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그건 너무 뜻밖의 소린데.”
북한의 젊은 독재자와 독대하고도 아직 서울로 돌아가지 않은 연화존자는 그에게 보기 드문 당혹을 담아 무극검마에게 되묻는다.
짙은 어둠이 우세한 밤이었다.
평양의 밤은 과연 어두웠다. 유명한 위성사진처럼 서울의 불야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은 암흑 속에서 무극검마와 연화존자는 독대 중이다.
자신감일 수도 있었다. 지상 최후의 마교도가 머무는 도시에 홀로 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연화존자 김철민의 경지란, 거친 태풍 속에서도 일엽편주에 몸을 맡긴 채 태평하던 옛 선인의 경지에 비할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것.
무극검마는 예전과 다른 태도로 연화존자를 대한다.
이전에도 물론 존중은 있었다. 허나 그건 애증이 담긴 태도, 천마를 죽이고 마교를 해체시켜 버린 원수이자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북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은혜를 베푼 자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담은 이율배반적인 태도였다면.
지금의 태도는 크나큰 존경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복종으로 연화존자를 대하고 있었다.
“그저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저 차분한 존경의 목소리가 연화존자는 낯설다.
익숙해지기 어렵다. 평생에 걸쳐 증오해 왔던 마교도, 그의 영혼과 뿌리에 새겨져 있는 마교에 대한 경멸은 이러한 상황이 낯설어 역시나 드물게도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희는 당신을 따를 겁니다.”
이러한 태세 전환이 비단 무극검마만의 노망인 건 아니다.
연화존자가 서울에서 북한으로 넘어온 이후 마주친 모든 마교도의 태도가 이렇다. 자신들도 왜 그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연화존자를 존중으로 대했다.
기이하다는 생각은 할지언정 불합리하다는 감상은 없이 공손하니, 연화존자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얼마 전부터 그와 마주쳤던 마교의 안배. 그것과 이 상황이 관련이 있는 게 아니겠냐고.
몰래 접선하기로 했던 무극검문의 제자들이 이전의 증오를 버리고, 자신을 사로잡아 금제를 걸어 북한에 처박은 연화존자에 대한 분노를 버린 귀령살.
아울러 몰락의 시초가 된 연화존자를 감옥에서 마주했음에도 허탈함과 함께 해탈함을 얻은 환희락락궁과 거력패부의 마교도들까지.
“우리는 당신에게서 운명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오.”
이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고 했다.
이 감탄, 이 경탄, 이 찬탄은 그들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마공, 마교의 내공이 감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결국 모든 것이 본교의 법칙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던 거요. 미처 몰랐지만, 이제 와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확신할 수밖에 없소.”
그런 운명이 아니면 이런 편안함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라며 모든 것에 협조했다.
“결국 그랬던 것을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알지 못했던 거요, 우리 모두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낯빛이지만 무극검마는 후회하는 것 같지 않다.
적어도 연화존자가 보는 앞에서 표출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저 늙은 마교도의 가슴에 무엇이 남았는지 모르나, 김철민이 보기엔 그의 가슴에 남은 것이 자신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란 걸 안다.
아아, 그래. 어쩌면 이리도 닮았는지.
“그대가 우리의 미래가 될 줄은 몰랐으나, 어쩌겠소? 그것이 강자지존의 법칙인 것을.”
무극검문의 연화존자를 극진히 모셨다. 자신들의 수장, 그 이상을 대하듯 마공의 인도에 따른 굴복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 또한 그랬다. 단전이 부숴지고, 무공이 사라진 채 쓸모라곤 쌓인 업보뿐이라지만 그 또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흐느낌으로 애원했다.
가장 극적이었던 건 귀령살의 말이었다.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자신의 문파인 살령지문의 마지막 하나까지 미끼로 던져 놓고도 여지껏 모진 목숨을 유지해 온 마교의 암살자는 연화존자에게 간청했다.
자신을 쓸모 있게 죽여 달라고.
“거대한 순환이 전환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소. 바로 그대라는 축, 본교의 모든 것을 바꿔 버리고 이제 그 유산마저 수습한 당신에게서 말이오.”
무극검마와 귀령살을 비롯한 마교의 고위급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멸문해 버린 마교 지파 묵혈성의 신물, 그 유산을 수습한 연화존자가 일종의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겠냐고.
흩어진 검은 안개가 연화존자라는 뿌리를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고, 그게 바로 이러한 변화를 이끈 것이 아니겠냐고 제 나름의 추측을 선보였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대는 천마가 될 것이오.”
이제서야 묵혈성의 침묵이 이해가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필시 전대 천마, 연화존자의 손에 죽은 홍혈천마가 묵혈성의 시험을 이겨 내지 못했으리라고 무극검마와 귀령살은 짐작한다.
그럼으로써 설명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비록 수백 년 전 정마대전의 패배로 바이칼 호수 근처에 은거하며 명맥만 겨우 이어 오던 마교를 부활시킨 공이 있기에 완전히 거부하거나 모른 체하지 못했을 뿐.
묵혈성의 입장에선 무공이 강하고, 능력은 뛰어날지언정 시험을 통과하여 자격을 갖추지 못한 홍혈천마였기에 마지못해 협조했던 것이 아닌가, 라고 무극검마는 말했다.
