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의 무게(1) >
아름드리 보육원과 희망찬 보육원.
두 곳에 연락을 넣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통화로만 얘기해서 죄송하네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다음에 꼭 찾아뵐게요."
(네, 고맙습니다!)
그곳에도 250만 원씩 정기후원을 이어가기로 했다.
[연계퀘스트 ‘어서와, 정기후원은 처음이지?’가 갱신됩니다.]
[정기후원 금액 : 3,000만 원]
덕분에 정기후원 금액이 이제 3천만 원에 달했다.
현재 지닌 자산이 20억.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제 뭘할까 싶은 그때.
오랜만에 이모티콘 담당자인 최연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완전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완전 잘 지냈죠. 작가님도 잘 지내셨나요?)
"엄청요."
(다행이에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직접 만나 뵙고 싶어서요.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실까요?)
전에 문자로 보냈던 그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좋은 소식으로 연락을 주겠다던.
"네, 괜찮아요."
(그러면 제가 작가님 계신 동네로 갈게요.)
"음, 아뇨. 제가 갈게요. 저희 동네는 맛집이 별로 없어서요."
(어, 그러면 저야 감사한데...)
"언제까지 가면 될까요?"
(지금 오후 5시니까 6시에 뵙는 거로 할까요?)
"좋네요."
(그러면 제가 맛있는 식당으로 예약해둘게요!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구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5분 정도 기다리니 문자가 왔다.
장소가 적혀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기에 천천히 외출 준비를 했다.
약간 설레는 기분이었다.
설레발은.
실없는 상념을 지우며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크흐."
멀리서부터 그린블랙의 독특한 색깔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멋있다, 멋있어."
흡족함을 감추지 못한 채 BMW135i 차량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메시지에 적힌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부와아앙.
출발하고서 30분 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당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잡은 최연수가 보였다.
"작가님, 여기요!"
"아, 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인사부터 했다.
"요즘 바쁘시죠?"
"어... 글쎄요."
딱히 바쁘진 않은데.
"매일 매출표 보시느라 바쁘실 거 같은데요?"
"아아, 그런 면이 있죠. 볼 때마다 숫자가 올라가니 재밌더라구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새로고침만 누르게 된다니까요."
간단한 대화만 이어가도 즐거웠다. 워낙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지금도 근처에 앉아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식사하기 전에 얘기하는 게 좋겠죠?"
"네, 그게 편할 거 같네요."
최연수가 본론을 꺼냈다.
"그럼 본론부터 말씀을 드릴게요. 음, 일단 지금 이모티콘 매출이 상당히 잘 유지되고 있는 건 아시죠?"
"대충은요."
"일단 작가님 생각 이상으로 이모티콘이 인기가 좋거든요."
"신기하네요."
물론 나름 잘 그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잘 나갈 수준인가,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운이 많이 따라준 것도 있어요."
"아, 그래요?"
"네, 빈집털이라고 하죠? 타이밍이 좋았거든요."
조금은 납득이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려고요."
"제안이요?"
"네, 예상하셨겠지만 반응이 정말 꾸준한 편이라서 다른 방향으로도 상품화를 진행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일단은 간단하게 스티커부터 시작해볼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티커라..."
"여러모로 사용하기에 편하다보니 구매력이 강한 편이거든요."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저야 반대할 이유가 없겠네요."
"그럼 진행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이번에는 첫 상업화라서 꼭 직접 뵙고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축하드려요, 작가님."
그제야 불러낸 이유를 깨달았다.
하긴, 통화로 해도 될 일이었지.
상업화에 관한 내용 역시 계약서에 적혀 있었으니까.
"고맙습니다."
"헤헤, 그럼 오늘도 배터지게 먹어볼까요?"
"좋죠."
이후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저녁을 즐겼다.
*
정말 맛있게 밥을 먹고 최연수와 헤어졌다. 류성은 바로 집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기왕 온 김에 근처 번화가나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 오는 장소인 만큼 또 어떤 새로운 상황을 만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약간의 기대감이 솟구쳤다.
저벅.
얼마나 걸어 다녔을까.
"아이구야..."
오른쪽 골목길에서 들려온 지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의 초입부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서둘러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몇 개의 계단을 성큼 내디뎌 할머니의 지척에 도착한 류성이 조심스레 불렀다.
"할머니, 도와드릴까요?"
"으응?"
"짐 이리 주세요."
"아이고, 고마워요. 근데 괜찮아. 여기가 계단이 워낙 많아서 올라가기 힘들어요."
"저도 괜찮아요. 아니면 근처에 자동차 있는데 타고 가실래요?"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어서 안 돼요. 차 타고 가려면 너무 돌아가야 해서."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휴, 정말 무거울 텐데..."
할머니가 더 힘들 게 분명한데도 미안한 마음에 계속 거절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류성이 손을 뻗어 두 개의 짐을 끌어당겼다.
"이리 주세요."
그제야 할머니가 마지못한 듯 손을 놓았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고마워요, 정말."
"이 정도야 거뜬하죠."
말과 달리 류성의 팔뚝은 힘줄이 불끈거렸다.
왜 이렇게 무거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으며 첫걸음을 내뻗은 순간이었다.
[퀘스트 발동!]
[작은 호의가 누군가를 웃게 만든다.]
[상당한 무게의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려는 할머니가 보인다. 관절염이 있어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통증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주와의 약속이 더욱 중요했던 걸까. 더는 지체할 수 없다며 무릎이 시린 고통을 인내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를 도와라.]
