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70화 (170/175)

170화

크고 넓은 비무대 가까이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안전상의 이유였다. 이만한 고수들이 맞붙는 대결, 그것도 두 사람 다 전력을 다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기에 비무대에 가까이 붙는 건 일정 수준의 경지에 다다른 정파 연합과 국가무공원의 무림인이 아니고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할 만한 실력뿐 아니라 이유가 있는 자들은 비무대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지금, 서로가 무슨 수작질을 부릴지 몰라 의심하는 사이 아니던가?

정파 연합과 국가무공원은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노려보고, 주변을 살폈다. 혹 의심스러운, 불미스러운 시도가 포착이 될까 싶어서.

그래도 세간의 관심이 있으니 이 좋은 구경, 이해관계가 적은 이들에게 분명한 구경거리인 이 비무를 중계 안 할 수는 없어 현재 천안문 광장 근처로 무수히 많은 촬영 장비가 동원되었다.

망원렌즈와 드론 등이 주변에 배치되어 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겠다.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되면 대부분 내력이 충돌하며 발생할 여파로 고장날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정말이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과 대만은 물론이요, 동북아 평화 협상에 한발 걸쳤던 모든 나라의 정치인과 시민들이 이 비무에 집중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어서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 각종 뉴스와 유튜브 채널은 물론이고 전 세계 도박판이 들썩이는 중이었으니, 이 세기의 대결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다들 한결같았다 할 수 있으리라.

현장의 분위기는 그와 달라 다소 고요하고, 많이 긴장되었지만.

드넓은 광장과 그 안에서도 거대한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은 마치 이 넓은 공간을 둘이서만 쓰는 것처럼 조용했다.

중국 당국은 여기에 끼지 않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언급조차 잘 없었다. 무대 뒤에 서서 구경하는 구경꾼만도 못한 포지션을 취하는 중국 정부였으니, 주인공은 마치 대만의 정파 연합과도 같았던 바.

그들이 주도한 이 비무대에는 그에 따르는 일종의 웅장함, 그 이상의 절박한 분위기가 있었다.

거의 최초로 공개되는 초고수들의 비무였고 얽히고 설킨 관계가 많은 승부였다. 크게는 나라의 운명을, 작게는 한 사람의 생과 한 사람의 죽음을, 더욱 작게는 구원의 청산을 의미하는 비무.

고요하지만 팽팽한 긴장이 아픔이 어린 광장을 감싸고 있었다.

당사자들의 감흥은, 조금 다르지만.

“…기분이 어떤가?”

무수히 많은 시선, 현장은 물론이요 통신 기술을 이용해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만 집중 중인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도제였다.

“언제고 자네와 승부를 다시 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네만.”

청해마도는 도제의 마음속에 오래토록 자리 잡았던 상흔이었다.

이제는 도제라 불리는 저 절대고수는 청해마도와의 비무에서 생애 최초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 고된 길을 가는 와중에 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니, 도제는 청해마도에게서 커다란 벽을 느꼈다.

언제나 믿음과 신뢰로 보답해 오던, 수족처럼 부리던 그의 애도는 청해마도와의 비무에서 부러진 채 파도 속에 잠겨 버렸기에, 한동안 칩거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고 스스로의 무공을 부정한 채 깊은 좌절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것이 아직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해마도와의 대결에서 얻은 불신, 잃어버린 자신감을 극복하며 입신출화의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으니 어쩌면 청해마도야말로 그의 무공, 나아가 정파 연합의 은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터.

오히려 그렇기에 도제는 청해마도와의 일전을 다시금 갖을 수 있기를 고대해 왔다.

“…지치는 소리군.”

청해마도의 마음은 조금 다르다.

“그대와 나의 덧없는 승부에 너무도 많은 것이 걸려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덧없는 승부?”

“그래, 부질없는 놀음 같은 거지, 이건.”

청해마도의 무심한 목소리, 가라앉은 눈빛은 도제로 하여금 억눌러 왔던 분노를 솟구치게 한다.

하지만 청해마도는 그런 기색의 도제를 가뿐히 무시한다.

그가 보기엔 이건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아직도 꿈속에서 사는군.”

“꿈속에서 산다고? 이 내가?”

도제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중원 정파를 이은 자들이다.”

비무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옷자락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건 도제의 분노가 끌어 올린 내력, 오늘을 위해 최상의 컨디션으로 끌어 올린 내외공의 조화가 일으킨 현상으로 고르고 고른 비무대 근처 대기 인원들이 그 저릿한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설 정도.

“너희는 우리가 싸울 때 무엇을 했나? 흩어진 비기를 모으고, 단속하고, 사파와 마교와 싸울 때 너희는 무얼 했나? 비열하게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도제의 이러한 외침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지만, 청해마도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저 노여움이 도제, 그 하나만의 억하심정이 아님을 알고 있기도 하다.

“이번 일을 진행함에 있어도 그렇다. 상하이에서 모략을 꾸며 저 가증스러운 자들에게 일격을 가한 것은 가상하지만, 결국 중국의 일은 중국에서 해야 할 것. 간섭이 과했고, 오만이 너무했다.”

잘 안다. 오해야 제 마음대로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바로 그게, 너희가 꿈속에서 살고 있다는 거야.”

잠잠하던 청해마도의 기세가 도제의 그것을 천천히 밀어낸다.

