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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175화 (완결) (175/175)

175화

자신을 찾아와 감추고 싶던 비밀을 들추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보며 진현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맥없이 늘어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던가? 어떤 노력과 각오로 인정을 받고, 또 녹록치 않던 환경 속에서 뼈를 깎는 수련과 의지를 불태워 지금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고작 그따위 치매 걸린 노인네 때문에…….’

진현우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쓰러질 듯했던 구부정한 자세를 곧게 펴며 온몸에 힘을 준다.

내력을 일으킨다. 언제나 믿음과 신뢰로 존재했던,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던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내공심법을 차분히 떠올린다.

변화는 극적이다.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런 진현우를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순간 국가무공원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진현우는 다시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그 안에 어둠이, 힘이, 위대함이 있었다.

“제가 소요신공을 알게 된 건 맞지만, 결코 제 의지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순간 느껴진 그 인상이 긴장으로 인한 미친 생각이라고 여기며 진현우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는 말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해 피해자임을 역설한다.

“진현우 씨의 의지로 알게 된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남자는 묻는다. 여전히 엄정한 기세로, 그렇지만 어디 한번 할 이야기가 있다면 다 털어 놓으라는 식으로.

“동방요선이 전음으로 제 귀에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내공은… 그 떨쳐 낼 수 없던 구결을 외우자 저절로 일어나 제 안에서 꿈틀댑니다…….”

이어진 진현우의 진술은 언뜻 이해 가지 않던 앞의 문장을 뒷받침한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 대한민국 국적의, 혹은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가 잡힌 범죄자 중 가장 사람답지 못한 것들이 갇히는 함경 제1교도소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공간은 뭐니 뭐니 해도 무림인 범죄자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내공 한 줌 없어도 사람을 최소 둘 이상 죽게 한 놈들만이 갇히는 이곳에서도 무림인 특별동은 공포와 두려움의 공간이었으니, 시대를 떨쳐 울린 개세의 마두들 정도는 되어야 그곳에서 헛기침이라도 할 수 있는바.

함경 제1교도소의 가장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진현우가 그곳의 담당이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특별동은 다들 꺼리는 장소였습니다. 왜 그러신지는 국가무공원에서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다도선객 때문이지.”

국가무공원이 발족하고 얼마 뒤, 청해마도에게 잡혀 수감된 다도선객은 긴 세월 침묵했지만 끝내 무림 고수로서의 풍모를 펼쳐 냈으니. 팔다리가 잘린 다도선객이 교도관 십여 명을 살해하고 도주 끝에 사살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일로 교도 행정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나기도 했고, 또 그 뒷수습을 국가무공원 측에서 직접 나서기도 했으니 모를 것이 없는 일.

“그가 입에 머금은 철조각으로 수많은 추적을 뿌리치고 국가공무원의 희생을 낳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치매에 걸린 동방요선의 팔다리를 구속하고 입마저 마음대로 놀릴 수 없게 만든 것도 아시겠군요.”

다도선객의 난동의 여파로 대한민국 정부는 여러 숭고한 희생과 엄청난 비난을 감당해야 했다.

덕분에 이전에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특수직으로 지정되지 않았던 현실이 개정되는 등의 순기능과 동시에 강력범, 특히 무공을 익힌 범죄자들에 대한 처우 역시 급격하게 나빠졌으니. 다도선객과 같은 반열에 있던 동방요선이 그 대표적인 예.

가뜩이나 가진바 내공을 모두 잃고 힘없는 늙은이로 전락했던 그는 이후 상태가 악화, 치매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세상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내공의 일부를 회복했습니다.”

진현우는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한다.

“여느 때처럼 순찰을 도는 제 귀로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무공의 구결을 끊임없이 외우는 작은 소리였습니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진현우는 특별동에서의 근무를 꺼려 하지 않았다.

외려 반겼다. 특별동에서 근무한다는 건 어렵고, 위험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좀 더 많은 연봉과 인사 점수, 무엇보다 수련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생긴다는 걸 의미했기에 그는 이를 오히려 특권이라고 여겼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 그것도 무력이 필요한 업무에서 무공의 필요성은 나날이 대두되어 가고 있었기에 수련은 중요했다.

누구도 특별동 근무를 하는 동안엔 진현우를 방해하지 않았다. 저 꼴 보기 싫은 교도소장조차 그랬다. 만약 진현우가 특별동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들어가야 하는데, 누굴 들여보낸단 말인가?

하여 편하고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인데, 과연 무림인 특별동은 특별동.

“처음엔 제가 주화입마라도 온 건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동방요선이 결코 끊기지 않는 전음으로 제 귀에 소요신공의 구결을 되뇌고 있었다는 것을요.”

동방요선이 무슨 수로 내공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천진기마저 재생하는 공능을 가진 소요신공의 위력이기야 할 테지만, 다도선객의 탈옥 이후 이어진 일제 점검에서 국가무공원의 최고수들이 직접 나서서 다시 금제를 건 걸로 아는데, 대체 어떻게?

동방요선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진현우는 고민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왜 보고하지 않았지?”

“저는 보고했습니다!”

