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마음(3)
한탄할 시간은 없었다.
"자, 출발해야지."
온 가족이 모여 집을 나서야 했으니까. 정신이 조금 없긴 했으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충격이 어느 정도는 가셨다.
"날씨 한 번 더럽게 좋네."
바람도 선선했고.
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목적지가 보였다. 조금 외진 곳이긴 하지만 공간이 워낙 넓게 잘 빠져서 부족할 게 없는 구세계 아울렛 백화점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완전!”
류현아가 배를 쓰다듬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버지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가볍게 점심부터 먹을까.”
“응! 여기 맛집도 많던데!”
“뭐가 제일 땡겨?”
“딤섬!”
“오, 딤섬 괜찮지. 거기로 갈까?”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걸로 1차 목적지가 정해졌다. 아울렛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맛집으로 소문난 딤섬집에 들렀다. 벌써부터 자리가 거의 꽉 채워진 상태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줄 서야 했겠는데?"
"일찍 오길 잘했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확인했다.
“일단 이거, 이거, 저거...”
“여기 체크해주세요.”
"아, 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주문했음에도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각종 요리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오, 금방 나오는구만.”
“먹어볼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육즙이 가득한 만두 하나를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맛을 음미했고 그 표정을 확인한 동생들이 서둘러 젓가락을 놀렸다.
“크으, 역시...”
“오오...!”
류성도 하나씩 맛을 봤다.
으음, 맛있네.
육즙도 비리지 않으면서 고소했고 속은 각종 야채와 고기가 알차게 어우러졌다. 자연스레 퍼지는 과하지 않은 느낌이 좋았다.
이것도 좋은데.
정신없이 딤섬을 흡입했다.
"으, 배불러."
배도 채웠으니 이젠 커피 한 잔을 마실 차례였다.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들러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입안이 깔끔해졌다.
“자, 그럼 돌아볼까.”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약 1시간에 걸쳐 원하는 물건 몇 개를 사고 난 뒤부터는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아오...”
사실상 남자 셋은 이미 쇼핑을 끝낸 상태였다.
남은 사람은 여자 둘.
하지만 어머니와 류현아의 쇼핑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여기도 예뻐!”
“어머, 한 번 볼까.”
“응응!”
어쩜 저렇게도 힘이 넘치는지. 눈에 보이는 매장마다 들러서 옷이나 가방, 신발을 신으며 깔깔거렸다.
“하아...”
본인도 모르게 흘러나온 류성의 한숨.
순간 마주친 시선.
류성과 아버지, 그리고 류환의 지친 눈동자 세 쌍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들은 애석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를 다독였다. 그 순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류현아가 방긋 웃으며 물어왔다.
“아빠, 아빠. 이거 예쁘지?”
“우리 딸은 뭘 입어도 예쁘지.”
“히히, 그럼 나 이걸로 할까?”
“그럴까?”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는 아버지.
그러나, 류현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아니, 잠깐만! 조금만 더 보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응? 굳이...?”
“아빠, 나 저거도 한 번 입어보고 올게!”
“...그래.”
"히히, 이것도 이쁘다! 요것도!"
"참... 예쁘기도 하지."
오늘도 쇼핑은 쉽게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
완전히 지쳐버렸다.
“흐아...”
도대체 이 쇼핑은 언제가 되어야 끝나는 걸까. 의문은 상념이 되어 하염없이 뇌를 돌아다녔고 그 탓에 멍한 시선으로 좀비처럼 가족들을 쫓아다닐 뿐이었다. 이 매장이 저 매장같고 저 매장이 이 매장 같을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띠링!]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알림 소리에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이건...?
어느새 홀로그램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퀘스트 발동!]
[눈앞에 있는 모금함에 일정 금액을 후원하라.]
[남은 시간 : 1분]
[성공 보상 : 랜덤 카드, 선행 포인트.]
[퀘스트 실패시 강한 복통을 느낍니다.]
길 중앙에 있는 모금함이 보였다.
그 옆에는 사람도 있었고.
