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봉투(1) >
[고단한 하루 길 끝에
거울을 보면 비치는 내 모습
마치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드라마 내용은 물론이고 가이드 곡과도 느낌이 잘 들어맞았다.
[어둠이 드리워질 때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공허한 골목길 아래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
[먹구름이 자욱해지고
빛이 사라져 시야가 멎어도
너는 오늘도 나를
나는 내일도 너를]
클리이막스 부분도 좋았다.
잠시 눈을 감고 노래에 맞춰 흥얼거려보는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어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누구지?
궁금해서 프로필을 살펴봤는데 아무리 봐도 기성 작사가는 아닌 것 같았다.
류성? 설마 신인인가.
정말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아직도 닭살이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혹시나 착각이었을까 싶어 재차 가이드 곡에 가사를 맞춰 흥얼거려봤다.
"미쳤는데, 이건?"
다시 확인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차이가 있기는 했다. 처음보다 더 짙은 감성을 느꼈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이 본선 진출작이었다.
"후우."
해당 가사의 이미지를 간신히 지우고 다시 심사 작업을 이어갔다. 작곡가 전은아의 기준을 충족하는 본선 진출작은 그 이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
문득 놀고 있는 돈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투자금을 제외하고도 무려 18억 원이었다. 이대로 계좌에만 넣어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흐음."
얼마간의 자금은 장기적인 투자에 사용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업투자자의 길을 가보겠노라 가족에게 밝힌 상태였는데 성과가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예전에 투자하다 말았던 미국 대기업에 다시 투자를 이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종목은 변동될 예정이었다.
요즘 관심이 생긴 분야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해 보이는 ETF를 찾아냈다.
ETF가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관심이 없어 찾아보질 않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영상 하나를 보다가 빠져들었고 그 이후 집중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인덱스 펀드를 거래소에 상장시켜 투자자들이 주식처럼 편리하게 거래할 수 있게 만든 상품.]
이게 바로 ETF였다.
정말 많은 ETF가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끌리는 게 있었다.
"역시 QQQ가 최고지."
애폴, 구골, 마이크로소포트, 메타북스, 아마종, 또슬라 등등. QQQ ETF에는 정말 대단한 기술주 기업이 전부 모여있었다. 탑 10개 종목의 비중이 60%에 달하는 미국 나스닥 기술주의 모음집이라고 보면 되었다.
지난 10년간 1,000%.
그러니까 10배가 올라간 ETF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보다 더욱 진보된 기술과 함께 살아갈 것이라 믿기에 투자에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18억 중에서 3억 원을 미국 주식 거래가 가능한 증권사로 이체시켰다.
늦은 밤이 되고.
미국 증시가 개장하자마자 QQQ ETF를 1억 원어치 매수했다.
[매수가 체결되었습니다.]
[매수가 체결...]
남은 2억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매수할 예정이었다.
"이야."
거하게 쇼핑을 한 기분이었다.
1억을 이렇게 써버리네.
단순히 주식을 샀을 뿐인데 엄청난 거금을 사용했다는 어떤 흥분감이 일었다.
이런 게 매수중독이라는 걸까.
"돈 쓰는 맛이 있긴 하네."
피식하고 웃으며 증권사 어플을 종료했다.
*
주말 아침부터 류성은 BMW135i에 올라탔다.
기분 좋은 승차감.
절로 그려지는 미소와 함께 시동을 걸고 하늘 보육원으로 출발했다. 애초에 후원할 때부터 자주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부와아앙!
근처에 도착하면서 길이 조금 험난해지긴 했지만 크게 문제는 없었다. 이윽고 도착한 보육원 입구 부근에 주차하고서 조금 걸어 올라갔다.
저 멀리 원장님이 보였다.
그녀는 예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류성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요즘처럼 행복할 때가 없답니다. 아이들도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 말에 류성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 이야기를요?"
"네. 거의 매일 이야기하는걸요."
"아하하..."