[남은 시간 : 60분.]
[성공 보상 : 랜덤 카드, 선행 포인트.]
[퀘스트 실패시 계단에서 넘어집니다.]
오랜만에 떠오른 일상 퀘스트였다.
다만, 웃을 수는 없었다.
고통을 인내하기로 마음먹은 할머니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고개를 털어내고 할머니에게 집중했다.
"할머니, 근데 짐이 왜 이렇게 무거워요?"
"무겁죠? 김치가 많아서 그래요."
"아아, 김치요? 맛있겠네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아삭한 식감, 매콤함.
시원스레 올라오는 그 특유의 감칠맛까지.
"손주 녀석들 맥이려고 많이 들고 오긴 했는데 잘 먹을지 모르겠어요."
"잘 먹을 거예요. 저도 어릴 적에 할머니가 해주신 김치를 제일 좋아했거든요. 지금도 명절마다 뵈러 가면 항상 김치를 한가득 들고 올 정도거든요."
"아이고, 그랬어요?"
"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추석이기도 하네요."
"맞아요, 추석."
친척들이 전부 모이는 날이다.
시간이 참 빨랐다.
9월 말일이면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았고.
잘들 지내고 계시려나.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고 싶었고 사촌 동생들 근황도 궁금했다. 가끔 문자를 주고받거나 연락을 하고는 있지만 얼굴을 보는 것과는 달랐으니까.
뭐, 가보면 알겠지.
그때 할머니가 잠깐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고..."
아무래도 무릎이 아프신 모양이었다. 류성은 서둘러 짐 두 개를 오른손에 몰아넣은 뒤 왼손으로 할머니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괜찮아.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부축해드릴게요."
할머니가 미소를 머금었다.
"요즘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너무 드물어서 더 마음이 가네, 그려."
"감사합니다."
"바쁘지는 않고?"
"전 괜찮아요. 근데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류성은 알면서도 물었다.
"손주 녀석들이랑 약속해서 그래요."
"이렇게 아프신데,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요? 손주분도 이해할 겁니다."
"언제 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래요."
"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서두르라고 재촉할 수도 없었고 그러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짐을 들고 또 할머니를 부축할 뿐이었다.
"여기 계단이 참... 많네요."
"이 동네가 좀 그래요. 내려갈 때도 고생일 텐데."
"저는 내려가는 건 안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조심해야 돼요, 내려갈 때가 무릎 관절에는 더 안 좋을 수가 있어요."
"그러면 조심할게요."
그래도 이제 절반은 걸어왔다.
목표가 머지않았다.
중간중간, 조금씩은 쉬어도 되건만 할머니는 끝까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끝내 계단을 정복했다.
드디어 평지에 이른 것이다.
"끝까지 들어드릴게요."
"아이고, 무거울 텐데..."
"거뜬합니다, 이 정도는."
머지않아 파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정말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들어가세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짐을 전해드리고 드높았던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고맙다며 어깨를 쓰다듬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
차량에 올라 보상으로 받은 카드를 사용했다.
물음표로 가득 찬 세상.
이제는 익숙해진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하나 뻗었다.
투욱.
선택한 카드가 날아들었다.
선명해지는 감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실존으로 나아가는 현상. 어느새 손바닥 위에는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리병 하나가 창조되었다. 거기에 담긴 액체 역시 유리병처럼 투명했다.
[최하급의 ‘신체’카드를 택했습니다.]
[보상으로 ‘노화 회복 물약(하급)’을 지급합니다.]
[상점이 갱신됩니다.]
[해당 재능이 상점란에 추가됩니다.]
보상을 보는 순간 예전 일이 떠올랐다.
체력 강화 물약.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능력을 지닌 것으로 추정이 되었다.
[노화 회복 물약(하급)]
[인간은 세월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노화가 발생한다. 해당 물약은 그 세월을 소폭 비껴가게 만들어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린다. 한 방울만 마셔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 같은 등급의 물약으로는 두 방울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없다.]
잠시 설명을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처음에는 단순한 노화 회복 물약인 줄 알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세월을 비껴가게 만든다는 문구와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린다는 설명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노화로 발생한 병증까지 되돌리는 걸까.
그러면 말도 안 되는 물약인데.
문득 이 물약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져서 바로 상점을 확인해봤다. 기타 물품 5번에 노화 회복 물약이 새롭게 추가된 상태였다.
5. 노화 회복 물약(하급)
필요 선행 포인트 : 200
가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비쌌다.
무려 200포인트였다.
구매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구매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격으로 생각해보면 절대 평범한 능력을 지닌 물약은 아니었다. 일단 근처 1,000원 마트에 들러 스포이트를 구매했다. 다시 차량으로 돌아와 스포이트로 물약을 아주 소량만 끌어당긴 뒤 입으로 가져갔다.
톡, 토옥.
정확히 두 방울을 입안에 떨어트렸다.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미리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정말 미세한 수준이었다.
차량 거울을 확인했다.
피부가 조금 더 탱글탱글해진 기분이었다.
밝아진 것도 같고.
뭔가 생기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최근 욱신거리던 허리 통증도 사라진 것 같았다. 정확한 원리나 그런 건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보통 값진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류성은 흥분으로 얼룩진 시선으로 유리병을 쳐다봤다.
"이 정도 양이면..."
가족, 친척을 전부 다 먹이고도 절반은 남을 양이었다.
보물이 손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