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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보는 눈(2)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는 처음 보는 터라 굉장히 신선했다.
재밌으려나?
이내 잡념을 지우고 내용에 집중했다.
[S#1. 어두운 골목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재형.
마주 오는 현욱.
둘의 어깨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슬쩍 고개를 돌리는 현욱의 시야로 낯익은 재형의 얼굴이 포착된다.
현욱 : 어이, 거기. 잠깐.
우뚝 멈춰선 재형.
말없이 몸을 돌리며 현욱에게 다가간다. 팔짱을 풀면서 손에 들린 사시미 칼을 휘두른다.
현욱 : 너, 이 새...! 크억...!
재형 : 너부터, 시작이야.
몇 번 더 칼을 휘둘러 현욱을 죽이는 재형.
가로등 불빛 사이.
그늘로 숨어 들어가는 재형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느새 몰입되어버렸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눈을 반짝이며 다음 장면을 눈에 담았다.
[S#2. 호화로운 집무실 내부.
창가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권호찬.
권호찬 : 그래서, 현욱이가 죽었다?
쌍도끼 : 예, 일곱 번 찔렸답니다.
권호찬 : 누구냐.
쌍도끼 : 그게, 아직...
몸을 돌린 권호찬이 쌍도끼에게 다가간다.
고개를 숙이는 쌍도끼.
권호찬이 쌍도끼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강제로 턱을 들어 올린다.
권호찬 : 도끼야, 내 성격 모르냐.
쌍도끼 : 죄, 죄송합니다!
권호찬 : 반나절 주마.
권호찬의 이글거리는....]
류성은 순식간에 시나리오에 빠져들었다.
으음...!
글에서 현장감이 느껴졌다.
빨려들 것만 같은 몰입감.
마치 시나리오 그 자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사라락-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 이 부분은 좀..."
하지만 이어질수록 부족한 부분이 조금씩 드러났다.
살짝 아쉽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액션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후아.”
어느새 마지막 장면을 끝으로 영화 한 편을 이루는 시나리오를 독파했다.
스윽.
가만히 시선을 위로 올리는 순간.
[시나리오를 모두 읽었습니다.]
[평가 진행중...]
[평가가 완료되었습니다.]
[만점은 100점입니다.]
[개연성 : 69점]
[몰입감 : 85점]
[작품성 : 51점]
[흥행력 : 86점]
[총평 : 아쉬운 개연성을 고려하더라도 몰입도가 높은 액션 영화입니다. 작품성은 낮지만 대신 대중의 만족도를 고려한 작품으로 흥행력이 86점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출연하는 배우와 여러 가지 요소를 따졌을 때, 손익분기점을 넘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점수였다.
특히 흥행 가능성.
86점에다가 총평 또한 긍정적이었다.
일단 여기에 투자하고.
투자할 다른 영화가 더 있는지 나머지 작품들도 살펴봤다.
*
류성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어우, 피곤하네.”
벌써 세 개의 시나리오를 더 독파했다.
얼마 만에 보는 글인지.
덕분에 정신적인 피로함이 빠른 속도로 쌓여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추가로 투자할 만한 수준의 시나리오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 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나만 더 보기로 했다.
그래, 딱 하나만 더.
마침 조금 관심이 가는 장르의 영화가 보였다.
<어둠이 드리워진>
[황산호, 김선혜, 설예린 주연
2022년 8월 9일 개봉!]
[영화 ‘어둠이 드리워진’은 서울 중심지를 지배하는 재벌 가문.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오컬트적인 이야기입니다. 악령에 빙의한 가족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과 그 사실을 절대 알리지 않기 위한 재벌 회장의 속성이 부딪히며 위기감을 극대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비하면서도 초자연적 현상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뛰어난 연기력의 김선혜 배우.
대한민국에서 감초같은 조연으로 이름을 떨친 황산호 배우.
떠오르는 아역, 설예린 배우.]
[어둠이 내려앉은 번화한 도심지 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
서서히 드러나는 기이한 일들.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시나리오와 연기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겁니다.]