괜히 쑥스러워졌다.
"일단 들어가실까요?"
"아, 네."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보였다. 확실히 지난번보다 더 친근한 시선이었다. 특히 지난번에는 조금 거리를 두던 나이 있는 애들이 이번에는 먼저 다가왔다. 표정이 하나같이 밝아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안녕."
재밌는 건 초, 중학생이 그렇게 행동하니 그보다 어린 애들의 친밀함이 순식간에 급증했다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조금 데면데면하던 아이들이 류성의 근방을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전 음식 준비해야 하니까 애들이랑 조금만 놀아주세요."
"네, 그럴게요."
원장님이 주방으로 향하자마자 아이가 다가왔다.
"아저씨! 놀아주세요!"
"어어, 그래. 뭐하면서 놀까?"
"비행기요!"
"비행기?"
"네, 태워주세요!"
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 어릴 때 비행기를 타면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아, 비행기 태워줄게."
등을 바닥에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거 맞지?"
"네! 맞아요!"
그 상태에서 아이의 복부에 발바닥을 대고 하늘 높게 들어 올렸다.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양손을 가볍게 잡아줬다.
"끼햐아아아아!"
살짝 흔들어주자 더욱 좋아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목말 태우기는 물론이고 서울구경까지 시켜줬다.
"저도 서울구경 시켜주세요!"
"저도요!"
아이의 머리를 양 손바닥으로 잡고서 허공으로 들어 올려주면 그걸 그렇게 좋아라했다.
"서울구경 하자, 어때? 잘 보이지?"
"잘 보여요!"
"우헤헤헤헤!"
물론 류성이야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허억, 허억."
그래도 묘하게 즐거웠다.
이렇게 놀아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그 와중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둘이 류성의 주변에서 쭈뼛거리며 맴돌았다.
"힘들어하시잖아. 나랑 놀자, 나랑."
"언니랑 놀자, 알았지?"
은근슬쩍 류성을 도와줬다.
착한 애들이네.
그걸 보다가 문득 애들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후원을 하는 입장인데 이름 정도는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고등학생 둘에게 다가갔다.
"저기, 얘들아."
"네?"
"여기 애들 이름 좀 알려줄래?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름도 모르는 건 좀 그렇잖아."
"아, 네!"
먼저 남학생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도유종이라고 합니다."
"도유종, 고2구나."
옆에 있던 여학생이 이어서 소개를 했다.
"저는 고1이구요. 예지은이에요! 어, 그... 후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두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두 고등학생이 크게 인사를 해왔다.
"아니, 뭐..."
마음 같아선 다독여주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지금껏 못해왔던 기억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지만 그조차 어쩌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을 말이었다.
이 아이들의 인생을 모르기에.
괜한 짐작도.
거기서 비롯된 연민도 하등 필요 없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네!"
그렇기에 가장 단순한 말로 상황을 넘겼다.
"자, 그럼 다른 애들도 이름이랑 나이 알려줄래?"
"네! 여기 장난기 가득한 애가 중2고 이름은 박찬민이에요."
"박찬민입니다!"
"축구 잘할 것 같은데?"
"엇, 진짜로 축구 잘해요, 저!"
"오, 그래?"
"네!"
"다음에 축구나 같이 할까."
"헤헤, 좋아요!"
문득 궁금해졌다.
박찬민, 이 아이가 정말 축구에 재능이 있을까.
재능 관찰자.
그걸 쓰면 과연 어떻게 보일까.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이 적지는 않았다. 재능을 보고 그에 맞는 후원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인이 원한다면 말이다.
"저는 중1이고 이름은 김이나라고 합니다!"
일단은 소개를 듣는 게 우선이었다.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들을 때마다 메모장에 저장해뒀다. 그래야 외우기에 쉬울 테니까.
"다들 고마워. 자, 그럼 다시 놀아볼까?"
"좋아요!"
아이들과 놀아주던 와중에 드디어 음식이 완성되었다.