언제나 동떨어진 곳에서 침묵으로 바라보던, 다시금 부활한 교의 정말 심각한 위기가 아니고선 모습조차 잘 드러내지 않던 그들에게 이런 사정이 있던 것은 아닐지.
그 모든 것을 헤쳐 온 연화존자에게는 기가 막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소리였다.
“내가 왜 천마가 된다는 거지?”
정파인으로서의 자부심 가득한 그에게는 받기 힘든 자리였다. 그가 누구인가? 천마를 죽인, 천마격살자가 아닌가?
“아니지, 내가 말을 잘못했군.”
그런 연화존자를 보며 무극검마는 웃었다.
마교도답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웃음이었지만, 보고 있는 연화존자에게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그대는 이미 천마요.”
연화존자 김철민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 * *
연화존자가 마교도들에게 천마라고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그들만의 비밀이었지만, 적어도 북한의 마교도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건 이제 세상이 다 안다.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은 오랜 수감 생활과 전폐된 무공의 후유증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재판을 피하지 않았다.
숨기려는 시도조차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변명하지 않았고, 그간 유럽 및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의심하던 바에 대한 성실한 증언을 이어 나갔다.
그들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고 동시에 곤란한 일이기도 했다.
마교도들이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으니, 예컨대 이런 내용들.
‘B 나라의 총리를 암살할 당시 A 나라의 정부에서 이 몸을 숨겨 주며 편의를 봐주었다. 그건 당시 양국 간의 알력다툼이 있던 사안에 대해 B 나라의 혼란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한 A 나라의 의도적인 모른 체였다.’
‘그 테러는 C 나라의 사주를 받았다. 당시 정권을 잡았던 정당에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요청, 우리와 선을 댔다.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본교를 테러의 주체로 지목했기에 따로 조사를 했던 결과는 이웃나라의 자작극이었고, 이를 당시 정부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통제 불능 상태로 퍼질 것을 우려해 본교에게 뒤집어씌운 일이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루어진 마교도 재판은 용의자들의 솔직함으로 말미암아 큰 소란을 불렀고, 급기야 비공개로 돌려지게 된다.
그런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얽히고 설킨 진실의 추악함은 세계 각국을 강타했다. 정계의 혼란, 사회의 혼란이 일어났고 각종 단체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으며 일부 과격종자들은 테러에 가까운 소란을 벌이기도 했다.
저 미국에서조차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도 북한의 추종자들, 마교의 조력자들이 암약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마교도들의 증언으로 폭탄처럼 터져 나온 상황이었던 것.
누구도 원치 않는 솔직함의 대가였으니, 고작 재판을 비공개로 돌리는 정도로 수습할 수 있을 리 없다.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오만,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그리하여 미국의 상원의원 몇몇이 중국으로 파견된다.
중국과 이를 논의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들이 만나고자 한 건 자국 사정도 여의치 않은 중국 공산당의 고위간부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뭘 원하십니까?”
그들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대한민국의 특사이자, 동방마녀라는 웃지 못할 별호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중인 윤아영을 만나러 왔다.
자못 굴욕적일 수도 있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북한의 마교도들을 통제해 주길 부탁하고 싶소.”
심지어 솔직하기까지 했으니 그것은 최근 급부상 중인, 전통적인 우방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내에서 큰 존재감 없이 홀대받기 일쑤였던 아시안계,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중인 대한민국의 위상이 컸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대한민국에 절절 맨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여전히 미국은 초강대국이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국가 대 국가의 일. 눈앞의 상원의원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번 일 자체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의 주도 아래 일어난 일 아니오? 그리고 당신이 그런 국가무공원과 긴밀한 사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창립 멤버이자, 국가무공원을 떠난 지금까지도 존중받는다는 걸 아오. 부디 부탁드리겠소.”
아시안계의 결집은 직업 정치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단순한 한국계의 결집 정도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흑인 커뮤니티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선거를 비롯한 각종 정치 행위에 키를 쥐고 있는 조타수 비슷한 존재가 되었으니.
“정확히 원하는 바를 말해 주세요. 저는 바쁘고, 여러분도 바쁘고. 이런 데서 시간 낭비 할 틈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로 윽박지르거나, 세게 나가는 등의 선택지는 배제된 상황.
괜히 밉보였다가 정치 커리어에 흠집이 나는 걸 이 자리 누구도 원하지 않기에 제안의 솔직함은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북한을 동북아 평화 구상에 끼워 주셨으면 하오.”
“그로써 그들에게 국제사법재판소의 마교도들을 통제해 달라는 제안을 전하고 싶소.”
이에 윤아영은 생각했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일어난 미국의 제안에 대해.
“팔려 가다시피 한 자들이 솔직한 걸 북한의 독재자라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그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말해 줄 수는 있겠지.”
직업으로서의 정치인을 살아가는 권력자들은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금 중국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마당에 북한의 지분이 생겨서 나쁠 게 뭐요?”
“그 이득에는 당신의 이득도 포함이 됩니다, 윤아영 씨.”
이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당신이 뭘 원하든, 우리는 당신을 돕고 싶소.”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