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도제는 대만을, 정파 연합을 혈혈단신으로 떠났다.
그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그의 자부심이자 모든 것이었던 정파 연합은 더 이상 그를 반기지도, 환영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다.
더는 대만 정파 연합이 도제의 둥지가 아니었다.
될 수 없었다. 도제가 축출했던 권성과 검제는 돌아왔으며 한때의 동지이자 정적이던 이들은 정파 연합에 도제의 자리를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도제의 수족들은 하나같이 제거되거나, 사라지거나, 밀려났다. 잔인했지만 도제가 그들에게 했던 것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연합의 무인들은 이제 이것을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한때 도제를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지지하고 따르던 이들조차 이러한 과감하고도 잔혹한 조치의 필요성을 거부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은 비공식적이지만 경고했던 것이다. 도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그가 그립다면 정파 연합의 기둥뿌리조차 남겨 놓지 않겠노라고.
슬픈 일이었다. 한때 자존심, 의기와 하나라고 생각했던 이 정신적 작용은 대만 정파 연합 사이에서 사라져 패배감과 순종이 차라리 당연하게 되었다는걸.
“…바람이 차군.”
몸을 피해 가족조차 두고 사라진 도제는 중국으로 숨어들었다. 중국 내부의 혼란은 복잡하기 그지없어 도제라는 또 하나의 시대의 거인을 충분히 숨기고도 남았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아무리 권성과 검제가 도제의 흔적 지우기를 행하고 있다지만 가족까진 건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또한 그랬기 때문이다. 권성과 검제의 실권을 빼앗고, 무림 문파로서의 두 고수의 수하들을 핍박했을지언정 가족은 건들지 않았다.
같은 고난을 겪어 온 동지로서 최소한의 권유였다. 가족들은 무사할 것이다.
오직 본인만을 제외하면 다들 그럴 거라는 생각은 쓰디쓰게 다가온다.
“나이가 들었군, 모두가 그렇듯이.”
도제는 최소한의 것들만 지니고 도피하듯 대만을 빠져나왔다.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남겨 둔 채, 뒤로한 채 시대의 가장 강력한 고수 중 하나인 그는 모습을 숨겨야만 했다.
제법 긴 도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미사일이 다가옴을 알고 경공을 펼친 이래로 계속 그는 숨고, 숨기고, 숨어야 했으니.
자괴감은 깊어만 갔다.
도제는 많은 것을 떠올린다. 허무하게 끝나 버린 야망,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과거의 자신감, 제 손으로 성취한 무공과 희망 같은 것들을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도제는 끝없이 떠올렸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던가?
도제는 답을 내지 못했다.
“당신은 늙지 않는 것 같은데?”
다만 중국으로 피신한 건 충동적이고도 희박한 근거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도제는 어울리지 않는 산천유람을 하는 중이다.
도제의 집안, 도제가 익혔던 무공의 무공서에는 군데군데 중원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시대의 변화, 원치 않는 도주와 쫓겨남을 겪으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떠나와야 했던 선배들과 조상들의 안타까움은 도제의 영혼에 새겨진 것.
그리하여 도제는 모든 것을 잃었음을 확신한 그 순간, 더는 정파 연합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된 그때, 중원의 산천초목을 봐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나 또한 늙지. 나날이 변하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나?”
그리고 그 충동을 해소 중이다.
도제는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조차 불분명한 사천의 산맥을 거닐며 기연이란 걸 찾아 헤매기도 하고, 청해마도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일전을 생각하며 파도치는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소금기 섞인 바람을 폐부 깊숙이 밀어 넣기도 해 보았다.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와중이었다.
자신은 도망갔다. 경고를 남기긴 했지만 결국 도망갔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여기까지 도망 왔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청해마도는 도망가지 않았다. 맞서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맞서는 게 아니라 그저 버티거나 고집을 부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후회를 곱씹으며 인정한다.
정파의 일원이라면, 무공을 익힌 협객이라면 무릇 그랬어야 했다고. 청해마도처럼 무모할지언정 덤벼들었어야 했다고.
“…자네는 대체 뭔가?”
그런 이해 속에서 서서히 초탈하게 빼앗긴 것들을 생각하던 도제의 앞에 모든 것을 앗아 간 그 남자가 나타난 건 얼마 전의 일로 처음 돌연 그가 나타났을 때, 그러니까 뜻밖에도 연화존자가 홀연히 나타났을 때 도제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익힌 무공도, 무기도, 세상 그 어떤 수단으로도 저자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보였다. 연화존자, 그는 천하제일인을 넘어 고금제일을 논해 마땅한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대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연화존자는, 하지만 도제를 적대하지 않았다.
조용히 따라다니는 게 전부였으니 의외였다. 그간의 행보를 보면 만나자마자 죽이려고 들거나 최소한 사로잡아 끌고 가려 들 줄 알았는데.
연화존자는 그간 적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처분해 왔다.
그렇다. 처분이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저 재난 같은 절대고수를 막거나 버텨 내지 못했다.
남북한에 더해진 미국은 종전 선언에 합의했다. 북한과 남한은 휴전선의 철책선을 제거하고 있어 얼마 뒤에는 공동 작업을 통해 지뢰 제거 및 육로 개통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군사적 적대감을 완화시킨 뒤에 있을 경제적 협력, 개성공단의 재활성화 역시 함께 이루기로 했다.