“불만이 있는 것도 이해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이해한다. 한데 왜 그걸 비무로 해결하나? 아직도 무림인이 하늘을 날던 시대인 거 같나?”

처음에는 미약해서 조금 멀리 떨어진 자들은 청해마도가 기세를 올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치 얕은 파도가 모래사장을 적시는 듯한 모양새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나온 무림고수의 내력은 희미하게 물결쳤다.

하지만 잠시뿐인 일이었다. 얕은 파도는 곧 파랑의 높이를 더했고, 이내 주변을 휩쓸어 버릴 듯 광폭하게 요동쳤다.

“말을 섞기도 싫으니 어서 승부를 보지. 광대 노릇 따위 길어서 좋을 것 없으니.”

도제의 기세에 밀려 뒤로 밀려났던 자들이 하나둘 쓰러진다. 정말로 파도에 휩쓸려 중심을 잃은 것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쓰러진다.

만약 청해마도가 악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정파 연합의 무인 중 크게 다치는 이들이 나왔으리라. 그리고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청해마도가 아닌 연화존자였다면 폐부를 후벼 파는 말로 도제와 정파 연합을 조롱하고도 남았으리라.

시대를 모르고 과거 회상에 젖은 뒤떨어진 자들을 비웃을 기회를 연화존자는 놓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청해마도.

군말을 싫어하는 그는 말없이 애도, 청랑도(靑浪刀)를 꺼내 든다.

“더 떠들 것도 없이 승부를 보지.”

도갑은 멀리 던져 버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제의 무공 수위를 생각하면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 결의를 다질 필요가 있다.

도제 또한 마찬가지로 애도를 쥔 손에 힘을 더한다. 방금 전의 모욕에 붉어졌던 얼굴과 격동했던 마음을 순식간에 정리한다. 그 또한 정파 연합이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청해마도의 말이 옳다. 길게 말할 것이 있나?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동감일세.”

두 고수가 격전을 벌일 준비를 한다. 흘러 넘쳐 사방을 옥죄이던 내력은 갈무리된다.

집중한다. 도제라는 점, 청해마도라는 점으로 수렴하며 평생 해 온 수련, 일평생 쌓아 온 적공을 모두 쏟아 내기 위해 의념을 모으고 육신을 준비한다.

돌이킬 수 없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수많은 방해와 무수히 많은 문제 속에서 이 자리에 섰다. 결착을 내야 한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도제와 청해마도의 귀에나 겨우 들리는 먼 곳의 작은 소리, 그 안에 담긴 흉험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중국 정부는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다.

그들은 원한을 잊지 않았고, 이때의 원한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정파 연합과 대만을 포함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는 그런 기미가 있었고, 이건 아무리 살아남은 간부들에 대한 감시가 철저했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명제가 깨어졌고 그 전에 이미 공산당은 격렬하고도 비열하게까지 느껴지는 공격을 당했다. 그것도 본토인 중원에서.

어찌 이걸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소국의 무림인들은 물론이요, 이때를 기회로 달려드는 승냥이들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티베트 자치구는 물론이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대만 정파 연합이 손을 내밀어 하나의 중국을 지키자고? 지지한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다시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일단 몰아내고 생각하자고?

그런 게 귀에 들어올 리 없없다. 심지어 저렇게 말해 놓고 베이징, 그것도 천안문 광장에 떡하니 말 같지도 않은 과정을 거쳐 비무대를 만드네, 기자들을 부르네, 우리가 이길 거네 어쩌네 하는 꼴을 보며 중국 정부 측에서 어찌나 열이 받았던지.

얼마나 열이 받았던지 오늘 같은 일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과감한 일격, 천안문 광장을 향한 폭격을.

이를 위해 중국 고위 간부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는 자도 거의 없었지만 이 ‘거사’를 아는 자들 또한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고 온라인을 통한 의사소통은 일절 하지 않았으니, 역시 검열의 무서움을 아는 자들.

중국 인민의 비분강개를 담아 ‘거사’를 실행할 이들은 약점이 잡혔거나 아니면 가족을 위해 대국적 희생을 하기로 했다. 대부분 하급 기술자와 공무원이었으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오늘의 자리가 어서 마련되기를, 그리하여 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히고 동시에 궐기, 빼앗긴 권력과 주권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대한민국 측에서 비무에 임할 자로 청해마도를 제시한 건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만약 그가 무사했다면 감히 이런 일을 기획조차 못했을 터.

‘그가 있다면 왜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비무에 나서겠는가? 아니, 그가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은 확신을 가지고 진행시켰다. 성공에 대한 예감은 달콤했고, 패배의 좌절은 그만큼이나 깊었다.

일전의 어리석은 사람, 21세기 황제를 꿈꾸다가 연화존자와 엮이며 몰락해 호화로운 감옥에서 목숨만 붙어 있던 전 총서기의 일로 핵탄두를 빼돌릴 수 없게 된 건 불운이라고 중국 정부는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것만 있었다면 일이 좀 더 확실해졌을 텐데.

그렇지만 넉넉히 넣었다. 베이징 인근에서 남몰래, 하지만 정확한 좌표에 따라 발사된 장거리 미사일의 탄두에는 주변을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엄청난 화력을 자랑했으니.

공산당의 살아남은 고위 간부들은 손의 땀을 닦으며 비무대를 비추는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