왜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냐는 남자의 물음에 진현우는 강하게 반발했다.

“보고를 했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동료들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고, 제 직장 상사에게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죠.”

이에 남자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린다.

“동방요선의 전음을 들은 건 당신 하나뿐이었군?”

”…증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를 숨기지 않았다고.

“동방요선, 그 늙은이는 제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절대로 전음을 다시 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설령 그랬다 해도 제 동료들이나 직장 상사들은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동방요선의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은 사실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진현우 하나 정도는 충분히 농락할 지성은 남아 있던 것도 맞는 걸로 보였다.

동방요선은 오직 진현우에게만 전음으로 소요신공을 알려 주었다. 다른 이들이 오면 여전히 치매 걸린 노인, 무공이 전폐된 채 정신을 놓아 버린 노인 흉내를 내며 다른 이들을 속였다.

“다른 동료들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저라도 믿지 못했을 테니까요.”

동방요선이 전음을 보낸다는 말을 다른 동료들은 믿지 않았고, 교도소장은 비웃었다. 잘난 놈인 줄 알았더니 미친놈이어서.

하지만 상부로 보고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폐쇄적이고 위험한 함경 제1교도소의 인력 충원은 언제나 문제였고, 휘하 직원의 정신적 문제는 가늘고 길게 더 가고 싶은 교도소장의 필요에 맞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진현우가 깨달은 건 특별동 근무시간마다 끊이지 않던, 귀를 막고 내공을 끌어 올려도 떠나지 않았던 동방요선의 목소리는 구결이 되어 이제 그의 머리와 몸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군요.”

그리고 뜻밖에도 국가무공원에서 온 남자는 진현우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딱딱 치며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그렇다.

“들었지? 조사하고 처리해.”

“알겠습니다.”

진현우의 옆에 있던 사내들이 질문과 지시를 하던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간다.

진현우는 그 광경을 멍하니 보았다.

“자, 그럼 정리해 봅시다. 진현우 씨는 지금 소요신공을 익힌 상태인 거죠?”

“…그런 거 같습니다.”

“구결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요구는 일견 부당해 보였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진현우는 입을 열어 소요신공의 108자 구결을 줄줄이 내뱉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이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흠… 진현우 씨.”

“네.”

“혹시 소요신공의 내공을 익힌 뒤로 어떤 이상 증상이 있거나 한 적은 없습니까?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졌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정신을 차려 보니 낯선 곳에 있었다던가 하는, 그런?”

“그런… 일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진현우가 남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따져 보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홀로 웃음 지으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동방요선, 그 늙은이가 아주 노가 났군.”

“…네?”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는 진현우를 보며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혼잣말의 이유를 대답해 준다.

관련 법을 어긴 공무원에게 하는 말치고는 꽤나 선선하고도 부드러운 말투였다.

“뒤지기 직전에 소요신공의 전인을 구했으니, 운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남자의 말은 분명 설명이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당신의 재능이 소요신공을 익히기 최선이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치매 걸린 노친네가 죽을힘을 다해 남은 생명을 선천진기로 전환했을 정도로.”

“그, 그 말씀은?”

“진현우 씨한테 전음을 펼치고, 내력을 쏟아부어 심령에 제압 비슷한 시도를 한 것 자체가 그 늙은이가 절실했다는 얘기지. 쉽지는 않았을걸?”

추가 설명은 재빨랐고, 진현우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지만 남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진현우 씨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무원 특별법에 의거, 허가되지 않은 불법 무공을 익힌 것에 대한 대가로 기존에 익힌 무공을 전폐한 뒤 해임되는 것.”

그 끔찍한 말에 진현우의 얼굴이 창백해지지만 남자는 여전히 할 말을 한다.

“다른 하나는 소속을 옮겨 근무하는 겁니다. 아마도 국가무공원이 될 텐데, 이 경우에는 소요신공을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겁니다.”

두 번째는 조금 희망적이지만, 그래도 진현우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좀 더 조사 같은 걸 하는 일 없이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거냐고, 소요신공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게 무슨 의미냐고 그는 묻고 싶었다.

국가무공원으로 소속을 옮기면 함경 제1교도소에서 있었던 일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건지 묻고 싶었고, 또 자기 말을 어떻게 다 믿고 이런 식으로 약속을 하는 거냐고도 물어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묻기 위해 진현우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고,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본다. 그의 눈 안에서 요동치는 어둠과 그 사이를 뚫고 춤추는 사나운 무지개, 깊고 높은 강력함을 순식간에 훑어보며 정신이 또 아득해진다.

그러자 의문은 해소된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이 나라를 바꾸고, 이들이 사는 세계를 바꾼 남자가 바로 앞에 있음을 깨달았기에 질문 따위 더는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이후의 일들은 남자의 제안대로 흘러갔다.

사기꾼이자 협잡꾼의 손에 놓여 있던 소요신공은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되어 수많은 이들의 삶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했다. 연화존자는 아직 살아 있고, 여전히 실재함을.

모든 것이 바뀐 지금에도 천하제일인은 대한민국에서 산다고.

(대한민국엔 천하제일인이 산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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