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68화 (168/175)

168화

“후…….”

상하이 근방,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아 있는 마천루의 끝자락에서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순수한 근심 걱정만으로 이루어진 힘겨운 날숨이었다.

‘도제가 기어코 일을 벌이는군.’

빌딩의 최상층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는 대만 정파 연합의 두 하늘 중 하나인 절대자, 권성이었다.

그는 도제에 의해 연합에서 축출, 상하이에서의 작업을 마무리하는 책임자로서 여기 와 있었지만, 막상 도착해서 하는 거라곤 무림인의 두 주먹답지 않은 서류 작업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권성에 대한 존중으로 가득 차 있던 수하들이 철저히 그를 외면하고 있으니, 권성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커다란 손으로 도장이나 찍고 자리나 지키는 게 전부였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정파 연합 내부에서는 도제와 권성을 진정한 고수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했었다.

검제에게 바치는 경의와는 그 뉘앙스가 달랐다. 남궁가의 무공과 더불어 검황의 사업적 수완이야 인정하지만, 결국 무림인은 무공으로 이야기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도제와 권성은 진정 존경받을 만했던 것이다. 각각 팽가와 황보가의 무공을 이은 도제와 권성은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기재였고 시간이 가면서 재능이 만개, 예전이었다면 구주팔황이니 우내십대고수니 불렸을 경지에,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올랐다.

대만의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까지 했다. 그건 무림의 정기가 완전히 몰락해 가는 정파 연합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시장이자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던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전 세계가 등을 돌린 대만이라는 나라에 꼭 필요한 것이었기에.

위기의 순간에 일어난 몇 안 되는 힘이 되는 소식.

의기상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입신화경에 든 두 절대자는 중원 정파의 정통, 국본으로서의 중국을 이었다 자부하는 대만 전체의 자랑이었다. 언제고 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중원을 수복하는 그날이 오면 그 둘이 선봉에 있을 거라 모두가 믿는, 희망의 등대 같은.

조금 오글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적어도 필요한 감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날로 강성해져 가는 중국 공산당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어떤 활기찬 미래가 있었을 것이었는지.

심지어 권성, 본인마저도 지금으로선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 꿈을 믿었었다.

이때의 좌절은 공산당의 패퇴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자신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이 나를 버리고 어찌…….’

대만 정파 연합 내에서 적어도 한 명의 꿈은 좌절되었다. 권성의 경우가 그렇다.

다 연화존자와의 일 때문이다.

정확히는 연화존자가 직접 움직여 대만 정파 연합을 찾았을 당시 크게 양보를 하며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제는 그러한 행위가 대만 정파 연합의 명예와 위신에 먹칠을 했다고 했고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 감정의 발로는 위기감을 바탕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열등감, 중원 정파의 적통인 자신들을 능가하는 듯한 능력과 위용을 갖춘 연화존자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대한 질투가 근원이었던 바.

권성으로서는 심히 억울한 일이었다.

‘연화존자, 대한민국과 맞서서는 이득이 없거늘.’

그 심정을 그라고 모르겠는가? 그 또한 정파 연합의 일원이었고, 그 안에서 나고 자란 고수 중의 고수였으니, 권성이라고 어찌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그럴 리 없다.

대만 정파 연합 대부분의 사람처럼 그 또한 자신의 무공과 뿌리에 자부심이 있는 사내였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그 무공을 믿고, 중원 정파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현재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을 일.

연화존자와 언제고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것에는 그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게 지금은 아니었지만.

‘아직 중국의 사정이 안정되지도 않았고, 내부 사정도 여의치 않은데 어찌 무림 초출처럼 혈기로서 일을 진행한단 말인가?’

연화존자, 아니 대한민국 국가무공원과의 이른 결별은 많은 부작용을 나을 것이 분명해서 양보하여 달래는 수밖에 없다고 권성은 판단했다.

그나마 이성이 있는 판단이었다. 결국 내부의 분열은 잠재적인 적들, 아직 굴복하지 않은 연합의 적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 될 터이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치들이 아니었다면 중국 공산당이 어디 그렇게 무너져 내렸을 일인가?’

이게 단순히 고리타분한 도리를 따지거나 자존심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중국 공산당을 모략과 힘으로 무너뜨리며 능력을 증명한 연화존자의 국가무공원을 경솔하게 적으로 삼기에는 아직 연합이 따라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권성은 생각했다.

애초에 상하이 사태라는 것이 그렇다. 만약 연합에서 이러한 계획을 기획했다면, 또 실행했다면 과연 성공했을 것인가?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정파 연합은 그와 같은 일을 기획하지도, 시도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했다. 오직 대한민국만이, 국가무공원만이, 연화존자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충돌하면 손해는 확실한 일. 근래 미국에서의 사업이 대성공을 거두며 양국의 관계가 가까워졌고, 은밀히 돌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소문에 의하면 최근 정권을 잡은 일본의 여권이 국가무공원에 일정 부분 컨트롤 당하고 있다는 말조차 있었다.

‘사무라이 검법이라니… 어떻게 그런걸…….’

대만 정파 연합에 접근했던 방식, 아울러 자신들이 국가무공원에 가장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된 원인인 제갈세가와 사천당가를 빼낸 방식을 떠올려 보면 영 근거 없는 말도 아니리라.