"와서 드세요."
냄새부터가 끝내줬다.
류성을 비롯한 아이들 전원이 넓은 거실 한편에 마련된 거대한 식탁으로 달려갔다.
"우와아아아!"
"대박!"
"엄마, 완전 최고!"
"어서들 앉아."
류성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거한 한 상이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많은 반찬과 먹음직스러운 메인 요리.
거기에 칼칼한 된장찌개까지.
"많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잘 먹을게요."
"다들 먹자꾸나."
"네! 잘 먹겠습니다!"
된장찌개를 먼저 먹어보는데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게 딱 류성의 취향이었다.
"크흐! 엄청 맛있는데요?"
"고마워요."
다른 반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야, 이것도...!
즐거운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
점심을 먹고 원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덕분이죠."
"아뇨, 돈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제 덕분이 아니라 원장님 덕분인 거죠."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아, 그리고 전에 말했었는데요. 혹시 다른 보육원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형편이 어려운 곳으로 말이죠?"
"그렇죠."
"알고 있는 곳이 두 곳 정도 있기는 해요. 거기 아이들이랑은 가끔 만나서 놀기도 하거든요."
"아, 그래요?"
"네."
덕분에 조금은 쉽게 형편이 어려운 보육원 두 곳을 알게 되었다.
아름드리 보육원.
희망찬 보육원.
두 곳에도 조만간 후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혹시 말이죠."
"네."
"애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조금 더 끌어내는 건 어떨까요? 각자가 꿈이나 목표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방향성이 다르다 보니 후원하는 방법도 좀 세분화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세분화요?"
"네. 예술이나 스포츠 선수를 목표로 하는 애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원장님의 눈이 커졌다.
"어... 그 부분은 솔직히 생각을 못 해봤네요."
"그런가요."
"으음. 하지만 좋은 말씀이에요. 지금까지는 애들이 그저 잘 먹고 잘 자라기만 해줘도 좋았으니까요. 아니, 그조차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원장이 류성을 직시했다.
"후원자님만 괜찮다면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원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죄송하게도 지금 당장은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꿈이나 목표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그냥 살아가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요. 말씀하신 부분은 시간을 내서 제대로 대화를 해볼게요. 원하는 목표도 확실하게 알아둬야겠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아무래도 재능 관찰자는 다음에 사용해야 할 모양이었다. 당장은 원장님과 아이들이 소통하면서 꿈과 목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기회는 세 번이니까.
한 번은 보육원 아이들의 재능 파악에 사용하면 될 테고 또 한 번은 류현아에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배우가 꿈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마지막은...
한 명의 아이가 떠오르긴 하는데.
"좋은 이야기 고마워요."
원장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아, 별말씀을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조용히 보육원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저기...!"
"음?"
"이거요!"
"저두!"
도유종과 예지은 두 학생이 어떻게 알고는 뛰쳐나와 류성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귀여운 종이봉투였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또 놀러 오세요, 꼭...!"
"어어, 그래. 고맙다."
일단 조심스레 챙기고서 보육원을 빠져나왔다. 근처에 주차된 차량에 올라탄 후 종이봉투를 꺼냈다.
바스락.
뭔가 아련한 감촉과 함께 봉투 안에서 편지지가 나타났다.
"아...!"
설마 편지였을 줄이야.
이런 걸 받아본 게 도대체 언제인지 생각도 나질 않았다.
특히 요즘 시대는 더욱 그러했다.
"신기하네."
문자랑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휴대폰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직접 손으로 썼는지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구치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건지 모를 기묘한 무언가가 자꾸만 가슴을 간질였다.
"편지라."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적은 단어가 문장을 이뤘다. 그것들이 전해주는 감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심장 부근에서 꿈틀거렸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서 할게요.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해서 저희한테 후원해주신 거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겠습니다! 그리고...]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글자들의 향연이었다.
고마웠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류성의 속에서 피어났다.
...많은 걸 받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