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다음은 수용소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름 평이하고 고만고만하게 진행 중이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날 선 긴장감으로 가득 찬 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회담장의 모두는 순간 생각했다.
남북 간의 가장 전향적인 회담이자 가장 큰 역사의 진일보로 남을 것이라 예견된 회담이 오늘의 자리였음에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미리 예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인권은, 언제나 북한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뭐, 어느 독재자에게 아니 그랬겠냐마는.
“최근 북한에서 보여 준 여러 움직임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 정부는 파악하고 있지만, 그것과 북한 내 수용소는 조금 다른 문제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굳은 얼굴과 함께 결의 어린 목소리로 남쪽 대표 중 하나는 말을 이어 간다.
주변의 압박에도 묵묵히 할 말을 해내고야 마는 굳은 심지가 과연 이번 회담을 위해 고르고 고른 인물임을 알게 하는바.
그런 그조차 이마를 타고 내리는 굵은 땀방울은 어쩌지 못한 채 요구 사항을 꺼내게 된다.
“우리 쪽에선 수용소의 완전한 철폐를 요구합니다.”
이는 남쪽 정부 입장에서는 굉장한 빅 스텝이었다. 북한의 독재정권을 수호하는, 적어도 외부세계에서 공포와 억압으로 떠받치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독재를 상징하는 하나의 축을 없애 달라는 건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치적 상황이라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이 이를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기준도, 처우도 모두 국제사회에서 용납될 리 없는 수용소 문제를 대한민국 정부 측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드문 일이다.
그간 학계나 시민사회 등에서 이러한 논의가 오고 간 적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회담장에서 강경한 자세로 수용소의 철폐를 주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
그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북한이라는 사회구조의 근간, 혹은 독재정권 유지에 실패할 경우 일어날 참사를 걱정하는 북한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이었기에 회담장까지 들고 올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북한과 남한이 협상이란 걸 할 때면 언제나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되는 건 남한 정부 쪽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야 속마음이야 어쨌든지 간에 정말로 인민들이 다 죽어도 강성대국을 이루겠다며 버티기라도 하지, 남한의 직업적 정치인들은 기껏 얻은 남북회담 자리에서 그런 식의 만용을 감히 부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오직 그것만이 북한이 국제사회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방법이 될 거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우선 대한민국 정부의 자신감이 전과 다르다 할 수 있으니, 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사상 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은 것이 변화의 첫 번째 요인.
동북아 평화 협상을 주도하는 국제 리더라는 후광이란 그토록 대단했다.
상하이 사태를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즈음 터져 나온 이 과감하고도 담대한 발상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저게 무슨 소리냐고, 그게 가능하겠냐며 냉소적이었지만 그 일이 실제로 실현됐을 때.
특사로 파견된 윤아영이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꿀리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협상을 주도하는 걸 보았을 때 반대급부라는 단어가 왜 존재하는지 여론조사 결과로 보여 주었다.
그건 국민적 자존심의 상승이나 다름없었다, 중국뿐 아니라 이 구상에 참여한 모든 국가가 대한민국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하니 현 대통령은 충분히 자신감에 차 있을 만했다.
대담해질 자격은 충분했다 하겠다. 국내의 지지는 물론이요, 국제사회에서도 그 존재감이 뚜렷하여 어딜 가도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이 수두룩하니, 북한과의 협상이라고 어디 다를 것인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부담은 기꺼이 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결국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그 때문 아닙니까?”
대외적인 상황도 북한의 수용소 문제를 건드리는 건 마찬가지.
특히 미국은 이런 문제에 대해 결벽적으로 집착해 오곤 했다. 그것이 대다수의 독재정권을 찌를 수 있는 비수여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인류 보편 가치와 자유에 대한 수호를 자처하기 때문인지는 심히 따져 볼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에 대해선 정말이지 타협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자들처럼 구는 게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애초에 그간 미국이 무너뜨리거나 최소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던 독재자들에게 언제나 인권이라는 계산서를 들이밀어 오지 않았나?
가장 최근까지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잘 써먹던 논제였고 기실 바로 그 점이 북한의 위치와 규모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수용소 문제를 본격적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는 중대한 이유였던 바.
중국의 경우 자국 내에 있던 교도소 및 수용소를 국제사회에 맡기게 되었다.
이는 그간 탄압받았던 위구르족들로 인함으로, 얼마 전까지 동북아 평화회의에서의 가장 중요한 논제 중 하나였다.
중국 공산당은 수용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각 세력의 요구를 처음엔 내정간섭이라며 거부했지만, 긴 격론과 설득 끝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버티는 것도 힘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걸 그들은 깨달았다.
“수용소, 수용소라…….”
북한은 외부에 자신들에게 어떤 수용소가 있고,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지, 수감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말이다. 어떤 이유로 잡혀가서 사라지는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연좌제로 대대손손 비참한 운명을 물려주는지, 북한의 인민들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오죽하면 장애인들만을 수용하는 이른바 난쟁이 수용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심조차 있을까?
두려울 수밖에 없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만약 이 장소에 대한 소문이 반 정도만 맞아도 북한 정권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테니.
“그건 이 자리에서 논의하기에 적절치 않소.”
