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누구인가?(1) >
류성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얼만데?”
그 말에 놀란 류현아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렇게 쉽게 도움을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짜로 빌려주려고?”
“아니지, 그건.”
“으응? 그럼...?”
“가족인데 뭘 빌려 줘. 그냥 보태주는 거지.”
류현아가 조금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껴안을 것처럼 양팔을 벌리는 녀석.
“오빠...!”
“거기까지만 해라.”
“크흠, 그럴까.”
팔을 내리면서 자리에 앉은 류현아가 말을 이어갔다.
“학원마다 비용이 많이 다르긴 한데...”
“제일 좋은 곳으로.”
“어?”
“유명한 배우였던 사람이 운영하는 곳도 괜찮을 거고. 아니면 아직도 현직에 종사하는 분이면 더 좋겠지. 학원 운영하는 배우들도 몇 명 있다고 본 거 같은데. 그런 곳 없나?”
“있지, 있긴 한데...”
가격이 꽤 비싼 모양이었다.
“거, 참. 뜸을 너무 오래 들이는 거 아니냐?”
“으으...!”
아무래도 금액이 크다보니 미안한 모양이었다.
참, 나.
어울리지 않게 왜 저러는지.
“아, 됐다, 됐어.”
류성은 그냥 류현아의 계좌번호로 돈을 입금해버렸다.
“돈 보냈으니까 확인이나 해. 그거면 한동안은 충분하겠지. 부족하면 말하고.”
“어, 어어.”
금액을 확인한 류현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무려 500만 원을 보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오빠. 이건 너무 많은데?”
“몇 달 미리 끊어. 참고로 어느 학원인지 몇 달이나 배우는 건지 그리고 강사는 누군지. 그런 부분은 제대로 확인할 거니까 알아두고.”
“아, 당연하지! 학원 끊고 영수증 바로 보여줄게! 나머지야 학원 이름만 쳐도 나올 테니까.”
“오냐.”
류현아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주먹을 쥐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러던가.”
이 정도 용돈이면 충분히 대접받을 자격이 있었다. 류성은 남은 라면을 깔끔하게 처리하고서 거실로 나가 럭키와 함께 TV를 봤다.
크큭, 웃기네.
오랜만에 달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류현아가 다가왔다.
“오빠, 내가 과일도 깎아줄까?”
“아니, 됐거든요.”
“그럼 어깨라도 좀 주물러줄까?”
“음? 그건 좋지.”
상체를 일으키자 류현아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꾸욱, 꾸욱.
생각보다 아귀힘이 좋았다.
“어때? 시원해?”
“어어, 좋네.”
“어디가 젤 시원한데?”
“어깨랑 목이랑, 두피.”
“내가 또 마사지 실력이 끝내주지. 다 풀어줄게!”
“오냐.”
“어우, 거북목. 어깨도 좀 펴고!”
“으어어...”
어떻게 주무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원했다.
*
오랜만에 논다고 생각해서인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토요일이라.
운동도 쉬는 날이라 일단은 집에서 뒹굴뒹굴하기로 했다.
“럭키야, 놀자!”
물론 럭키와 함께 말이다.
냐아아앙?
소파에 누워 30분 정도를 계속 귀찮게 하니까 럭키가 냥냥펀치를 한 대 날리고는 구석진 곳에 숨어버렸다.
“크흠. 너무 귀찮게 했나?”
할 일이 없어진 류성은 럭키를 슬쩍 바라보다가 인터넷 쇼핑을 했다.
고양이 놀아주기.
그렇게 검색을 하니 다양한 글이 나왔다.
오호라.
그러다 눈에 보인 물건 하나.
캣휠이었다.
고양이가 집안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게 해주는 기구였다. 곧바로 캣휠을 검색해 쇼핑몰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무소음에다가 디자인도 예쁜 캣휠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가격은 47만 7,500원.
이제 이 정도 가격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준이 되었다.
곧바로 결제를 진행했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쇼핑도 끝났고.
할 거 없나.
다시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심심한데.
고민하던 와중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체스 재능.”
이참에 한번 사용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체스가 있으려나.
스토어에 들어가 체스를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체스게임이 떠올랐다. 그중에 가장 평점이 높고 다운로드 숫자가 많은 어플을 확인해봤다.
