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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71화 (171/175)

171화

비무가 한참이던 때,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눌러야 하는 막중하지만 좋지 못한 끝이 예정되어 있는, 그러나 피하지 못했던 어느 불운한 군인이 선택의 기로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으로 망설이던 그때.

혈마제와 천지극뢰는 납치와 협박에 곁들여진 회유로 얻어 낸 정보를 가지고 윤아영과 대한민국 외교 특사들이 감금된 장소로 은밀하게 이동 중이었다.

은밀이라고는 하지만 속도는 제법 빠르다. 이는 두 사람 다 얼마 전, 큰 깨달음을 얻은 덕분.

연화존자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던 경지라 하겠다. 천외천의 절대고수가 원하는 수준을 맞추기 위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사선을 걸어간 결과로 얻은 천우신조의 기회.

천지극뢰와 혈마제는 자신들이 입신의 경지, 그 문턱에 서 있다는 걸 상하이 사태 이후 귀국하여 치료하고 요양하며 깨달았다.

전과는 다른 감각, 느낌들. 이전에는 할 수 없던 것들이 막연하지만 단단한 확신으로 다가오며 할 수 있을 거라 속삭이는 것들. 그리고 빗나가지 않은 예감들. 손과 발을 놀림에 있어 벗어나지 않는.

“젠장, 야비하기 짝이 없는 새끼들. 무공도 안 익히 외교사절을 이딴 식으로 감금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성정, 살아온 인생이 바뀌었다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여간 이 미친놈들이 나라 망신을 시키는 거라니까? 매번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니까 이런 식으로 얻어맞는 거라고.”

떠나온 조국을 혈마제는 쉼없이 욕한다. 상하이 사태 전부터 그래 왔고, 상하이 사태 이후로도 병원에 있는 내내 혈마제는 그랬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싫어한다. 아니, 어쩌면 세상을 싫어하는 건지도 모른다.

연화존자를 만나 운명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그렇다.

혈마제는 부지런히 경공을 펼치면서도 작고 낮게. 바로 옆에서 함께 속도를 맞춰 달리는 중이며 또 무공의 경지가 일취월장한 천지극뢰만 한 고수 정도나 들을 수 있을 목소리로 끊임없는 투덜거림을 토해 냈다.

그러니 차라리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며 사파 무공의 개량을 위한 생체 실험을 당한 뒤 생겨난 일종의 버릇. 울화가 생기면 도저히 가슴속에 뜨거운 돌덩이가 굴러다니며 속을 태우는 것 같아 참을 수 없게 된 무공의 후유증 같은 것.

높아진 무공의 경지로도 이러한 부작용은 치료할 길이 요원했으니, 천지극뢰는 묵묵히 생각할 뿐이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꿈만 같고, 어색할 때가 있었다.

“아니, 연화존자가 죽었다는 확신이 있는 거야, 어쩐 거야? 아니면 그가 돌아와도 대세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건가? 니미, 그렇게 따지면 지금보다 예전이 더 조건이 좋았던 거 아니야?”

당장 이 옆의 살인마 놈과 어울리게 된 것부터가 말이다. 애초에 가족의 원수였던 놈하고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것조차 말도 안 되는 짓이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 내 삶이 그렇게 말이 되는 인생이었다고.

“그리고 청해마도가 별 좆밥처럼 느껴지나, 진짜? 나도 그 양반 옆에 가면 얼굴이 저릿저릿한데, 제깟 놈들 주제에 뭘 쳐 믿고 그렇게 건방을 떠냐고? 어?”

무공이란 것이 이토록 불합리한 것인가, 아니면 삶이란 것이 이렇게 부조리한 것인가?

천지극뢰는 알지 못해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죽음을 벗 삼아 사는 인생이 되었지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만 비추며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바뀐 사람들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연화존자의 출현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숨어 사는 무림인 범죄자로 살 뻔했던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대한민국의 범죄자들, 높고 낮고 간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제 이익을 위해 남을 괴롭히길 주저하지 않던 많은 인간이 연화존자의 국가무공원에 의해 소탕당했다.

그래, 연화존자의 국가무공원에 의해.

‘국가무공원은 그의 것이지.’

기라성 같은 고수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유능한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따르는 건 결국 연화존자였다.

그의 대의, 오직 ‘돈, 돈, 돈’만을 외치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사장된 그 단어를 연화존자는 부활시키다시피 했다.

실제로 국가무공원이 더 열심히 돌아가는 이유는 그거였으니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능력을 펼친다는 것.

그 모든 이들이 연화존자를 따랐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랬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떻게 그가 해낸 일이 되었는 지를 보면서 추종은 심화되었다.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러나저러나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란 천지극뢰에게 어쩔 수 없는 감상이었지만, 뭐. 그게 지금 중요할 거 같지는 않다.

“조심!”

천지극뢰가 번개처럼 내력을 방출했다. 자연 상태에서 볼 수 있는 벼락 따위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내공심법은 말 그대로 벽력처럼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가 그들을 공격하려던 자들을 곤란하게 했다.

“아악!”

“장비 벗어, 이 새끼들아!”

숨어 있는 자들의 지역적 범위가 너무 넓었기에, 천지극뢰 정도의 고수라 해도 인체에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화기를 비롯해 각종 전자 장비로 무장한 습격자들이었고, 이런 거라면 천지극뢰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홀로 여단급 병력을 상대하던 상하이 사태 때의 흉험한 전투를 떠올리면 이 정도는 할 만하지.

“아아악!”

운이 없던 누군가의 인이어가 폭발하고, 더 운이 없던 누군가의 허리춤에서 수류탄이 터진다.

통쾌하지만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 새끼들, 누가 올 줄도 모르고 숨어 있던 거 같은데?”

