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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54화 (154/175)

154화

북한 최상층부, 그러니까 일명 공화국 최고 존엄의 심기는 근래 불편하기 짝이 없다.

‘누구하고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심정일 터.

여기에서 말하는 누군가란 그리고 대부분 다른 국가를 말하는 것일 터.

이에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리라. 누가 누구보고 대화 타령을 하는가?

하지만 이는 북한이라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사실.

대저 사실이라 함은 상대적인 일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는 것이 현재 상황으로, 언제라고 아니 그랬겠냐마는 세상살이 녹록치 않은 건 요즘 들어 더욱 실감하는 바였다.

일찍이 후계자로 언급조차 되지 않던 시절, 떠밀리듯 보내졌던 해외 유학 시절 민주주의의 맛을 보았던 현 북한의 최고 존엄이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정상 국가로의 열망만은 숨기지 않기도 했다.

애초에 왜 대한민국을 비롯한 타 국가를 경유하는 것이 아닌,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한 종전을 원했던가? 그러지 않고서는 앞서 말한 최고 존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어딘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 때문이 아니었는지.

미국과의 종전, 적대 상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대북 제재를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말인즉슨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가령 중국 같은 나라 말이다.

마오쩌둥의 큰아들이 6.25에서 전사하여 북한 땅에 묻히기도 한 인연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은 지나가서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

중국도 그때의 중국이 아니고, 북한도 그때의 북한이 아니다. 흘러간 세월은 물과 같아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건 없고 입장은 뒤바뀌기 마련인바.

결과적으로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를 무시하다시피 하는 중국과의 교역이 아니었다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파탄되어 진작에 고사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그랬던 중국은 지금 난리가 났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상황은 급변하여 중국은, 중국을 지배하던 공산당이라는 집단은 북한은 물론이요, 주변 어디로 시선을 돌릴 수 없을 만큼 혼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 사태로 촉발된 중국 사회의 모순은 완전히 폭발하여 안팎으로 산재한 적들과 문제들이 이들을 괴롭히다 못해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으로, 모든 것을 뒤흔들고 있었으니까.

중국 공산당을 지탱하던 그 모든 힘은 그 모든 논리와 함께 침몰했고 남은 건 폐허 속에서 겨우 붙잡고 매달린 가냘픈 희망 비슷한 무언가뿐.

북한의 고위층들은 그런 중국의 모습을 보며 불가해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해낸 이가 바로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조선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그러니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 결국엔 이루어 낸 자가 소리 소문 없이 자신 앞에 앉아 태연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음에.

“…이거이 다 무슨 상황이지?”

물론 이해한다. 북한이 품고 있던 마교 전력의 삼분지 이 이상을 날려 버린 저 막강한 무림인,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믿기 힘든 교활함과 흉계를 가슴에 지닌, 저자가 원한다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걸 북한의 최고 존엄은 잘 알고 있다.

그리 낯선 사실도 아니다. 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토록 개인 경호에 사활을 걸었던가?

독재자에게 있어 이런 종류의 위험은 실현 가능성은 낮을지언정 완벽히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분노하고 있는 건 정확하게 그와 함께 온 한 사람 때문일 터.

“왜 이자와 함께 왔지? 어떻게 내 앞에 이 작자가 있을 수 있어?”

무극검마가 연화존자와 함께 왔다. 태연한 표정이었다.

“만약 연화존자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제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북한의 최고 존엄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 태연하지만 듣기 힘든 헛소리에 벌컥 화를 내려 했지만, 평소 발휘할 일 없는 인내심을 겨우 발휘해 낼 수 있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경호원들이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는 말인즉, 전부 제압되거나 그 이상의 최악을 맞이했다는 이야기.

그것이 공화국의 적을 무려 자신 앞에 데려온 채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는 늙은이, 소비에트가 무너지며 마찬가지로 망할 뻔했던 걸 구원한, 심지어 최근 있었던 마교 내부의 항쟁마저 눈 감아 준 자신에게 단도를 꽂는 이적 행위를 하는 무극검마를 공화국의 최고 존엄은 노려보았다.

배신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처리했다.”

“늙어서 고생이 많네.”

허공에서 귀신처럼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난 노인을 그는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살령지문과 거래를 지속하며 그 이득의 대부분을 제 주머니로 넣었고, 귀령살이 나타났다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붙잡혔다는 소리에 두려움과 아까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였는데.

북한의 마약 거래는 전방위적인 대북 제재로 제대로 된 무역을 할 수 없는 북한의, 북한 고위층의 짭짤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귀령살의 행방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연화존자를 암살하려던 마교도가 무사히 살아남았고, 심지어 북한에까지 들어와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 간나새끼들이……!”

그러한 사실들과 결부된 주변의 침묵.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경호원들의 이탈은 귀령살이 무얼 하고 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귀신같은 솜씨로 소비에트에 저항하던 수많은 반대 인사를 침묵시킨 귀령살이 아니라면 어릴 때부터 재능 있는 자만을 뽑아 마교의 무공을 가르친, 하지만 마교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오직 백두혈통에 대한 충성심만을 배양시킨 이들이 이토록 조용할 리 없었다.

“워워, 너무 화내지 말라고.”