[글로벌 체스]
평점 4.9
1억회 이상 다운로드
[게임 소개]
전 세계 체스인들이 실시간으로 만나 체스를 둘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스 플레이어들과 대국을 즐기세요.
더 볼 것도 없었다.
류성은 글로벌 체스를 내려받았다.
금방 다운이 완료되었다.
“재밌겠는데.”
은근 기대가 되었다. 어플에 접속해서 간단하게 아이디를 만들자 곧바로 대국할 수 있는 실시간 매칭 버튼이 나타났다. 류성은 해당 버튼은 눌렀고 잠깐 기다리자 누군가와 매칭이 되면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체스판이 보였다.
그 위로 말이 놓였다.
가장 아래쪽 왼쪽부터 룩, 나이트, 비숍 순으로 양쪽이 대칭되도록 놓였고 중앙에 남은 두 칸에는 퀸과 킹이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줄에 일반 병사인 폰이 한 줄로 나란하게 위치했다.
[START]
이어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상대가 백이었다.
가볍게 몇 개의 폰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진영을 구축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상대의 나이트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니 괜찮은 수가 보였다. 폰을 희생해서 나이트를 잡아낼 수 있는 괜찮은 수가 보였다.
음, 그러니까.
상대 나이트가 다시 움직여서 폰을 먹으면 내가 비숍으로 나이트를 먹는거지.
“흐흐, 좋은 수였다.”
류성은 만족하며 게임에 집중했다.
그런데.
수가 진행되면서 점점 진영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놓치는 부분이 나타났는데 상대는 그걸 여지없이 물어뜯었다.
“아...”
상대의 나이트가 류성의 비숍을 집어삼켰다.
툭하고 부러지는 비숍.
화면에서 비숍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백의 나이트가 차지했다. 새하얀 나이트를 잡아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 폰을 앞으로 한 칸 밀어내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텐데. 그 한 번의 실수가 진영을 무너트린 것이다.
백의 나이트가 흑의 진영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댔다.
결국, 기물이 점차 사라졌다.
류성의 흑색 기물이 몇 개 남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상대는 결코 봐주는 법이 없었다. 끝까지 숨통을 조여왔다.
[체크.]
왕의 목으로 칼날이 드리워졌다.
비숍이었다.
대각선으로만 움직이는 비숍을 피하고자 킹을 좌측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대가 룩으로 압박해왔다.
[체크.]
이번에도 피했다.
하지만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류성도 보였으니까.
두 차례만 더 진행되면 체크메이트가 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체크.]
폰이 다시 압박을 해오고.
한 번 더 피하자.
상대의 퀸이 무섭게 돌진해왔다.
[체크메이트.]
게임이 끝나버렸다.
“후우, 역시 어렵네.”
오랜만에 했더니 더욱 그러했다.
머리도 굳은 거 같고.
예전에는 그래도 몇 수 앞은 충분히 보였는데 이제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도리어 어려워서 그런지 더 흥미로웠다.
몇 판을 더 본인의 힘으로 해봤다.
전부 패배였다.
아무래도 실시간 매칭이다 보니 비슷한 실력끼리 묶이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상대방의 아이디를 클릭해보면 하나같이 레벨이 기본 90대였다.
“흐음.”
이제는 재능을 사용해보기로 했다.
[재능 ‘체크메이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15시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간 시간이 누적되어서 15시간이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길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사용을 수락하고서 매칭을 눌렀다.
[매칭 중...]
머지않아 실시간 매칭이 잡혔다.
이번에도 류성이 흑이었다.
말이 체스판 위에 자리를 잡고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보이지 않던 길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해당 기물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야 할 길, 갈 수 있는 길, 그리고 가게 되면 벌어질 다양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마치 영상처럼 생생했다.
타악.
그때, 상대가 폰을 내보냈다.
류성의 머릿속으로 재밌는 수가 그려졌다.
이거, 괜찮겠는데.
곧바로 우측 나이트를 움직였다.
직선, 그리고 대각선.
