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치를 부리다(2) >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페닌슐라 호텔로 이동했다.
체크인을 하고 들어선 룸.
거실에서 보이는 뷰에 탄성이 먼저 새어나왔다.
"우와...!"
어느 한 사람 빠짐없이 모두가 같은 반응이었다. 양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눈을 크게 뜨며 창가로 향했다.
"어이구, 무셔라. 이게 뭐여?"
"경치가 끝내주는구만."
"저기, 저게 전부 건물인 거지?"
"이쁘네, 이뻐."
밤인데도 맞은편 하버시티의 불빛이 강렬해서 강이 훤히 보였다. 강을 따라 내려앉은 화려한 도시가 시선을 강탈했다.
"뷰도 엄청나고 방도 너무 좋다."
"어머...!"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에는 슈페리얼 디럭스 룸의 화려함에 눈이 돌아갔다.
"대박, 대박!"
류현아가 방방거리며 방을 돌아다녔다.
넓은 거실.
화려한 4개의 방과 각 방마다 놓인 킹 사이즈의 침대까지.
"침대 엄청 편해!"
탄탄하면서도 탄력적인 침대였다.
이미 늦은 저녁.
호텔 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
침대가 좋아서였을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고 일어났다. 피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우, 개운하네."
상쾌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드라큘라 스튜디오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류성 작사가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선 결과가 홈페이지에 걸린 상태지만 최우수상에 당선이 되셔서 직접 안내드리고 있거든요. 다음 주에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인데 참여 가능하실까요?)
"그럼요, 참여해야죠."
(감사합니다. 당선 다시 한 번 축하드리고 시상식에서 뵙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통화를 끊자마자 긴 숨을 토해냈다.
"후아아. 진짜로 당선이 될 줄이야."
그것도 무려 최우수상이었다.
대상이 아닌 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최우수상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OST에 포함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일단 제대로 된 확인을 위해 드라큘라 스튜디오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앱플릭스 드라마 OST공모전 축 당선!]
떠오른 팝업을 클릭하자 수상자 목록이 떠올랐다.
대상(1명) : 작사가 <율리아>
최우수상(1명) : 작사가 <류성>
우수상(3명) : 작사가...
그 아래로 우수상이 주르륵 나열되었지만 류성의 눈에는 최우수상 하나만 딱 보였다.
작사가, 류성.
거기서 오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신기하네."
이런 게 바로 인정받는 기분인 걸까. 비록 퀘스트의 도움을 받은 거라고는 하지만 그또한 이제는 류성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래, 내가 좋으면 된 거지."
홍콩에 여행을 온 좋은 날에 행복한 소식이 들려왔으니.
이 기분을 그저 즐기기로 했다.
*
호텔 조식을 함께 먹으면서 작사 공모전에 참여한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작사 공모전?"
"네, 거기 참여했는데 최우수상에 당선이 되었더라고요."
아버지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가 나온다는 얘기냐?"
"맞아요."
"신기하구나. 아무튼 축하한다. 예전에 말했었지,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겠다고."
"아, 그런 말을 했었죠."
"그 말처럼 되어가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고마워요, 아버지."
"아들, 축하해."
"이야, 형. 작사도 했어? 대단하네."
"하하..."
모두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특히 양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정말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이어서 괜히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내 새끼, 고생했다."
"장하기도 허지."
그 와중에 한 사람, 류현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증거, 증거부터 보여줘야지!"
"자, 봐라."
류성이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수상자 목록]
최우수상(1명) : 작사가 <류성>
화면에 떠있는 수상자 목록을 확인한 류현아가 눈 끝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거 앱플릭스에 방영되는 드라마 아냐?"
"맞아. 나중에 방영한다던데."
"허얼...!"
아무래도 배우가 꿈인 녀석이라 다가오는 충격의 정도가 더 강한 모양이었다.
"진짜 오빠 노래가 앱플릭스 드라마에 나온다고?"
"나오겠지."
"너, 너무 부러워어어억!"
발광하는 류현아를 빤히 바라봤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철부지 여동생에게 과연 연기에 대한 재능이 있을 것인지 말이다.
그래, 한 번 써보자.
