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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65화 (165/175)

165화

천마의 얼굴에 달린 모든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을 때, 이 정체불명의 검은 연기가 덮치기 바로 직전에도 만약 연화존자가 몸을 빼고자 했다면 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건 궁금해서였다.

대체 무엇이 자신을 여기로 끌고 왔는지, 몰아갔는지가 그는 궁금했다.

그리고 검은 안개가 연화존자를 끌고 간 것은 어쩐 일인지 익숙했다.

“두 번 하는 건 재미없는데.”

예전, 묵혈성의 검은 안개가 만인도 북궁평과 함께 왔던 것처럼 다시금 왔다.

다만 이번에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이미 준비된 지 오래되었으니까.

“처음과 두 번째는 무릇 다르지 않겠나?”

높이도, 깊이도, 넓이도 없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뒷짐을 진 노인이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홍혈천마.”

“구면이군. 연화존자라 불린다지?”

뒤돌아선 채로 뒤를 흘긋 보는 그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고 모를 리 없다.

애초에 그 잘린 머리를 집어 들었다가 여기로 불려 온 것이 아닌가?

어두운 의식 속, 마교의 검은 안개 속으로.

“죽어서야 통성명이라니. 서글픈 일이라고 해야 하나?”

“무림인이 되어서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할 수야 있나?”

연화존자의 비아냥에도 어둠 속 천마, 죽었던 홍혈천마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린다.

살아생전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단 하나, 이 차갑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도 느껴지는 훈훈한 호의를 빼고는.

“승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추잡스럽지.”

그건 굉장히 이상한 태도였다.

“너는 뭐지?”

연화존자의 질문은 그러니 당연하다.

만약 저것이 이해되진 않지만 홍혈천마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무언가라면 저와 같은 호의는 이해할 수 없다. 당장 이전에 한차례, 광기와 살의로 가득 차 덤벼들던 만인도 북궁평의 사례만 봐도 이 순순한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설령 연화존자의 정신 또는 무의식에서 발현한 일종의 잠재의식 속 환영이라고 해도 기이했다.

아무리 그에게서 발원했을지라도 상상 속 천마가 자신에게 우호적일 거라고 연화존자 김철민이 상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런 게 중요한가?”

홍혈천마는 이러한 의문에 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금 자네와 나라는 점과 점이 만나 새로운 선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천천히 몸을 돌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생전 모습 그대로의 천마는 여전히 웃음 짓는 얼굴이었지만 일순간 바뀌는 공기 속에서 연화존자는 느낀다.

시간을 끌 일은 아무래도 없을 거라는걸.

“그러니 웃으며 투쟁해도 괜찮을 테지.”

역시 천마와 자신에겐 이런 것이 어울린다는 상념이 연화존자의 뇌리를 스쳐 갔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불꽃 같은 강기를 내뿜으며 서로를 스쳐 가고 있었다.

-콰과가광!

그건 의식과 의지의 공간과 시간마저 출렁이게 할 가공할 위력의 인사였다.

연화신공과 천마신공의 교차는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각기 정과 마의 최고봉, 가히 측량할 길 없는 막강한 공능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니, 두 사람을 둘러싼 기이한 시공간이 일순 흔들렸던바.

그것은 천마를 만족스럽게 만든다.

“…좋군.”

홍혈천마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방금 전 연화존자와 섞은 한 수, 감개무량한 표정과 눈빛으로 스스로의 몸을 돌아보니, 알게 된다.

적어도 저것의 기억이, 저 존재의 능력이 홍혈천마의 그것을 물려받았다는걸.

“부활이라도 한 건가?”

사람의 몸으로 이루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공방을 주고받았음에도 두 사람 다 신색이 멀쩡하다.

죽은 천마도, 산 연화존자도 이 정도는 말 그대로 인사에 불과한 일.

못다 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분위기가 제법 좋다.

“부활… 부활이라.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군. 이게 진정한 부활일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두고 봐야 한다면?”

“흔한 이야기지. 이곳에서의 승자가 진정한 삶을 얻으리라는 건.”

천마는 다시금 미소 짓지만, 그 이야기의 함의는 제법 두려운 것.

“여기서 져서 죽으면 내 육신을 뺏긴다, 뭐 그런 건가?”

“옳게 보았네.”

미루지 않는 홍혈천마의 대답이 기가 막힐 법도 하건만, 연화존자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나 편한 데로 쉽게 돌아갈 리 없지.”

애초에 이럴 수도 있다고 여러 번 홀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국가무공원은 물론이요, 칠익회의 중진들 역시 이전의 이상 행동에, 마교도들이 연화존자를 존중하다 못해 절대복종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참아 넘겼어도 천마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며 무극검문이 은밀히 북한을 빠져나왔을 때에, 결사반대에 준하는 수준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너무 수상하다는 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죽은 천마의 시신이 멀쩡할 거라는 확신도 어이없지만 앞서 이상한 일들을 여럿 겪고 나니 불안감이 크다고, 굳이 수색할 필요 없다고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었다.

그러니 그 모든 걸 뿌리치고 바이칼 호수까지 와 천마의 잘린 목을 집어 든 연화존자가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추한 일일 수밖에.

“이 정도는 각오했어.”

의식으로 돌아온 천마를 바라보는 연화존자의 시선은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가?”

“그래. 내가 마무리 지을 일이 남았다는 걸 알았거든.”

연화존자가 마교도들의 추종을 받아들인 건, 그러니까 밀린 숙제를 하기 위함이 컸다.

