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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1)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도.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는 근심도 모두 해결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계약 잘하고!"
"걱정 마."
가뿐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도착한 곳은 영등포였다.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기업 사옥.
“어후.”
하늘의 구름이라도 뚫을 것만 같은 건물의 높이가 첫 번째로 눈길을 끌었고 세련된 건축물의 구조가 두 번째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멋있긴 하네.
규모가 상당한 사옥 내부로 들어서자 데스크가 보였다.
“어서 오세요, 뭐 도와드릴까요?”
“이모티콘 사업부를 찾아왔는데요.”
“약속은 하셨나요?”
“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류성입니다.”
직원이 이름을 검색하자 예약 현황이 떠올랐다.
“확인되셨습니다.”
데스크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엘리베이터 타고 5층으로 올라가서 왼쪽으로 가다보면 관리부서가 보일 거에요. 제가 연락해놓을 테니 바로 가시면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5층에 내려 복도를 조금 걸으니 이모티콘 관리부서가 보였다. 거기서 마침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은 커리어 우먼이 등장했다.
업무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순간 류성은 정신이 멍해져버렸다.
“안녕하세요. 계약 담당자인 최연수라고 해요. 류성 작가님 맞으시죠?”
“예? 아, 아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해드릴게요.”
최연수라면 통화를 했던 그 사람이었다. 이렇게 예쁠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으음, 정신 차려야지.
그저 단순 계약 업무를 보러 왔을 뿐이니까.
“여기는 이모티콘 홍보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이모티콘 사업부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받은 뒤 소규모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차를 내어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류성이 그린 이모티콘이 태블릿 화면에 떠올랐다.
“다시 봐도 멋지네요.”
“하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회의에서도 평이 긍정적이었어요. 최근 봤던 이모티콘 중에서 가장 독특하다는 의견이 다수였고요. 그림체도 눈길을 끄는 편인데, 아이디어가 정말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런가요.”
“빈말 아니에요. 진짜루요.”
“고맙습니다.”
류성은 칭찬에 그저 어색한 마음뿐이었다.
온전한 내 실력도 아니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아마 사업부 자체에서 괜찮게 밀어줄 것 같아요. 이모티콘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사실 팔리는 건 한정되어 있거든요.”
“그렇겠네요.”
“해서 꾸준히 노출될 수 있게 이벤트를 넣어주곤 한답니다. 여기, 보이시죠?”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줬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어야 판매가 잘되거든요.”
“으음.”
“여기서 반응이 좋으면 더 좋은 이벤트를 받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이렇게 노출이 안 되는 대다수의 이모티콘은 판매가 거의 안 되겠네요?”
“그건 아니에요. 작년부터 월정액 상품인 이모티콘 프리미엄이 나오고 또 정착되면서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이모티콘이 괜찮은 수익을 얻고 있거든요.”
"아아..."
그렇게 몇 가지 궁금한 사항에 대한 대답을 얻고 이런저런 형식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그녀가 서류를 내밀었다.
“그럼,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볼까요?”
“그러죠.”
이미 확인했던 사항들이라 계약서 작성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이모티콘 시안과 관련된 소소한 몇 가지를 더 끝내고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
“고생하셨어요, 작가님.”
“뭘요.”
“마침 점심시간이니까 같이 점심이나 드실래요?”
“점심이요?”
계약도 끝났는데, 굳이?
설마...?
조금은 흐뭇한 망상이 떠오르려는 순간, 그녀가 애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사실은... 이럴 때 아니면 법카를 마음대로 못 쓰거든요.”
“아아...?”
“제가 진짜로! 맛있고 비싼 거로 사드릴게요! 네?”
한 마디로, 본인이 맛있고 비싼 걸 먹고 싶다는 얘기 같았다.
오해가 단번에 풀렸다.
그럼 그렇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뭐. 좋죠.”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소고기라도 사주려나.
맛있고 비싸다는 말에는 류성 또한 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
담당자인 최연수와 함께 건물을 나서자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유야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연수, 그녀의 미모 때문일 터.
“가까운 곳이라 걸어서 가면 될 것 같아요.”
“아아, 네.”
정말로 가까웠다.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해버렸으니까.
“기대하셔도 돼요. 여기 정말 맛있거든요.”
“이야...”
엄청나게 비싸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근사한 식당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기대감이 듬뿍 차올랐다.
식당 내부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메뉴판을 확인했다. 한정식 식당이었는데 기본 1인 메뉴가 12만 원이었다.
“소고기 좋아하시면, 여기 한우 수라상으로 하시면 되고요. 양고기 좋아하시면...”
“엄청 비싼데요...?”
“괜찮아요. 이럴 때 아니면 저도 못 먹어요.”
“으음, 그럼... 한우 수라상으로 할게요.”
무려 1인분에 19만 원짜리 코스였다.
정말 미친 가격이었다.
최연수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한우 수라상으로 2인분 할게요.”
“알겠습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최연수는 업계에 대한 대략적인 사항들을 알려줬다.
“이모티콘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거든요. 정말 인기 있는 이모티콘은 여러 방향으로 상품화가 진행되니까요.”