은‧엄폐 후 중얼거리는 혈마제의 말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천지극뢰가 인민해방군이 자랑하는 최첨단 장비를 무력화시키며 전장을 누빈 걸 목격한 게 한둘이 아닌데 멍청하게 저런 구성이라니.

“…습격은 예상했어도 우리인 줄은 몰랐나 보군.”

두 사람은 혼란에 빠진 이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순간 몸을 날린다.

신형을 휘날리듯 하며 다시금 경공을 펼쳐 두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혈마제와 천지극뢰가 이루는 그 선은 곧이어 붉게 물든다.

비명은 거기에 얹어진 무언가.

그래도 중국 공안이 허수아비는 아니었기에, 두 고수가 그리던 선은 머지않아 멈춘다.

“네놈들이 올 줄이야.”

상하이 사태 이후 중국 공안의 살아남은 사파 고수들이 혈마제와 천지극뢰를 멈춰 세웠다.

서로 어느 정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하겠다. 한때는 믿을 수 없는 동료로 함께 싸웠던 적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특히나 선두에 선 자가 그렇다.

“존나 좋은 날이네, 오늘 이거.”

그사이 벌어진 살육의 여파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의 그나마 깨끗한 손등으로 눈썹을 긁으며 혈마제는 웃었다.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부터 아주 유감이 많던 사이를 이 자리에서 만나 반가웠기에.”

“예전부터 너 새끼 찢어 죽이고 싶었는데 말이야.”

혈마제의 살인 예고에 자안혈조의 더욱 깊어진 보랏빛 눈동자가 희번득하게 번뜩인다.

“개자식이… 그게 네 맘대로 될 거 같나?”

“내 맘대로 되게 하려고.”

그 말을 신호로 자안혈조와 혈마제가 격돌한다. 말이 필요 없는 사이였다. 여기까지 와서 대화로 풀 생각은 서로에게 없었다.

그리하여 혈마제의 시뻘건 강기가 자안혈조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자안혈조의 사특한 기운 가득한 내력이 혈마제의 목을 긁고 지나간다.

두 사람 다 악귀처럼 웃고 있었으니, 남은 자들 또한 제 몫을 하기 위해 싸우는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격전이 펼쳐졌고 잠시 후.

결국 버튼을 누른 불운한 군인의 손에서 미사일이 천안문 광장의 비무대를 향해 발사된다.

도제와 청해마도는 그 이상함을 거의 동시에 감지했다.

대기의 떨림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하늘을 보며 닿기 직전의 고수들은 눈치챘다.

하지만 대응은 사뭇 달랐다.

“다들 피해라!”

도제는 경호성을 외치며 경공을 펼쳐 비무대를 빠져나갔다. 애써 높이 쌓은 높이가 무색하게 훌쩍 뛰어내려 필사적으로 달려 나간다.

느낄 수 있었다. 저 무거운 것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떨림이란 것을.

무엇이 오는지는 모르겠다만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 길한 것은 전혀 아니란 걸 아는 도제는 생존 본능을 발휘, 제 한 몸 피하기 급급했으니. 그나마 소리쳐 사람들을 대피시키려는 시도라도 했다는 게 정파의 일원으로서 지닌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하나 청해마도는 다르다.

“흠…….”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몸을 뺀다면 제 한 몸 건사하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중국 공산당이 바랐던 것과는 다르게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건 오직 개인에 한정된 일.

주변에 모인 국가무공원 측은 물론이요, 정파 연합의 고수들은 확실히 사망할 것이고 근처의 운이 없는 언론인들과 일반인들 또한 휘말릴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피하지 않는다.

도갑은 이미 던져 두었으니 두 손으로 자루를 잡는다. 익숙한 감각이다. 그러나 평소에 늘 확신과 신뢰로 다가오던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회의적이다.

‘자를 수 있을 것인가?’

순식간에 다가오는 거대한 무언가에 대해 육감이 계속해서 경고한다.

‘쳐 낼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라고, 할 수 없다고, 위험하다고.

그러나 청해마도는 피하지 않는다. 그는 수십 년을 섬 속에서 은거하며 무공을 갈고닦고 마음을 갈았다.

세상의 오욕, 부당함. 그런 것들을 파도에 흘려보내며 긴 세월 숨어 살았다가 이제 겨우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자리를 피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언정 다시금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함을 청해마도는 안다. 후회와 미련 같은 것들을 떠내려 가게 둘 것인가?

그러고 싶지 않은 청해마도가 내력을 끌어 올린다. 있는 힘껏,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성공이든 아니든 그저 지금의 최고를 위해 평생 갈고닦은 기예를 펼친다.

펼치려 했다. 어느새 점으로 나타나 천안문 광장을 폭격하려던 미사일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청해마도는 굳건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까 어둠이 이 도시를 집어삼키기 전에는.

“……?”

순식간에 나타난 검은 어둠은 끈적할 정도로 농염했다.

알 수 있었다. 마기라고 불러야 할 무언가가 이 괴현상의 원인이라는걸.

그렇지만 온전한 마기, 청해마도가 예전에 익히 겪어 봤던 마교도들의 그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밝은 느낌이 있어 시급한 상황이었음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익숙하면서도 밝은 이건 대체……?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곧 다음 순간, 어둠인 녹아내리듯 사라졌기에.

고개를 드니 광장을 불태우고도 남을 흉악한 물건이 곱게 누워 있다. 길들여진 짐승처럼, 완전히 무해한 모습으로.

그 옆에 서 있는 건, 너무나도 익숙한 한 사람.

“…형님?”

청해마도는 손바닥으로 미사일의 표면을 쓰다듬는 이가 연화존자라는 걸 알아보았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연화존자의 모습에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연화신공의 기운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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