일본의 우익 세력은 자그마하게 쪼그라들었다. 혐한론을 말하는 자들은 비국민 취급을 받는 시절이 왔다.
도제의 조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대만은 도제에서 비롯된 과오를 책임지고자, 묻어 버리고자 대한민국의 행보에 적극 협력 하는 중이다.
그 결과 중국의 공산당은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었다. 마치 적대적 M&A에 당한 기업이라도 된 것처럼 중국이 가진 경제력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찢겨져 여기 팔리고 저기 팔리는, 흡사 이전 열강들에게 당했던 그 모습처럼 중국의 경제는 전리품처럼 나눠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연화존자의 존재는 그 모든 것을 침묵시켰다.
누구도 그를 적대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천마를 다시 한번 베었지.”
그런 연화존자는 도제의 질문에 선선히 답한다.
“악(惡)으로 가득한 세상을 마(魔)로써 정화하겠다는 자들을 보았지. 그게 전부야.”
도제를 따라다니며 말이 없던 연화존자는 돌아보며 말했다. 그 얼굴에는 전에 없던 그늘과 그로 인해 빛나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있다.
“…앞으로 무얼 할 건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
망설이지 않는 선선함 역시도.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다. 한 번 죽인 천마를 두 번 죽였을 뿐이고, 진작 복속시켜야 했을 마교도들을 내 발 아래 둔 것뿐,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그것이 내가 익힌 무공이고, 생각이고, 목적이지.”
빙그레 웃으니 도제는 아득하다. 전신에서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렇게 된다.
연화존자가 해 온 것들을 생각하니 그렇게 된다.
연화존자가 해낼 것을 생각하니 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네.”
그렇게 망연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찬바람이 부는 산 위에서 침묵하는 도제를 보며, 연화존자는 따스하게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말한다.
“그래서라니?”
“내가 가꿀 미래에 하나의 길만 남겨 놓을 수 없어서.”
그러자 바람이 멎는다. 놀란 도제가 돌아보자 타오르는 오색 빛깔, 어딘지 모르게 어둡지만 어딘지 모르게 밝은 찬란한 내공이 연화존자를 감싼 채 넘실댄다.
“독선과 아집은 경계해야 되거든. 그러니 난 무림의 정기가, 정파의 의기가 더욱 쇠퇴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고 보면 들은 것 같다. 대한민국 국가무공원이 주도한 UN의 대중 제재가 의외로 중국 정부가 보유한 사파 무공을 완전히 말살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는걸.
비인도적인 조치가 아니라면 무공을 익힘에 있어 큰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어 설왕설래 말이 많았는데, 그게 이런 의도였나?
“그러니 돌아가게. 돌아가서 조용히 무공을 갈고닦고, 후학을 양성해. 그 이야기를 하려고 때를 보고 있었어.”
빛나는 연화존자의 눈을 본다. 잔잔하지만 압도적으로 끌어 올린 내공 때문에도 그렇지만 강한 의지를 품었기에 나오는 그 눈빛에, 도제는 눈이 멀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동시에 반발심이 터져 나온다.
“…순순히 따르는 건 역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군.”
도제의 접어 두었다고 생각한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이대로 맥없이 돌아설 수는 없다고 말한다.
연화존자의 강력함이야 보지 않고도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설 수 있는가?
아니다. 그는 정파 연합의 최고수 중 하나였다. 잠시지만 모든 것을 쥐었으며, 모든 것을 쥘 뻔했던 남자였다. 상대가 강하다고 돌아서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감당할 수 없다고 도망가는 실수는 그 정도면 족하다.
의념은 이에 반응한다. 청해마도와의 승부는 아니지만 지금이야말로 지난날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순간이다.
“그래. 그래야지.”
연화존자는 그런 도제의 결의를 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어둠과 빛이 진해진다. 그 안에서 불타는 의지, 의념. 그렇게 불러야 할 모든 것이 수렴하며 도제를 응시한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있는 힘껏 그래 보라며 바라본다.
도제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싶은 선을 도제의 강기는 그렸다. 평생의 심득, 일평생의 삶이 담긴 휘두름이었지만 그 선은 연화존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련은 없었다. 그 순간 도제는 깨닫고, 보았고, 느꼈으니.
그는 정파 연합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정파 연합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오직 무학의 끝에 닿기 위해 노력하겠노라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세상은 초탈한 그 모습을 의심했지만 기자회견 중의 장담대로 타국에서 그의 존재에 항의하는 일은 없었고, 이는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
도제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제자를 받았다. 폐쇄적으로 대만 국적인들만 받던 전과 달리 문호는 개방되었고, 도제는 묵묵히 재질과 인성을 가려 제자를 받았다.
그리고 가르쳤다. 연구하며 궁구했다. 닿지 못했던 거대한 남자의 마음에 점을 찍기 위해 어떤 무공과 어떤 수련이 필요한지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도 놓지 않고 잡고자 노력했다.
머지않아 정파 연합의 일을 남궁가에 넘긴 권성 또한 이 작업에 합류했다. 그 또한 밝지만 어두운 누군가를 보았기에 결정은 쉬웠다.
두 절대고수는 죽을 때까지 대만이라는 섬을 떠나지 않았다. 대만 정부가 원하던 것처럼 중국 본토 진출이 이루어진 후에도, 정파 연합의 성장과 외연 확장에도 두 고수는 침묵만으로 무공만을 쫓았다.
변화하는 대한민국, 더욱 커져 가는 국가무공원과 경쟁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십오 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