이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흥미가 동했다.
“여러 방향이면, 어떤 거요?”
“뭐, 일단 인형은 기본이죠.”
“아아.”
“의류나 쿠션에도 적용돼서 판매될 수 있구요. 컵이나 접시 같은 식기류에도 해당 이모티콘이 붙을 수 있어요. 10대에 인기 있는 이모티콘은 가방이나 필기도구 회사랑 연계하면 판매량이 좋은 편이죠.”
생각보다 상품화를 시킬 방향이 많아 보였다.
“신기하죠?”
“네. 그런 쪽은 사실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었거든요.”
“놀라지 말아요.”
“뭐를요?”
“전 세계 캐릭터 시장규모가 3,000억이 넘어요.”
3,000억이라니 엄청나네.
근데 전세계 치고는 조금 작은 거 같기도 하고.
“3,000억원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네?”
“3,000억 달러요.”
“에...?”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3,000억 달러면...?
“어, 그러니까... 360조요?”
“네. 우리나라 캐릭터 산업 시장만 해도 10조가 넘으니까요.”
“와...”
“생각보다 시장이 크죠?”
“네, 완전히 미쳤는데요?”
류성의 생생한 반응을 보며 최연수가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이모티콘 시장으로 한정하면 아직은 작은 편이긴 하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에요. 어느 캐릭터 산업보다 더 공격적으로 성장하는 중이기도 하고요. 알아두시면 나중에 이모티콘이 대박 났을 때 도움이 될 거에요.”
대박이라.
그런 행운이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마운 일이었다.
“네, 참고할게요. 고맙습니다.”
“뭘요.”
그 사이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접시가 촤르륵, 깔렸다.
단순히 밑반찬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수준의 요리가 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심 탄성을 뱉어내며 가장 앞에 놓인 갈비찜을 하나 덜어 먹었다.
“헙...!”
“히히, 살살 녹죠?”
“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대박이네요.”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편인데도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소갈비 찜을 먹었는데 얼마나 연하고 고소한지 먹으면서도 감탄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음, 으음...!”
그 깊은 맛을 음미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다급히 한 점을 더 먹었지만 양이 적어 벌써 접시가 비어버렸다. 아쉬움을 물로 채우고서 다른 음식을 이어서 먹었다.
허, 이것도.
가벼운 호박전이었는데 호박 자체가 달달했다. 식감도 좋았고 구운 정도도 딱 알맞아서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새우.
쫄깃한 식감에 풍미가 가득한 버터의 향이 한껏 어우러졌다.
맛있어...!
정말 정신없이 흡입했다.
심지어 평범한 나물찬과 다양한 종류의 김치 또한 일품이었다. 맛을 음미하는 사이 또 다른 음식이 나왔다.
빈 접시를 가져가고 새로운 음식이 놓였다.
"와, 이것도...!"
다시금 새로운 음식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대망의 메인 요리였다.
“고기는 저희가 구워드리겠습니다.”
“아, 네.”
자그마한 화로와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의 소고기가 보였다. 화로가 적당히 달궈졌을 무렵, 직원이 소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치이이익.
익어가는 소리가 어찌나 황홀한지.
“드시면 됩니다.”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굳어버렸다.
처음이었다.
이런 맛은, 정말로.
최연수가 그런 류성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엄청 맛있죠?”
“네? 아, 네. 진짜... 최고네요.”
여기는 꼭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시겠지.
그 사이, 허기졌던 배가 가득 차다 못해 빵빵 부풀어 터질 정도가 되었다.
“어우, 더는 못 먹겠네요.”
“저두요.”
“으아, 진짜 잘 먹었어요.”
행복한 표정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연수는 계산대로 향해 결제를 마쳤고 류성은 바깥에서 기다렸다.
“뭐 타고 가세요?”
“지하철이요.”
“아아. 방향이 반대네요.”
“그렇죠.”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같이 점심 먹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뵐게요, 작가님.”
“네. 들어가세요.”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찢어졌다.
최연수는 회사로.
류성은 반대편 지하철 쪽으로 이동했다.
*
조금은 여유롭게 걸어가던 중이었다.
“저, 저기...”
지하철 입구 근처에서 한 명의 군인이 허둥지둥거리고 있었다. 그는 뻘쭘한 표정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중이었다.
“시, 실례합니다. 제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아, 죄송해요.”
모자 위에 그려진 한 줄의 선.
이등병이었다.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으나 손을 뻗어주는 이가 없었다.
“자, 잠시만요...”
“...”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무슨 상황인지 보다 더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띠링!]
마치 보조하는 것처럼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퀘스트 발동!]
[이등병은 차비가 필요해!]
[휴가를 나온 이등병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 현금마저 없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당황한 그가 스마트폰을 찾게 도와주거나 혹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차비를 후원하라!]
[남은 시간 : 10분.]
[성공 보상 : 랜덤 카드, 선행 포인트.]
[퀘스트 실패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아주 쉬운 퀘스트였다.
류성은 씨익, 웃으며 이등병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