그러한 분노에도 연화존자는 아무렇지 않다.

“당신한테도 그리 나쁜 말은 아닐 테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어쩌면 이런 걸 노렸을 수도 있다. 감정이 격화될수록 듣고 싶은 말로 인한 충격은 배가 될 테니.

“미국과의 종전, 바라던 거 아니었나?”

침묵은 그렇게 한순간에 찾아오지만 이 역시도, 아예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 아니긴 했다.

최근 몇 번 상상을 하긴 했다. 저자라면, 믿기 힘들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해낸 저자라면 미국과의 종전을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와 함께 따라오던 게 있어 차마 누구한테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않았을 뿐.

“네가 왜?”

쉽게 믿기는 힘들다.

“뭘 보고?”

말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함의, 믿기 힘들고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충분히 전해진다.

연화존자가 북한과의 평화 모드를 원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힘들었으니, 이건 왜냐고 물을 일도 아니다.

그는 북한의 외화벌이를 망친 자였다.

대북 제재로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오기 힘든 돈줄이 마른 나라였고, 갖은 자연재해와 낙후된 사회 기반 시설로 고난의 행군을 겪은 나라였다. 그런 북한에게 있어 마약을 팔고, 해킹을 통해 돈을 버는 건 불법적일지언정 매우 필요한 일이었던바.

그 모든 것을 연화존자는 박살 냈다. 악명 높은 이탈리아 마피아들을 동원했고, 자신의 휘하 비밀스러운 무림인 거의 전부를 동원해 그렇게 했다.

연화존자의 출현과 국가무공원의 신설은 이후에도 북한의 숨통을 조였다.

마교에 대한 압박은 전례 없이 강해졌다.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몰락은 그 결과.

두 마교 지파의 건방이야 어느 정도 손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이득이 됐냐면, 공화국의 수장인 자신을 비롯해 북한에 좋았냐고 하면 잘 모를 일이었다.

무극검문에 힘이 너무 실려 버렸고, 오늘의 일이 일어났다. 심지어 자기 몰래 국가무공원과의 끈을 이어 놓았고, 살령지문의 귀령살마저 숨겨 놓고 있었다.

회의감은 당연하다.

“뭘 위해?”

그렇지만 묻는다.

물을 수밖에 없다. 연화존자가 원한다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 체제 보장과 종전 선언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가 왠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그에게는 있다.

연화존자는 불가능한 일을 이룬 자이기 때문이다.

“그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니까?”

저 장난스러운 말투, 저 신뢰하기 힘든 태도에도 말이다.

어느 누가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중국을 조각내고, 미국을 사로잡은 남자였다. 돈과 무력, 거기에 믿기 힘든 정치적 술수까지 모두 동원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어찌 아니 기대할 수 있나? 어떻게 움직이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모든 것을 결과로서 증명한 남자가 통일을 원한다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반으로 조각나서 살 거야? 응? 시간이 지나면 통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조차 없어질 텐데?”

집중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어차피 올 사람은 없고, 남은 건 독대나 마찬가지인 오늘 밤.

아무래도 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젊은 독재자는 귀를 기울인다.

“나야 겉모습이야 젊을지 몰라도 속은 늙은 인간이라 그렇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의 원동력은 사라질 거라고. 무슨 소린지 알아?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이 북한에 개입할 명분도, 이유도 사라질 거고 문제는 당사자들의 손을 떠날 거란 거지. 예를 들면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 같은 쪽으로 말이야.”

그리고 연화존자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낸다.

주변 상황과 이어질 미래의 불운함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니 지나간 일은 우선 이야기하지 말자고. 피차간에 풀 문제가 많기는 한데 중요한 건 통일이라는 것에 대한 필요성 아니겠어?”

동의하지 못할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거지?”

젊은 독재자는 그의 가장 큰 고민을 털어놓는다. 어찌 보면 이 또한 솔직한 태도일 터.

북한이 목숨처럼 여기는 체제의 안정, 아랍의 봄이 불러온 수많은 독재자의 죽음과 몰락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당연함에 대해 연화존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솔직히 다 가질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걸 그쪽도 알 나이가 되지 않았나?”

자못 편치만은 않게.

“삶에는 업보라는 게 있는 법이고, 민주주의 시대에 왕보다 더한 권력으로 누리고 살았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 이제는 알 때가 된 거 같은데?”

“그럼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실망.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듯한 연화존자를 보며 그 또한 마음을 단념한다.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음만 복잡하다. 이 강호의 무뢰배들 사이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비상 연락망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나?

“이봐, 들어 봐, 성급하게 굴지 말고.”

하지만 연화존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누구 하나 죽어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알아?”

그의 용무 역시도.

“너 하나 죽어서 끝날 문제였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찾아오지도 않았어. 아니, 이렇게 시간 끌지도 않았지. 네 할아버지든, 네 아버지든 상관없이 죽여도 진작 죽이고 끝을 봤을 거다.”

“뭐라고? 어딜 감히 그따위 망발을…….”

“천마도 내 손에 죽었는데 이 작은 나라의 독재자가 뭐라고.”

뜻밖의 말에 젊은 독재자는 입을 다문다.

“그러니, 이야기를 하자고.”

그들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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