‘재능 관찰자’를 여동생에게 사용해보기로 했다. 애초에 가족에게 사용하기로 다짐했었으니까. 이참에 어떤 방식으로 발동하는지 제대로 파악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재능 관찰자.
의지를 발휘하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재능 관찰자'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네를 누르자 두 눈에 기이한 힘이 서렸다.
[사용횟수가 3회->2회로 줄어듭니다.]
류현아의 머리 위로 몇 가지 단어와 등급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잠재력]
끈기(A급) 연기(-A급) 노래(B급) 사업가의 기질(B급) 인내(-B급) 체력...
생각보다 재능의 가짓수가 많았다. 그래도 파악이 어렵지는 않았다. 앞에 있을수록 재능의 등급이 높았고 뒤에 있을수록 등급이 낮은 까닭이었다.
제일 높은 게 '끈기'였다.
그다음이 '연기'였고.
한 마디로 지닌 재능 중에서는 연기의 재능이 최상위급이었다.
신기하네.
확인을 마칠 즈음 새로운 게 떠올랐다.
[총평]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가 될 소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니 훨씬 보기에 편했다.
그보다, 진짜 재능이 있구나.
저 녀석이 엔터테이너가 될 소질이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했지만 못믿을 건 또 아니었다.
스윽.
슬쩍 고개를 돌려 류환을 쳐다봤다.
[잠재력]
창의력(A급) 굳건함(-A급) 인내(B급) 제조(B급) 디자인(B급) 이미지화...
묘하게 자동차 디자인이랑 잘 어울리는 재능들이었다.
[총평]
아이디어가 톡톡튀는 디자이너가 될 소질을 갖췄습니다.
이걸 보고 있으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닌 재능대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살아가는 대로 재능이 발전해버린 걸까.
갑작스레 떠오른 상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부모님과 양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
떠오른 재능이 시선을 자극했다.
총평 또한.
머지않아 류성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가진 재능을 포기하고.
지니지 않아도 될 어른으로서의 태도를 겸비하며 살아온 삶이 보였다.
목표를 지우고 많은 것을 희생한 선명한 자국들이 보였다. 꿈을 지운 채 아버지이자 어머니로 지내온 흔적들이 보였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에서 삶의 태반을 내려놓은 삶이었다.
그래서 볼 수가 없었다.
많은 상념이 흘렀다.
그러나 다시금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든 류성은 밝게 웃고 있는 부모님과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머금은 부모님의 부모님을 보고야 말았다.
...행복해 보이셨다.
그래, 어찌 저런 단어 몇 개로 그간 살아온 인생 전부를 나타낼 수 있으랴.
저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릴 적부터 보아왔기에.
바로 옆에서 함께 했기에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타고난 재능이 삶을 정하진 않는다.
다만.
살아온 삶이 숨죽이고 있는 재능을 깨우기도 한다. 저분들은 가진 재능을 포기한 게 아니라 그저 새로운 재능을 만들어오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
생각보다 조식 뷔페가 맛있었다.
"입맛에는 맞으세요?"
"그럼. 색다르면서도 아주 맛있구나."
"다행이네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고기 종류도 부드러워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고 종류도 다양해서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었다.
"이것도 맛있어!"
"으흠."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이고 동생들도 만족한 모습이었다. 특히 류현아는 배가 빵빵해 부풀어 올챙이처럼 보였다.
"으어어, 배불러어어."
"바지 터지겠다, 너."
"안 터지거든?"
"아니면 배가 터지거나."
"후웁, 후우. 아니라고...!"
숨 쉬기도 어려워보이는데.
뭐,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나가서 구경하다보면 금방 배가 꺼질 터였다.
"이제 근처 구경이나 하러 가볼까요?"
"오냐, 며칠 전부터 관절이 편해서 한참 걸어도 좋을 거 같구나."
"영감도 그렇지?"
"응, 요즘 너무 좋아."
류성은 모른 척하며 앞장섰다.
미리 알아본 루트가 있었다.
여기에 왔으면 일단 쇼핑과 예술은 기본이라는 글을 봤었다. 특히 최근 홍콩에 부는 예술 바람을 다 같이 느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보다, 어떻게 움직이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아버지가 다가왔다.
