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중국의 수도에서 대만의 고수와 대한민국의 고수가 맞붙는다는 건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위에 얹어진 여러 무거운 의미, 예컨대 아직은 엄연히 타국의 수도에서 타국의 외교 특사들이 대만의 무림인들에 의해 억류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로 인한 참사에 가까운 외교적 사고에 얽힌 이해관계 등이 아니더라도 관심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작금의 무림에서, 개인으로서 누가 가장 강한 무인일 것인가?’
대저 싸움 구경이란 하고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격투기는 이제 스포츠의 반열에 든 지 오래고 더군다나 이 싸움, 무림인의 싸움이었다.
영상 매체와 통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무림이 몰락한 이래 내력을 가진 무림인들 간의 싸움은 그리 많이 공개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공을 익힌 자들이 준 것도 있지만 설령 그와 관련된 영상이나 목격담이 있어도 관련 규제에 따라 지워지기 마련.
그런데 대만 정파 연합의 최고수와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의 최고수 중 한 명이 맞붙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어찌 세간의 관심이 주목되지 않을 것인가?
‘연화존자가 없으니, 이 승부는 정파 연합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청해마도가 은거를 오래 해서 그렇지, 정파 연합과의 비공식 비무에서 승리한 게 몇 번이지는 아나?’
‘이건 다 미친 짓이다. 국가 간에 외교 협상으로 해결할 일을 무림인의 비무? 다 정신병 걸린 거 아니냐?’
‘그래서 넌 재미없음? 난 재밌음.’
설왕설래, 말들이 많은 건 호사가들의 특권이었다.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베이징에서의 비무는 차근차근 준비되었다.
대만 정파 연합 측에서는 유난이다 싶을 정도로 온갖 정성을 들이는 중이었다.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고리타분한 예법 비슷한 것을 따져 가며 축대를 쌓은 것도 모자라 비무 날짜의 시간마저 온갖 이상한 것들을 부활시켜 따져 정하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방청권을 발행, 온갖 언론에 초청장을 뿌리는 것도 모자라 유튜브 채널 등에도 초대장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게 된다. 대만 정파 연합에선 자신들이 질 거라는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무슨 수를 쓰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 국가무공원 측에서는 저 자신감이 미리 준비한 술수 혹은 흉계 따위에서 기반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비무장도 저들이 비용 일체를 지불하여 만들었고 사람들을 부르는 것도 온전히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수작을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소가 베이징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도 그렇고, 저들이 오랜 적들과 손을 잡으려는 기미가 보이는 요즘입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요원들이 말에도 청해마도는 묵묵히 공사장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대비하셔야 합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비무를 거부하는 한이 있어도…….”
“그가 입신출화의 경지에 오르기 전.”
그런 청해마도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그가 도제라고 불리기 전,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주변인들은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아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무림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번의 비무가 있었음을, 아울러 이번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아님을 저 한마디로 알게 된다.
“그래서 그러는 거니,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지난날의 승부의 성패 역시도.
“하지만…….”
“수작을 부리면 부수면 될 일. 그렇지 않나?”
그럼에도 여전한 반발에 청해마도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함축한 침묵이었다. 저 요란함은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는 열등감의 발로라는 무언의 압박. 설령 수작을 부린다 할지라도 크게 결정할 것은 아니며 사실 수작은 자신들 역시 부리고 있지 않느냐는 말을 청해마도는 침묵으로 했던 것이니.
그 안에 담긴 많은 것을 국가무공원의 요원들은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이를 도청 중인 자들은 알 수 없었지만.
“…청해마도, 그자가 끝까지!”
중국 공산당 측의 도청 자료를 건네 들은 수하로부터 청해마도와 국가무공원의 대화를 전해 받은 도제는 자기도 모르게 깨질 뻔한 평정을 겨우 바로잡는다.
수양이 깊은 고수로서 겨우 저 정도에 흔들린다면 그 또한 추태일 수밖에 없는 일.
“지금이라도 준비를…….”
그러나 이어진 수하가 넌지시 건네는 권유에는 기어코 역정을 내고야 만다.
“자네는 나를 뭘로 보고 그따위 소리를 늘어놓는가?”
“죄송합니다!”
도제는 국가무공원의 의심을 실제로 실행하는 게 어떠냐는 수하의 의사에 제법 예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또다시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십 년 전의 알려지지 않은 패배. 그것도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입신출화의 문턱 바로 앞에 서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날의 패배였기에, 도제는 그때의 상처를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부서지는 달빛 아래 잔잔했던 파도는 도제와 청해마도의 비무로 산산조각 나 주변으로 비산했다. 어우러지는 두 자루의 도는 인적 없는 섬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타오르는 내기의 소란은 밤하늘의 대기마저 갈랐던 바.
그 치열했던 비무 끝에 무릎을 꿇은 건 결국 먼 대만에서 온, 아직은 도제라 불리기 전의 한 남자였지만 핑계는 있을 수 없었다.
청해마도는 먼 곳에서 연락도 없이 찾아온 비무자를 최대한 배려했다. 세상에 실망한 채 문파 소유의 섬에 틀어박혀 있음에도 수하들을 통해, 방의 재산을 털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융숭히 대접했고 비무의 전후로도 모욕적인 언사 하나 없이 시종일관 예의 바른 모습이었던 것.
