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UN 주재 북한 대사는 담담한 척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흐르는 땀방울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로 본국에서 전해 온 공화국 최고 존엄의 친필 서한을 낭독했다.
특유의 수사와 여러 표현을 걷어 내고 줄기만을 간략히 적자면 다음과 같다.
-핵의 완전 폐기, 미국과 유럽, 한국의 시찰단 전격 수용, 이 모든 것에 앞서는 완전한 평화로의 단계 구축.
익숙한 말들이었다.
언제나 북한은 핵을 폐기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도 그랬고, 유럽의 강대국들에게도 그리 말했으며, UN 총회는 물론이요,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말을 정말이지 자주 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약속은 폐기되었다. 이것이 북한의 악함과 비열함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다.
결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관리 부족이 아니겠냐는 시각은 분명 존재한다.
핵을 무기화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용하게 하기 위한 미국의 경수로 지원은 정말이지 자주 중단되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의심, 사실은 핵의 무기화를 포기한 게 아니라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내기 위해 말로만 그러면서 속인,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화전양면전술이 아니냐는 물음에 명확히 대답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신뢰는, 그러니 남아 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과거를 어떻게 극복하냐는 게 중요한 문제이자 해결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북한의 핵 포기 의사가 담긴 발표는 그렇기에 조금 식상하다.
사찰단의 전격 수용 역시, 남한을 끼워 준 건 조금 놀랍지만, 지루한 건 마찬가지.
뚜껑은 열어 보기 전엔 모르고, 결과는 나와 봐야 안다.
막상 국제사회에 이런 식의 제안, 이전의 증오와 분쟁을 멈추자고 외친 뒤 시간이 지나면 제멋대로 이를 이용해 내부 단속을 위한 선전만 하고 정작 약속의 이행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미 수많은 선례가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번 UN 주재 북한 대사의 낭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후자라고 하겠다.
“우리는, 북한의 마교도 중 국제법으로 금지된 행위를 자행한 인사 여럿을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기고 궁극적으로 마교와의 단절을 먼저 수행하겠다. 그로써 국제사회와 동북아에서의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의지를 각인시키겠음을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무극검문의 반격으로 몰락한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의 일부는 아직 살아남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면에서는 그렇다.
북한의 젊은 독재자는 그들을 국제사회에 넘기겠다고 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국제사회에는 마교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싶다는 의지가 오랫동안 있어 왔다. 당장 북한의 최대 적, 미국이 그랬고 유럽의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
미국의 경우에는 거력패부의 목을 원했다. 역사가 오래된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야 많지만 가장 큰 건 역시 푸에블로호피랍사건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원한이었다. 북한이라는 작은 독재국가가 미국의 얼굴에 먹칠을 한 두 사건의 뒤에는 언제나 마교지파 거력패부가 있었기에 미국은 항상 북한과의 협상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
거력패부를 넘기라고. 최소한 그들의 사과라도 받아야겠다고.
하지만 북한은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미국과의 가장 유화적인 분위기가 흐르던 시절에조차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재고의 가치가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오늘, UN 주재 북한 대사는 숙청되고 남은 거력패부의 잔당들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우겠다고 말한다.
유럽의 여러 국가는 환희락락궁에 원한이 있다.
환희락락궁이 직접 해를 끼친 건 아니고, 그들에게 교육받은 간첩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미인계의 전략은 긴 세월 동안 존재했지만 소련 붕괴 전에는 소비에트의, 소련 붕괴 후에는 중국의 여간첩들이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것.
이에 유럽 연합은 북한에 외부 간첩들의 교육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해 왔지만, 이 또한 무시된 건 마찬가지.
실제로 몇 건의 테러와 각국의 고위 공직자들의 연쇄 자살 등이 북한 출신 환희락락궁 마교도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기도 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한 답변 자체를 거부해 왔다.
그렇지만 오늘, 북한은 환희락락궁 교도들을 거력패부의 생존자와 마찬가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우는 동시에 지난 일들에 대한 의혹을 모두 밝히겠노라 선포했다.
전례 없는 전향적인 태도에 세계 각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음부터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라는 것이 가진 가치가 그 정도였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전처럼 틀어질지 어떻게 아냐는 회의감이 있었던 것.
분위기의 반전은 뜻밖의 나라, 뜻밖의 장소에서 나온다.
“우리는 북한의 저러한 태도를 넓은 포용의 자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UN 주재 인도 대사의 발언은 각국 대사들이 알고 있는 정치적 역학과 완전히 무관한 곳에서 튀어나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애를 발휘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곳에 모인 거 아닙니까? 이웃의 개심에 격려의 박수와 깊은 관용을 보임으로써 UN의 존재 의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북한과의 사이가 험악하면 험악하지 좋을 리 없는 인도가 이런 식으로 북한 옹호를 하는지 대다수의 인물은 알 수 없었다.
북한과 파키스탄 간의 밀월의 역사가 얼마였던가? 서로 사이좋게 핵탄두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기술을 나눈 사이인 파키스탄을 인도는 얼마나 증오했던가?
그런 사정을 알고 보면 인도가 북한의 저 선언과 약속을 믿겠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지만, 이내 다들 알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 또한 북한의 약속을 믿어 보고자 하오.”