"이동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 글쎄요. 이제 생각을 좀 해보려고 했죠."
"호텔에 문의해보면 될 거다."
"호텔이요?"
"그래. 공항에서 여기 올 때도 리무진 타고 왔으니까. 관광할 때도 고객 전용으로 태워다주는 차량이 있을 거야. 물론 지금 우리가 지내는 룸이 비싸니까 가능한 거고."
"아아..."
"내가 연락할까?"
"아뇨,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해볼게요.“
"그래, 알겠다."
류성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카운터에 전화를 걸었다.
(네, 고객님. 담당 서버, 김하율입니다.)
담당 서버가 한국인이라 대화하기에 편했다.
"문의 좀 하려고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외출을 하려는데 차량 요청이 되나요?"
(물론입니다. 외출 나가시는 총 인원을 알 수 있을까요?)
"아홉 명이요."
(그럼 리무진 차량으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몇시까지 대기시켜 놓을까요?)
심지어 리무진이었다.
상당하네, 진짜.
이런 게 바로 비싼 룸에서 머무르는 특급 대우인 모양이었다.
"음, 한 10분 뒤에 나갈 거 같은데 가능할까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더 필요하신 부분 있으실까요?)
"아뇨,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궁금한 거나 불편한 점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십시오. 항상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 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이 또한 서비스일 테니까.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어떻게 이동할지 고민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이제 나갈 준비만 하면 되었다. 간단하게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니 다들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요."
"그러자꾸나."
호텔 1층으로 내려가 정문을 나서자 그 앞에 리무진 차량 한 대가 보였다. 운전하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담당 서버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류성 고객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요청하셨던 차량입니다. 바로 탑승하시면 됩니다. 운전하는 분도 한국말이 가능한 분이니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서버가 차량의 문을 열어줬다.
"아이고, 이거 참."
"고마워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인사하며 차량에 탑승했다. 서버 또한 그 인사에 밝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즐거운 관광 되십시오."
"네."
류성을 마지막으로 가족 모두가 차량에 탑승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음, 일단 배도 꺼트릴 겸, 가볍게 뮤지엄부터 가보죠."
"뮤지엄 오브 아트 말씀이시군요."
"네, 맞아요."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차량이 출발했다. 이후 고요한 가운데 어색함이 조금 사라지고서야 가족들은 리무진의 편의성을 즐겼다.
"음료도 있구먼."
"간식도 맛있고. 하나 먹어 봐, 영감."
"이가 아파서 힘들어."
"이건 물렁혀."
"그려...? 그럼 하나만 먹어볼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간식을 드셨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음료를 마시며 리무진을 누렸다. 어머니와 류현아는 창문 밖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기에 바빴다.
"와, 건물들 봐...!"
"엄청 높네."
"큼직하기도 하고 서울이랑 느낌이 묘하게 다르긴 하다. 그치, 엄마?"
"그러게."
당장은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게다가 이 리무진.
승차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리무진 대박! 차가 진짜 좋아...!"
류환은 역시나 리무진 자체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뭐,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호화로운 서비스라니.
제대로 돈을 쓴 여행다웠다.
*
침사추이 해변 산책로 앞에 위치한 뮤지엄 오브 아트에 도착했다. 리무진은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허허, 엄청나구먼."
"아이고, 넓고 좋네. 저기 조각상 보여?"
"그럼."
"예전엔 저런 조각상이 길마다 참 많았는데 말이여. 요즘엔 조각가들이 전부 없어졌나, 보이질 않어."
독특한 조각상이 외부 전시장에 놓여 있었는데 확실히 눈길이 갔다.
어릴 때는 그랬다.
시장에 가면 토끼 조각상, 다람쥐 조각상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전혀 보이질 않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이구, 멋있네, 멋잇어."
"산책로도 너무 좋아서 잘 어울리는구먼."
"이런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류현아, 류환은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유독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즐겁게 감상을 했다.
"좋구먼, 좋아."
류성도 조각상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멋지네.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게 조각상에 서린 것 같았다. 이상하게 눈길이 가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띠링!]
퀘스트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