그것은 쓰린 패배와 함께 더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광경들이었지만, 이후로도 한참이나 잊지 못한 여러 날의 기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 이 위치까지 올 수도 없었을 터.
“나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할 것이다.”
결국 청해마도와의 비무가 있었기에 입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도제였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여기고 있다.
그날의 패배가 있었기에 안주하는 일 없이 치열하게 살 수 있었다고. 연화존자와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의 이름값에 겁을 먹은 권성과 달리, 덤벼들고 또 덤벼들어 결국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고 도제는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연화존자가 아닌 청해마도와의 비무를 받아들인 면도 있었다.
이것은 연화존자가 없는 사이의 기회이자,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는 일이자, 청해마도라는 남자에 대한 무인으로서의 존중이었으니까.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의 유일한 돌파구다. 알았나?”
그리하여 도제는 단단히 이른다. 이 비무에 그 어떤 방해도, 협잡도, 비겁함도 없어야 할 것이라고.
과연 정파 연합이 그런 도제의 의사를 관철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국가무공원 측에서는 이 강요된 비무에 순순히, 아무 생각 없이 응하지는 않으리라는 건.
* * *
“…야, 너 나 알지?”
“제, 제가요?”
어두운 베이징의 뒷골목. 휘황찬란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흙먼지와 쓰레기 가득한 골목에 이곳의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질 좋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벌벌 떨며 협박당하고 있다.
양복 남자의 태도가 그랬다. 손과 눈동자를 마구 떨면서도 자신의 멱살을 잡은 두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연신 넘어질 듯 말 듯 휘청거리는 게 누가 봐도 질 나쁜 사람들에게 잘못 걸려 낭패를 보는 모양새.
그리고 넘어지려는 사내를 한 손으로 꽉 잡고 일으켜 세워 놓는 자가 그리 좋은 사람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너 말고 그럼 여기 누가 있어? 어? 나 알잖아, 너. 자안혈조 똘마니로 다니면서 우리 몇 번 봤잖아. 안 그래?”
이 말에 중국 공안 내에서 자안혈조의 직속 수하 중 한 명으로 승승장구 중이던 남자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붙잡고 겁박 중인 남자들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사, 사, 살려 주…….”
“누가 너 죽인댔어, 이 새끼야?”
그런 그를 붙잡고 뒷골목 양아치 수준의 발언을 중국어로 거침 없이 내뱉는 중이던 혈마제는 순간 치솟는 살기를 겨우 눌러야 했으니, 공안의 변절자로 자안혈조라는 줄을 잘 터서 성공한 양복 남자의 눈치는 제법 비상하다 할 것이었다.
“안 죽여, 이 새끼야. 너한테 내가 들을 말이 여러 가지거든.”
“…그래도 괴롭히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혈마제와 다니며 불량한 물이 많이 든 덕일까? 이 납치를 위해 근방의 모든 CCTV를 무력화시키며 이동한 뒤 골목길의 망을 보던 천지극뢰가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에, 양복 남자는 지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버린다.
“제, 제발… 그, 그… 자안혈조, 자안혈조가 말을 들어 먹지 않습니다!”
남자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그간의 사정이란 것에 대해 설명한다.
“총서기가 물러난 뒤 자안혈조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기를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건 연화존자의 연락이 닿지 않으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제가 아무리, 아무리 옆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도…….”
“야, 좀 조용히 해 봐.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봐……”
“진짜, 진짜입니다! 어차피 당가그룹도 자안혈조를 건드릴 명분이 없습니다. 독살을 시도하기에는 위험부담만 크고, 또 당가그룹의 암살부대장과의 꽌시가 있다 보니 더 성질은 지랄 맞아지고,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저도 정말 이제는 참을 수가 없고… 컥!”
“야, 좀 닥치라고. 지금은 그거 물어보러 온 거 아니니까.”
혈마제는 살기 위해 아무렇게나 떠드는 남자의 목을 그대로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얼굴로, 그러니까 예전.
상하이 사태 때 미친 듯이 구르며 보이던 그 살기 어린 표정 그대로 남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네가 지금 한 말이 중요한 말인 건 아는데… 지금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거든?”
불꽃이 넘실대는 얼굴로 혈마제는 물었다.
“지금 대한민국 특사단을 억류한 주변 상황이랑 누가 지키고 있는지, 지키는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랑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네가 아는 데로 얘기해.”
길 위에서 납치당한 남자는 최근 대한민국을 등지기로 결정한 게 명백한 자안혈조의 최측근으로 대한민국 외교단의 감금을 담당하고 있는 중국 측 인사였다.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네, 네?”
“너한테 얘기 듣고 바로 우리 전직 검사님 구하러 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말 더듬지 말고 빨리 불어.”
이에 생사의 위기에도 양복 남자의 얼굴에 갈등이 일어나지만 이어진 천지극뢰의 돌아보지 않는 다음 한마디가 그의 진심을 끌어낸다.
“특사단 탈출시키면 자안혈조 처리하러 갈 거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너도 알지?”
이대로 가면 오늘 같은 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이전부터 알았던 양복 남자의 얼굴에 그 한마디로 탐심이 어른거리고, 혈마제와 천지극뢰는 필요한 정보를 곧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디선가 두 절대 고수의 비무를 지켜보며 울려 퍼지는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