었다.

“윌리엄, 나는 이 근처 태권도장의 사범, 김준태라고 해. 네 친구, 마이클한테 이야기를 듣고 왔단다. 네 어머니하고도 통화를 했고.”

자신을 김준태라고 밝힌 태권도 사범의 이야기를 듣고 윌리엄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마이클이 자신과 친구였던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마이클은 교내에서 제일 가는 범생이 흑인이었다. 같은 흑인끼리 어울리는 법 없이 어머니가 십 년은 일해도 절대 사지 못할 부모님의 비싼 차를 타고 등하교하는, 지역에서 부자라고 알려진 딱 세 집 중 부자 흑인 가족의 아이.

근데 걔가 날 친구라고 했다고?

윌리엄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느낀다.

“내가 왜 그딴 놈하고 친구야?”

눈이 돌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린 소년을 거리의 무법자로 만든 바로 그 감정이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수줍기까지 한 성격의 윌리엄이지만 가끔 이렇게 가슴 한편에서 불이 날 때마다 꼭 사고가 발생했다.

바로 지금처럼.

“씨발, 그놈이 나에 대해 뭐라고 했는데? 길에서 심부름하다가 경찰에 끌려갔다고? 술 취한 놈 두들겨 패고 도망 왔다가 경찰이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운 좋게 보호관찰로 끝났다고?”

“윌리엄, 우리는 너를 비난하거나…….”

“씨발, 닥쳐!”

윌리엄은 눈이 돌아가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위협적인 몸짓을 한다. 소년의 정신은 아직 제 나이대에 간신히 머무르고 있지만, 육신은 그렇지가 않아 180을 훨씬 넘은 윌리엄의 육신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더한 근육과 탄력을 가지고 있다.

집 안의 동생들은 물론이고 어머니조차 소년을 말리지 못하지 않던가? 괜히 지역 갱단이 윌리엄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염두에 두고 영입한 게 아니었다. 겉모습만으로도, 가정환경적으로도 훌륭한 인재였지.

지금도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 금방이라도 내리치려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윌리엄의 무게를 겨우 지탱하던 의자의 가냘픔이 유독 부각되는 모양새.

누군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다섯 가족이 살기엔 턱없이 좁은 집이 오늘도 부숴질 것처럼 보였다.

“그만.”

발광하던 윌리엄을 멈춰 세운 건 언제 일어났는지 보이지도 않던 그리고 언제 윌리엄의 팔과 어깨를 누르고 있었는지 모를 남자의 제지였다.

“그만해라, 꼴사나우니까.”

윌리엄은 무슨 개소리냐고 선생이나, 부모, 경찰에게 했던 것처럼 소리치지 못했다.

남자의 손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고작 한 손이었음에도 말이다.

“동생들이 울고 있지 않나?”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고, 피가 식으며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한구석에 함께 모여 오돌오돌 떨고 있는 동생들. 그런 애들을 위로하는 태권도 사범. 자신을 똑바로 깜빡임도 없이 쳐다보는 남자의 눈동자.

그 안에 비친 추한 자신의 모습.

말로 형언키 어려운 감정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윌리엄을 바라보며 남자는 말했다.

“갈 길이 멀구나. 갈 길이 멀어.”

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또 무슨 갈 길이 멀다는 건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 비참한 순간, 윌리엄은 떨쳐 낼 수 없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다.

“넌 나랑 빡세게 굴러야겠다.”

이 남자와 어쩐지 오래도록 볼 것 같다는 계시와도 같은 감정과.

“나랑 함께 가자. 그놈의 성질 머리부터 네 인생까지 전부 바꿔 주마.”

자신의 인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완전히 나뉠 거라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 * *

미국의 마약 퇴치 운동에 지울 수 없는 역사를 남긴 증산방,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이 착수한 다음 프로젝트는 ‘빈민가 청소년 갱생 프로그램’이라는 다소 밋밋한 이름을 표방했다.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대로 두면 어두운 길로 빠질 것이 뻔한 청소년들에게 무공을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다는 것.

프로젝트 대상 등을 고려해 보면 그 절대다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흑인 청소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프로그램 수혜 대상으로 17세 이하 보호관찰 중인 청소년을 선정하기로 했으니.

그러니 여기에 대해 설왕설래 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증산방이 내세운 갱생의 방법이 무공을 통한 심신 단련이 아니었나?

‘이것은 역차별이다.’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공은, 기존의 마샬 아츠들과는 차원이 다른 혜택적 성향이 짙었으니까.

특히 전통적인 투기 종목에서의 반발이 심했다.

그동안에야 증산방과 국가무공원의 무공 전수가 마약중독 치료 중에 일어난 소수의 사건에 불과했고, 확장보다는 내실을 기울이는 식의 가려 뽑는 선발 방식이었기에 딴지를 걸기 어려웠지만, 이 빈민가 청소년 갱생 프로그램이라 이름 붙여진 일들은 조금 다르다.

실질적인 위협 여부를 떠나 심리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 자기 같아도 내공이라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이고, 또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아무래도 안심하기 어렵겠지.

그래서 증산방과 국가무공원은 태권도를 등에 업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련생을 두고 있는 투기 종목인 태권도였고, 종주국인 대한민국의 영향이 크게 미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명분이 좋기도 했으며 그동안에도 이미 꽤 괜찮았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재고하기도 좋은 일이었다. 보호관찰 처분을 받을 만큼 인생 힘든 친구들을 구원하겠다는데, 무슨 싫다는 핑계를 댈 것인가?

거기에 더해 받을 것이 있다면야 금상첨화.

“하하하. 연화존자께서 이렇게 나서 주신다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어려울 거 있습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송철우가 직접 와서 한 부탁을 받고, 인도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은 연화존자는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을 수행하기 위했던 바.

태권도협회는 태권도에 걸맞는 내공심법을 만들어 전수하겠다는 연화존자의 약속에 완전히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두 개의 내공심법을 새로 만들어야 할 처지였지만, 연화존자는 어렵게 느끼지 않았다. 본래라도 그랬겠다만 최근에 얻은 마교의 비의 덕분인지 작업이 빨랐고, 신속했다.

태권도 협회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투기 종목으로서의 단점이 명확한 태권도라는 종목에 이는 굉장한 메리트였다고 하겠다. 연화존자가 주는 내공심법으로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고, 나라의 모습이 바뀌고 있음을 목격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부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 내공심법을 익힌 상태로는 올림픽 등에 나갈 수 없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냐는 일부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협회의 고위간부들의 생각은 달랐고, 반대의 목소리보다 더 강했다.

‘올림픽 선수들을 따로 키우는 한이 있어도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내공심법의 힘이 대한민국을 지탱한다는 말이 더는 농담 같지 않은 시대였다. 그리고 그 힘을 유지하고, 관리 감독 하는 건 명실상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과 연화존자.

분야를 분리하는 혼란을 겪는 한이 있어도 이 기회를 잡는 게 옳다고 협회의 고위층들은 여겼고, 국가무공원도 이에 화답.

태권도를 정식으로 수련했을 경우 국가무공원 채용에 가점을 주기로 결정한다. 이들을 일종의 문파로 여기기로 한 것.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무공원은 외국에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상을 남기기로 했다. 단순히 증산방의 곤란을 타파하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구축하고, 구성하며 만들어 가는 대전략을 펼치기로 이들은 결정했다.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에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포부도 자못 웅대했지만,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국가무공원에서는 만들어 보고 싶어 한다.

가야 할 곳이 제법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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