홍혈천마를 죽여 천마격살을 일으키고, 마교의 내분을 유도하여 공산권 몰락의 마무리를 지었지만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았다는 걸 연화존자는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널 죽이고 사라질 게 아니라 지금처럼 나서야 했다는 걸 알았다, 천마.”

천마의 목을 베고 홀연히 사라졌을 때 마교도들이 가졌던 의문은 타당했다.

왜 대한민국은 소비에트의 마지막을 장식한 천하제일인의 존재를 몰랐던가? 왜 천마를 죽이고, 마교를 무너뜨린 절대 고수는 그 긴 세월 동안 오직 침묵만을, 세상 속에 나오지 아니한 채 은거하여 제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가?

연화존자는 이제 그러했던 이유를 안다.

“난 해야 할 일을 했지만 마무리 짓지는 못했어.”

“왜 그랬나?”

“지치고, 겁이 났거든.”

마치 친구에게 대화하듯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다. 거리는 가까워진다. 방금 전의 격돌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상태로 걸음을 좁힌다.

그러곤 마주 선다. 대화는 여전하다.

“내가 천마를 죽인 사실이 알려졌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그들을 모두 죽인다 한들 절대로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를 보았군.”

“그래, 너희. 마교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연화존자가 무림인으로서 세상에 나가는 일에 부정적이었던 건 극한의 혼란을 겪던 대한민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 낸 것도 있지만, 마교라는 반면교사가 있었기에 김철민은 세상 속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 했다.

무너져 가는 소비에트의 기둥뿌리를 붙잡고 공포로써 군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의 부모와 그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결국 무림인은 세상에 이용당할 뿐이며, 스스로 무언가를 하기에 사회는 너무나도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무림은 더 이상 군림할 수 없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에게 굴복한 이래 소비에트의 하나가 되어 버린 마교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토록 전율적인 무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심지어 천마가 살아 있음에도 결국 분열되어 제 살길을 도모하고, 강자존의 율법조차 흐지부지되어 버린 채 당의 명령에 움직이던 너희를.”

“부끄러운 말이군.”

자칫 비난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천마는 동요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부끄러움을 잊은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천마의 눈에 어린 호의는 가실 줄을 모르지만, 연화존자에게는 상관없는 일.

그는 오직 제 뜻을 세웠음이라.

“그래서 도망갔다. 천마를 죽이고 사라지면, 그러면 이 나라에 할 만큼 했고 도리를 다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아. 비겁하고도 구차한 변명이라는걸.”

“이유는?”

“바뀐 지금이 그 증거지.”

자연스레 기세를 끌어 올린다. 천외천의 내력이 물결처럼, 불꽃처럼 자연스레 타오르고 충돌하며 주변을 일그러뜨린다.

그렇지만 대화는 아직 멈추지 않는다.

“내가 돌아와 이 나라를 바꾸면서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으며, 겁쟁이라는걸. 무공만 강하지, 아무것도 모르고 짧은 판단으로 수많은 가능성과 시간은 놓아 버렸다는 걸 그때 알았어.”

김철민이 다부진 얼굴로 말하는 걸 들으며 천마는 웃었다.

천고의 마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미소였다.

“언제나 나는 과거를 바라보았다. 현재를 바꿔 미래를 가져올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내 안의 사고방식에 갇혀 가질 수도 있던 걸, 바꿀 수도 있던 걸 놓쳐 버렸지.”

“후회하나?”

“아니. 그렇지는 않아.”

어디선가 고통스러운 포효 소리가 들려오는 건 두 절세무인, 비록 하나는 죽었다고 하지만 세상에 상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의 고수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마교의 신비가 내지르는 것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오늘을 살 수 있었다. 모든 걸 내려놨었기에 욕심에 눈이 멀지 않고, 쉬운 길로 타협하지 않았어. 그러니 그 괴로움도, 모두 나의 것이다.”

연화존자의 등 뒤로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정순하게 내뿜는 그 패도적인 기운에 공간의 이지러짐이 심해진다.

천마의 주변은 무겁기 그지없다. 죽은 천마가 뽑아내는 천마신공의 기세란 실로 아연하여 만약 근처에 누가 있다면 그대로 눌려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

“너는, 이미 패도를 가고 있군.”

천마의, 천마신공의 만족스러운 얼굴과 별개로 말이다.

“너는 이미 세상의 강자이며, 너 스스로의 주인이구나. 이미 한없이 흔들려 보았기에 더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운 그런 남자가 바로 너야.”

천마가 두 손을 들어 올린다. 검붉은 내력이 맺혀 강기를 이룬다.

하지만 연화존자는 눈치챈다. 저 기운이 마교주 전용 시베리아 특급열차, 그 눈 덮인 설원에서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따스하며, 어울리지 않게 친근하다는걸.

“그러니 네가 천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윽고 두 사람이 격돌한다.

어두운 안개가 비명을 지를 만큼 격렬했다. 초식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내력의 높고 낮음 역시 비교가 의미 없다.

두 사람의 손과 발이 춤을 추듯 어우러진다.

서로를 속이다가도 정직하게 나아갔으며, 서로를 미워하다가도 공감하여 눈을 마주쳤다.

너무도 높은 산에 오른 절대 고수 두 사람은 그럴 수 있었다. 전인미답의 경지란 바로 이렇게 말해야 할 터.

정과 마의 구분은 사라진다. 어느새 닮아진다. 동작과 내력을 배우다 못해 훔치고, 구분하다 못해 그러지 못해 섞이고, 어두운 안개조차 비명 속에 녹아들고.

무아지경의 한판이었고 연화존자가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 눈물을 흘리는 무극검마가 부복하여 통곡하고 있었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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