중국과 그 주변은 뭐 말할 것도 없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독립도, 티베트 민족의 봉기도 연화존자의 세심한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는 놀랍다 못해 살이 떨리기까지 했다. 마교… 마교마저도 연화존자는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제반 사정에 더해 중국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 지금이었다. 분쟁을 감수하기에는 여러모로 꺼림직하며, 손해는 불 보듯 뻔했다.

‘지금 그와 싸우는 건 어리석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 연화존자를 이 순간 적대하는 건.

그래, 언젠가는 승부를 겨뤄야 할 때가 오겠지. 하지만 그건 중원을 완전히 수복하고, 공산당의 재기를 즈려밟아 막아 버린 뒤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가능한 일.

당장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났고, 상하이 사태로 인민들의 삶이 휘청이고 있었다. 이를 정리하지 못한다면 어마어마한 분노, 수십 년 전 있었던 국민당 후퇴 때 겪어 보았던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폭력이 다시금 재발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자존심 싸움이 하찮다는 게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다고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도제와 정파 연합 대다수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검제, 그 친구가 보고 싶구만.”

현재 검제 남궁명이 어디에 있는지 권성은 모른다.

정파 연합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연화존자와의 인연을 이은 그는 폭력 사태에 준하는 난동 끝에 모처에 감금되었다. 대외적으로야 일신상의 이유로 공식적인 직함과 역할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거라고 공표되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면 믿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 변명.

언제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지 모르는 것이고, 그건 사실 권성 역시 마찬가지.

대만 정파 연합의 권력은 이제 도제가 독점 중이다.

그나마 회사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손자마저 연금된 검제에 비하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권성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정파 연합은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자신이 배제된 거야 치욕스러움과 한탄스러움에도 참을 수 있다지만, 평생을 몸 바친 연합이 짚을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모양새인데, 몸이 편하다고 마음마저 편할 리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연화존자의 충돌은 연합을 위태롭게 만들 뿐 아니라 적들에게 새로운 반격의 기회를 열어 주는 행위였다.

그렇지 않나?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덕에 가능했는데.

‘한데 대체 연화존자, 그자는 어디에 있는 건지.’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일신의 자유가 구속되어 있지 않다면, 가족과 제자들을 두고 하는 점잖지만 모욕적인 협박이 아니었다면 권성은 아마 연합 내에서 내부투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바이칼 호수로 떠났으리라.

가서 연화존자를 찾고, 그와 함께 있을 마교도들. 생살을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그 간악한 족속들의 멱살을 잡고 물으리라.

대체 이게 다 무슨 짓이냐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아느냐고.

너의 부재가 이 모든 사단을 일으켰다며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을 테지. 자취를 감춤으로써 헛된 꿈을 꾸게 했다면서.

그러나 이건 다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자의 상상일 뿐이었다.

“흡!”

그는 쏘아지는 듯, 찔러 오는 듯한 살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주먹을 휘두른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하겠다. 아무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지만 정파 연합에서 자신을 제거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불시의 암습은 당혹스럽다.

중국 공산당이나 기타 적대자들? 혹 최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무공원?

둘 다 그럴 리 없다.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권성의 주먹을 왼손으로 부드럽게 받아 넘긴 뒤 맹렬한 기세의 오른쪽 손바닥으로 어깨를 내리쳤다.

양손의 상이한 기운에 아찔해질 정도.

내력을 한껏 끌어 올려 겨우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하는 게 전부였다.

“누구냐!”

순간 몸이 커져 방 안을 꽉 채우는 느낌으로 권성은 외친다. 그의 진신절기인 벽력태산신공의 공능이 주변을 장악하면 일어나는 현상.

평소라면 든든했을 이 충만함에도 하지만 권성은 불안하다.

복면을 뒤집어쓴 상대는 공간을 삼키는 권성의 내력에도 묵묵부답인 것도 모자라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니까.

“…힘을 더 내보지.”

평이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의 건방짐이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상념은 씻은 듯 사라졌다.

침입자는 벼락처럼 자신을 몰아붙였다.

시대 최상위권의 권사를 상대로 초근접전을 벌이는 자신감에 비웃음을 보낼 법도 했지만, 감히 그럴 수 없게도 파천황적인 내력에 몸이 굳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초고수의 육감은 그걸 알게 한다. 벽력태산공은 애써 저항하는 게 전부.

그렇다고 내공만 믿고 덤벼드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초식은 정교하고 부드러웠지만 드문드문, 꼭 필요한 순간에 펼쳐지는 직선적이고도 패도적인 공격에 권성은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

순식간에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이 찢어졌다.

상대는 공격하고, 권성은 막았다. 수십 년 고련으로 쌓아 올린 권법으로 고작해야 패배의 순간을 연장하는 게 전부여서 오직 낭패, 또 낭패.

살이 벌겋게 부풀고, 압력을 이기지 못한 귀와 코에서는 혈향이 감도는 바.

그래도 공방의 성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연화존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김철민은 복면을 벗어 던진다. 방금 전까지의 격전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신색은 평온하다.

하지만 권성은 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아주 두려운 것이라는걸.

“이제 대화의 시간인가?

그날 밤, 권성과 연화존자는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