[추정 손익분기점]
영화 '어둠이 드리워진'의 손익분기점은 극장 관객수 163만 명 내외입니다. 손익분기 매출에 포함되는 항목은 극장매출 + 극장외매출(OTT 및 IPTV 등)입니다. 즉, 관객수가 163만 명에 미도달하여도 극장외매출에서 충분한 매출이 발생할 경우 수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63만 명이면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니었다.
이어서 예고편까지 확인했다.
“이야, 이건 진짜...”
예고편만으로도 그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대가 되었다.
서둘러 파일을 내려받아 시나리오를 눈에 담았다.
시작은 잔잔했다.
그것도 잠시.
장면이 쌓이면서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린 채 몰입하기 시작했다.
냐아...
거실과 방 사이에서 힘없이 우는 럭키의 존재감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고요한 시간이 흘러갔다.
오직 글자에만 온 정신이 들러붙었다.
[S#17. 어린 딸의 괴성에 놀란 조형만.
조형만 : 미소야, 왜 이래!
조미소 : 으아아아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거품까지 물고 눈이 뒤집히는 조미소의 모습에 조형만이 무언가를 직감한다. 며칠 전의 사건이 스치듯이 지나간다. 이어, 매서운 눈빛으로 당황에 젖은 전혜선을 쳐다본다.
조형만 : 당신! 뭐하고 있어! 빨리 잡아!
전혜선 : 어, 어떻게 해, 미, 미소야, 여보. 어떡하냐고...!
조형만 : 잡고 있으라고!
조미소 : 끄, 끄으윽, 끄어어억...!
조형만 : 어서!
다급히 딸을 잡는 전혜선.
조형만은 그제야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선다.
전혜선 : 다, 당신은...?
조형만 : 금방 갔다 올게.
조형만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저택을 나섰다. 회사 근처에 있는...]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다.
천주교의 엑소시스트가 등장했으며 스님이 나타나 위기감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산되면서 마지막으로 무당에 기대었다. 그를 불러 살을 날렸음에도 악령은 쓰러지지 않았다. 지독한 악령과의 사투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악령을 상대하는 재벌 기업의 회장이자 동시에 아버지인 조형만의 행동에 몰입되었다.
돈을 추구하는 기업인의 속성.
자식을 생각하는 부성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조차도 흥미로웠다.
“어...?”
집중력이 깨어졌을 땐, 이미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였다.
끝났네.
무언가 멍한 상태가 잠깐 이어졌으나.
이내 소름이 올라왔다.
오소소 돋은 닭살에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는 동안 홀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시나리오를 모두 읽었습니다.]
[만점은 100점입니다.]
[개연성 : 89점]
[몰입감 : 92점]
[작품성 : 81점]
[흥행력 : 89점]
[총평 : 적합한 개연성과 뛰어난 몰입감, 더불어 작품성과 흥행력까지 사로잡은 흠 잡을 곳이 없는 작품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작품으로 단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시나리오만으로도 충분히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압도적인 잠재력이 존재합니다.]
시스템의 평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건 진짜...”
감히 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대박이잖아...!
두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투자해야 할 영화였다.
돈 더 넣어야겠네.
서울전쟁보다 더 큰 금액을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엔 감독의 이름값도 한몫을 했다.
드라마는 작가빨.
영화는 감독빨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였으니까.
이건 무조건 된다.
모든 걸 갖춘 영화임에 틀림이 없었다.
"으으."
아직도 전율에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집중으로 온몸이 뻐근했다.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간단하게 하면서 몸을 풀었다.
“후우.”
다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만졌다.
투자부터 진행해야지.
첫 번째 영화인 ‘서울전쟁’에 들어가 투자 버튼을 눌렀다.
[목표 모금액 : 2,000,000,000원]
[현재 모집액 : 1,783,500,000원]
류성은 바로 5,000만 원을 해당 영화에 투자했다.
[5,000만 원을 투자했습니다.]
[투자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영화 ‘어둠이 드리워진’에 1억을 투자했다.