지나쳤다가 되돌아가는 건 조금 이상할 것이기에 서둘러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위치도 좋았다. 류성이 가장 뒤쪽에 있는 상황이니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가족들을 다시 한번 살피다가 지갑을 꺼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항상 현금을 들고 다니는 중이라 지갑은 꽤나 두둑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30만 원을 꺼낸 뒤 자연스레 모금함으로 향했다.
저벅.
가족에게 들키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던 터라 괜스레 다급해졌다.
다 왔어...!
현금을 모금함에 넣으려는데 손이 자꾸 삐끗거렸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집어넣었다.
[퀘스트 클리어!]
[정산 중...]
홀로그램을 눈에 담은 채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딸랑.
모금함 옆에 있던 사람이 종을 흔들어버렸다.
“모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90도에 가까운 인사와 거대한 목소리에 앞서가던 가족들이 뒤를 돌아봤다.
“음...?”
“어라?”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두 녀석이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선 류성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동안 말이다.
류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갈 무렵,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모금한 거냐?”
“네, 뭐...”
긍정의 대답에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기특한데? 좋은 일이니까 같이 해볼까?”
아버지가 10만 원을 꺼내어 모금했다.
이상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쑥스러웠던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색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뿌듯함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어머니와 동생 두 녀석이 씨익하고 웃었다.
“크흠...!”
다시 부끄러워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고 류환과 류현아는 빠르게 따라붙어 류성의 얼굴을 일부러 빤히 쳐다보며 킥킥거렸다.
“아오, 진짜!”
결국, 버티지 못한 류성이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의류점에 숨어들 듯 진입했다.
*
그 이후 쇼핑에 집중하지 못했다.
계속 퀘스트 생각뿐이었다.
모금함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얻은 3점의 선행 포인트. 덕분에 총 10점이 되어 랜덤 뽑기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부분은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퀘스트가 제시하는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러다 퀘스트의 내용 그 자체에 집중하니 어느정도 방향성이 보이긴 했다.
첫 번째는 병원에서의 모금.
두 번째는 어미 고양이 옆에서 죽어가는 아기고양이를 구하는 일.
세 번째는 노점 할머니.
네 번째인 오늘은 길거리 모금함.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은 힘없는 이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었다.
돕는다는 것.
그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단어 앞에서 류성은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고단했던 시절이 존재했다.
12살 즈음이었던가.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회사가 휘청거린 까닭에 집안이 흔들리기 시작했었다. 끊임없이 주변에 손을 벌렸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 탓에 빚은 더욱 늘어났으며 집은 수시로 좁아져만 갔었다.
그때의 삶을 더 말해서 무엇하랴.
뻔한 이야기였다.
단칸방에서의 생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돈을 버는 족족 빚을 갚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삶을 영위할 때라 어떨 때는 보일러가 끊기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고. 그게 하필 겨울과 겹치는 시기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기도 했었다. 추위에 이가 딱딱, 부딪히는 걸 견뎌내며 등교하는 일이 잦은 나날이었다.
뭐, 다 지난 옛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날부터 집안 사정이 조금씩 나아졌으니까.
예전에 물어봤을 때는 회사에서 간신히 유지하던 사업 아이템 하나가 인기를 끌면서 겨우 숨통이 트였다고 들었었다. 그 이후 사업이 서서히 확장되면서 빚도 갚았고 현재는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사는 중이었다.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했다.
나쁜 기억으로만 가득했던 시절이라서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주변 사람들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는 방학 기간마다 식권을 받기도 했었고 중학생일 때는 선생님들이 문제집을 무료로 줬었다.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체육복과 운동화를 사주기도 했었고 말이다. 신기하게도 힘든 시기마다 꼭 도움의 손길이 튀어나와 지친 어깨를 다독여줬었다.
친척이나 아버지의 지인들이 찾아와 용돈을 주거나 이런저런 반찬을 갖다 주는 일도 많았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온정이 지속해서 이어졌다.
지금까지 클리어해왔던 퀘스트들은 분명.
그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퀘스트를 핑계로 실천했던 행동이 바로 그 온기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퀘스트가 랜덤으로 발생하는 게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무언가가 존재할 때에만 나타났으니까. 이건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의미였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마주해야만 퀘스트를 얻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아니, 파악했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앞으로도 쭈욱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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