중동의 여러 국가 또한 드물게 한목소리를 냈다.
“철저한 감시와 순조로운 진행이 될 거라는 담보가 있어야겠지만, 본국은 북한의 저 선언이 그냥 나오진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부의 미묘한 알력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아랍 세계의 공통된 주제가 아닌 일에 극히 드문 같은 시각이 나왔다는 건 특이했지만,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자들은 슬슬 알아챈다.
대한민국이 미리 사전 작업을 해 놓은 게 분명하다고.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이 아랍 세계 중동의 여러 왕가의 체면을 세워 준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각자의 이득을 위해, 또는 얻을 게 없다는 이유로 위구르 형제들을 외면하던 이들 왕가의 죄를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해방을 통해 상쇄시켜 준 국가무공원과 중동의 왕족들이 돈독해졌다는 건 숨길 것도 없는 미담이었던 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납득 가기 시작한다.
북한이 돌연 저런 뜬금없는 제안을 던진 건 대한민국과의 사전 조율이 있던 일이리라.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국가무공원 쪽에선 중동의 왕가들과 접촉했을 터.
“본국 또한 북한의 선언이 가지는 의의를 지지합니다.”
도움의 요청이 한쪽에 치우친 것도 아니었다.
“소비에트가 무너졌음에도 마교와의 단절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역사 앞에 죽은 천마와 마교를 남겨 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미의 국가 여럿도 북한의 선언에 대한 지지를 말한다.
최근 내부의 카르텔들을 거의 소탕하고, 사회구조를 건전하게 바꾸는 데 성공하며 예전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제 공동체의 말이었다.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물론, 당사자의 반응 역시도.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반응 또한 전에 없이 북한에 호의적이었다.
“북한의 약속이 이행된다면 그동안 있어 온 대북 제재를 재고하고자 합니다. 만약 UN에서 이 제안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미국과 북한이 대한민국과 함께 이를 논의할 의향도 있습니다.”
그렇게 협상은 급물살을 탄다.
본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의 제안에 이토록 많은 국가가 동의를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벽도 넘지 못했겠지만, 설령 그게 됐더라도 이토록 순조롭기는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북아의 작은 나라로 치부하기엔 미묘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미군과 절대로 국경을 맞대고 싶어 하지 않을 중국에서 반대했을 것이고, 평화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위협성이 부각되어 마땅할 일본도 그랬을 터였다. 북한이 사라지면 곤란한 일이 생기는 자들이 분명 있었던 것.
하나 오늘날엔 없다.
중국은 이 상황 속에 쓸 여력이 없었다. 너무도 큰 나라,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진 나라는 혼란 속에 제 의견을 함부로 낼 수 없었고, 설령 그러려고 했더라도 이를 통제하는 대한민국의 특사가 베이징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반대표를 던질 수 없게 막는 정도는 가능했으니, 이 또한 대한민국의 증가된 역량.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긴 역사와 함께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채 존속 중이던 일본 공산당이 뒤바뀐 정계 지형 속에서 힘을 가지게 되었다. 평화 헌법의 수정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리하여 북한의 독재자가 보낸 서한은 각국의 미심쩍은 지지를 받고 통과되었지만 그로부터 약 이 주 후, 네덜란드 헤이그로 보내진 마교도들의 모습에 세간의 시선이 약간이지만 바뀐다.
-북한은 정말로 마교를 포기하는가?
도발적이기까지 한 제목의 기사들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대체로 충격적이라는 반응이었다. 정말로 북한에서 이렇게 쉽게 그리고 빠르게 나설 줄은 지지를 보낸 나라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동시에 의심의 시선도 있었다.
초췌한 모습의 저 남녀가 정말로 두려운 그 이름,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 찌라시 언론의 음모론을 타고 넘실댔다.
영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만큼 폐쇄적인 국가였고, 그만큼 폐쇄적인 집단이었으니까.
단 한 사람, 오랜 수감 생활과 부숴진 단전의 후유증으로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는 자들 사이에서 늙은 나이에도 유독 생기를 띈 한 사람이 나서면서 그러한 의심도 불식되었지만.
“신분을 밝히시오.”
국제사법재판소장의 질문에 단단한 수갑을 찬 노인이 덤덤하게 말한다.
“천마신교 마교지파, 살령지문의 귀령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증명은 그 한마디로 족했다.
국제사회는 이에 뒤집어졌다.
추측과 억측 사이를 오갔다. 대한민국에 나타났다가 사로잡혔던 것으로 알려진 그러나 종적을 찾지 못했던 귀령살이 왜 북한의 마교도들 사이에 껴서 국제사법재판소로 온 건지에 대한 상상의 나래는 그만큼 다양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경로가 아니라 이유가 그렇다.
대한민국이 귀령살을 북한에 넘긴 건가? 아니면 북한으로 탈출했던 것을 넘긴 것인가?
납득이 어렵다.
귀령살의 협조적인 태도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했다. 현대사에서 가장 두려운 암살자였던 노인은 왜 저토록 태연하며,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가?
제 의지로 이곳으로 온 마교도는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웃었다, 확신과 기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