총 1억 5,000만 원을 쓴 것이다.
첫 번째 투자기도 하고 돈이 묶이는 기간이 그래도 두 달 이상이어서 3억을 전부 투자할 수는 없었다. 일단 적당한 금액을 투자하고 개봉 이후 관객들의 반응도 어느 정도 지켜볼 생각이었다.
“점수도 적어놓고.”
한글파일을 열고 두 영화의 점수를 적었다.
오케이, 됐어.
개봉 이후 관객들이 점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면 다음번 스킬을 사용할 때는 보다 큰 금액을 투자할 수 있을 터였다.
냐아아...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아이고.”
가족도 없는 집에서 혼자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서글픈 표정에 마음이 아팠다.
“미안, 럭키야. 맛있는 것 먹을까? 츄르 어때?”
서둘러 츄르를 찢어서 줬다.
그런데 럭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음...?
이상한 마음에 가볍게 쓰다듬어주는데 기운이 영 없어 보였다. 평소라면 발랑거리며 대들거나 배를 뒤집었을 텐데.
지금은 갸르릉 소리도 없었다.
힘없이 늘어진 채였다.
“럭키야? 괜찮아?”
대답대신 날카로운 기침소리가 울렸다.
-취!
몸은 바들거리며 떨리는 상태였고 심각할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럭키가 심각하게 아파보였으니까. 다급히 럭키를 애견전용 가방에 넣고서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
자동차가 없다는 게 이렇게 한탄스러울 줄이야.
"헉헉...!"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달려가는 류성은 힘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럭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취이!
감기와 관련해서 안 좋은 병명이 있었던 걸 기억하기에 걱정이 더욱 컸다.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허억, 허억...!"
이윽고 도착한 동물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 사람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후우, 네."
류성은 숨을 고른 뒤에 접수부터 했다.
“증상은 어떤가요?”
“기침도 하고요, 일단 기운이 너무 없더라고요. 츄르 보여줘도 반응이 없어요.”
“으음, 네. 접수되셨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에.”
류성은 빈자리에 앉아 대기했다.
오래 걸리려나.
걱정스레 럭키를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순서가 금방 찾아왔다.
"럭키 보호자님, 들어오세요."
수의사가 세 명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류성은 가장 왼쪽에 있는 고양이만을 위한 진료실로 향했다. 내부로 들어가자 지난번, 럭키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 검사를 해줬던 수의사가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일단 럭키부터 좀 볼까요.”
“아, 네.”
럭키를 가방에서 꺼내자 수의사가 럭키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흐음.”
그 짧은 시간 동안 왜 이리도 긴장이 되는지.
제발, 괜찮기를.
진찰을 어느 정도 마친 수의사가 류성을 쳐다봤다.
“일단 상태는 나쁘지 않아요. 이대로 약을 먹으면서 며칠 더 지켜볼 수도 있고요. 아니면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해도 되구요.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허피스나 칼리시 바이러스 감염증일 수도 있어서요.”
“그러면 검사할게요.”
“간단한 설명부터 드릴게요. 일단 의심되는 감염증에 대한 PCR검사를...”
설명을 들으며 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확실한 병명을 통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비용이 좀 비싼 편이에요. 부담되시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해당 감염증이라고 가정하고서 약을 처방받으면서 상태를 지켜볼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검사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할게요.”
“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저 비싼 검사에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까.
"나야 괜찮다지만..."
집안이 잘 사는 편이니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가슴이 찢어지는 고민을 이어갈 터였다. 치료를 받고 싶어도 돈이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이 존재할 테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고통을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살다가 가는 반려견과 반려묘가 대다수일지도 몰랐다. 뭐가 문제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안타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 네.”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이 럭키는 검사를 진행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상념이 하염없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보호자님. 럭키 검사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결과 나오려면 15분 정도 걸려요.”
고개를 끄덕이며 럭키를 조심스레 받았다.
냐아아?
다행히 집에서 봤을 때보다는 조금 기운이 살아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