류성의 나이트가 일반 병사인 폰보다 선두에 위치하게 되는 기묘한 진영이었다. 그대로 게임을 진행하면서 은근슬쩍 상대의 말을 유도했다. 상대는 예상대로 폰을 한 칸 내밀면서 류성의 나이트가 움직일 경로를 방어했다.
류성은 남은 왼쪽 나이트를 다시 앞으로 보냈다.
타악.
다음은 중앙에 놓인 두 개의 폰을 밀어냈다. 폰이 움직이면서 생긴 비어버린 공간으로 마지막 비숍을 보냈다. 그 모든 수에 반응하는 상대의 기물. 하지만 그조차 이미 머릿속으로 그려낸 장면과 다를 게 없었다.
*
루이는 주말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오, 피곤해.”
그는 현재 20대 초반의 나이로 체스에 취미를 두고 있는데 각종 대회에 참가해 레이팅 점수를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지금은 1,917점으로 283점만 더 모으면 CM, 그러니까 세계체스연맹인 FIDE에서 발행하는 캔디데이트 마스터 칭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몇 년이면 GM도 가능하겠지.”
총 2,500점을 얻으면 FIDE로부터 그랜드마스터(GM)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을 수 있으리라.
물론,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흐흐, 다음 대회에선 무조건 우승해야지.”
루이는 침대에 누워 히죽거리다가 스마트폰을 꺼내어 ‘글로벌 체스’에 접속했다.
역시 주말에는 이게 최고거든.
편안하게 누워서 체스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볍게 게임을 즐기면서 경기력도 유지하고 휴식도 취하는 좋은 방법이랄까. 루이는 어플에 접속된 걸 확인하고서 바로 실시간 매칭 버튼을 눌렀다.
[LODING...]
머지 않아 매칭이 잡혔다.
“음?”
근데 상대방 아이디가 낯설었다.
신입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디를 눌러보니 레벨이 겨우 1이었다.
“허, 참. 이게 문제라니까.”
글로벌 체스는 다 좋은데 매칭이 너무 무작위였다. 물론 대부분이 고인물이고 실력자라 크게 상관은 없는데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매칭이 잡히면 짜증이 나고는 했다.
“쯧, 빨리 끝내야겠네.”
서둘러 게임을 끝내기로 했다.
이런 게임은 휴식도 아니었고 경기력 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시작부터 흑의 수가 이상했다.
“큭, 진짜 황당하네.”
이건 뭐, 초보자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수가 진행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루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
누워있던 자세도 풀었다.
상체를 일으킨 채로 체스 게임에 제대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진영은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들어온 상태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때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수를 썼다.
퀸을 움직여 폰을 잡은 것이다.
“미친.”
절로 욕이 튀어나올 정도의 어이없는 수였다. 폰의 대각선 뒤쪽에 킹이 위치한 상태였기에 당장 킹을 움직여 퀸을 집어삼켰다.
일반병사를 희생해 상하좌우,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퀸을 잡은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솔직히 평소였다면 게임이 끝났다고 여겼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이 자꾸만 경고성을 보냈다.
위험하다고.
마치 포위망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에 솜털이 곤두섰다.
상대가 수를 이어갔다.
나이트를 움직였는데 그 위치가 절묘했다.
[체크.]
루이는 킹을 상대방 진영으로 한 칸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나머지 공간은 전부 손해로 이어지는 진영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손이 멈칫거렸다.
이게, 맞는 거겠지.
다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았다.
그래, 맞아.
의심하지 않은 채 킹을 보냈다.
다시 흑의 차례였다.
이번에는 상대방이 폰 하나를 앞으로 보냈다.
그러자 비숍이 드러났다.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비숍이 정확하게 킹을 노리는 상태가 되었다.
[체크.]
다시 왕을 앞으로 보내야 했다.
대각선 앞으로.
그러자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상대의 오른쪽 폰이 두 칸 앞으로 나오면서 킹을 압박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뒤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상대의 비숍과 나이트 두 마리가 절묘하게 나머지 공간을 막아버린 상태였으니까.
“뭐냐고, 이거...!”
다시 킹을 앞으로 보내자 이번에는 상대가 차를 움직였다.
[체크.]
또다시 체크가 되었다.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루이의 눈에도 보였던 것이다.
“졌어...”
두 수만 더 이어져도 체크메이트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