하여 북측 협상단의 대표는 이를 넘기려고 했다.
정확히는, 거부였다.
“북남 간의 보다 건설적인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소?”
이런 일을 그 자신이 결정내릴 수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문제에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위대한 령도자이자 최고 권력자인 총서기 동무뿐.
어찌 자신 따위가 감히 이런 중차대한 일에 손을 댈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전권을 위임받아 비무장지대로 왔다고 하지만 잘 새겨 둬야 한다.
그 전권이란 것도 결국 최고 존엄의 의지 아래 있다는 것을.
많은 것을 건 모험을 그리하여 북한 쪽 대표는 하지 않으려던 그 찰나.
돌연 사방을 짓누르는 무거운 기운이 모두를 때린다.
“크흠…….”
“허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기침이 터져 나오니, 그것은 정말로 무형의 기운이 자리한 전부를 찍어 누르기 때문이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처음엔 그리 강하지 않았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뒤에서 매달리면 이 정도 느낌일까? 시작은 가볍다.
하지만 무게의 강도는 점점 강해진다. 순식간에 나이를 먹은 등 뒤의 아이가 무겁도록, 또 무섭도록 강하게 누른다.
만약 모두가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높으신 분들이 민감한 문제로 회의가 길어질 것을 고려해 편안하면서도 튼튼한 의자를 갖다 놓지 않았다면 제법 볼썽사나운 모습이 펼쳐질 뻔했다.
“그, 그만…….”
항복 의사는 북한 쪽에서 먼저 나온다.
그건 아마도 최근 남한의 고위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진기도인을 통한 내공 보급의 영향이 아닐까 장내의 사람들은 짐작한다.
최근 조직을 확대, 세분화하여 개편한 국가무공원 진기도인단은 전공 무원에게 내공심법을 보급한다는 야심차고도 무모하기까지 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오늘 이 광경을 보면 아마도 보람이 있다며 국가무공원에선 반가워할 게 분명했다.
광범위한 내공심법 보급으로 인해 보안 등 수반하는 다른 여러 가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북한 쪽에 얕보이지 않았다면 보람을 느낄 테지.
“총비서 동무가 대표 동무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소?”
아무리 협력적인 태도라지만 마교 따위에 대한민국 공무원이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면서.
“이 자리에서 모두 매듭지으라.”
경호를 위해 따라온 마교 지파 무극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 남자이자 무극검마의 제자인 춘풍검과 현현검이 되레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자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낯선 광경이었다. 마교도가 겁박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내부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보았다면 기이하다고 여겼을 테지.
저 점잖은 무극검문, 함부로 내공의 조예를 보이는 것조차 쉽사리 용납하지 않는 저 엄격한 마교에 속한 검의 수도자들이 함부로 감정을 드러냈으니.
‘그분의 뜻이 그럴진대, 어딜 감히.’
하지만 무극검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연화존자는 이제 더 이상 마교의 원수가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이 되었으니.
최근 마교의 신물들이 내린 시험을 통과하고, 그 유산을 수습한 연화존자는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의, 아니 단전의 조화였다.
그들이 익힌 모든 종류의 마교 무공이 연화존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굴복을 선택했던 것.
마음이 움직이는데 몸이 아니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연화존자를 원수처럼 여겨 마땅한 거력패부와 환희락락궁은 물론이요, 살령지문 최후의 문도이자 마지막 문주일 귀령살조차 연화존자를 제 부모보다 더 공경하며 철저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진행하시오.”
그러니 북한과 남한이 협상하는 자리에서 남한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왜? 연화존자가 그것을 원하니까.
최대한 오점 없는 통일. 민족의 화합과 건설적인 미래, 엄청난 변화가 있을 동북아 정세 속에서 보다 강한 울타리가 되어 줄 강하고 올곧은 나라를 연화존자는 원한다고 했다.
그러니 별수 있나? 무극검문 역시 이를 위해 움직일 수밖에.
그리하여 며칠간 잠도, 식사도 제대로 못 한 끝에 북한은 수용소에 수용된 인원 중 명백한 죄로 갇히지 않은 이들을 모두 석방하기로 결의했다.
수감 기간과 기타 제반 사정에 따라 보상을 지불하기로도 했는데, 이는 남측에서 어느 정도 충당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미국에서는 대북제재의 일부를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반도의 국민과 인민들은 환호했다.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북한의 권력자들은 불안해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뭔가 일어나고 있음이 확실해서.
남한의 위정자들은 기뻐했다. 이번 정권에 확실한 업적을 냈고, 차기 권력을 쥘 명분을 만들어서.
그리고 연화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네.”
남북한이 떨어져 있던 시절이 얼마 만인데 이렇게 쉽게 될 거라며 환상을 품 지 않았다.
그는 무림인이었고, 눈앞의 성과에 기뻐 멈추기에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은 남자였다.
“뒤를 맡길 수 있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믿지.”
화상 통화 화면이 꺼지고 한참을 내려다보며 그럼에도 존재하는 격동을 다스리던 연화존자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나직하게 말했다.
“가자.”
그런 그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인영이 여럿.
연화존자는 지금 바이칼 호수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