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누구인가?(2) >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레벨은 분명히 1이었다.
우연일지도.
그래서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킹을 앞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나이트 한 마리가 압박을 해왔다.
[체크.]
피할 수 있는 위치는 오직 하나, 상대방 진영뿐이었다.
왕이 또 한 걸음 나아갔다.
흑이 남은 비숍 한 마리를 대각선으로 쭈욱 밀어 보내면서 킹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 하나를 막아버렸다. 동시에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흑의 차가 왕을 노리는 형국이 되었다.
[체크메이트.]
그걸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모든 방향이 막힌 것이다.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욕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말이 되냐고, 이게!"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건 실력 차이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도리어 상대가 궁금해졌다.
본인도 모르게 메시지를 보내버렸다.
-Who r u?
답장을 기다리면서 잠깐 게임을 복기한 그는 충격에 빠졌다.
모든 게 노림수였다.
한 마디로 상대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그려낸 것이었다.
“GM인가...”
상대는 아마도 GM, 그러니까 그랜드마스터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기분 좋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와우...”
그것도 생각한 그대로였다.
퀸을 희생하면서 그려낸 그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완성되었다.
마지막 한 수를 위해 쌓았던 빌드업.
상대를 유도하기 위한 수들.
방심과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긴장감.
그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풀어진 순간 터져버린 희열.
그리고 체크메이트.
그 단어 하나가 선사한 깊은 여운이 아직도 이어졌다.
살이 떨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극도의 흥분이 휘감겼다고 해야 할까.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구석진 곳에 느낌표가 떴다. 아니, 진즉에 반짝이고 있었는데 이제야 발견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리라.
뭐지?
손가락으로 터치하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Who r u?
누구냐고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방금 전 상대인가?
고민해봤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대답해줬다.
-Ryu.
류성의 류를 알려주고서 메시지창을 닫았다.
흐음, 그보다.
이대로 게임을 끝내기는 아쉬웠기에 다시 실시간 매칭 버튼을 눌렀다. 상대가 잡히고 체스판과 기물이 화면을 채웠다. 곧이어 시작된 게임 속에서 류성은 전장의 지휘관이 되었다.
[체크메이트.]
당연하게도 승자는 류성이었다.
몇 판을 더 했을까.
갑자기 화면에 메시지가 크게 떠올랐다.
-플레이어 'Lollll'님이 대국을 신청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아니오
고민하다가 버튼을 눌렀다.
*
갑작스레 나타난 유저.
레벨 90이 넘어가는 실력자들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그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했다.
Ryu.
특히나 당사자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아니, 진짜 말도 안 되게 잘했다니까.
-흐음, 그래?
-어, 나 이제 곧 타이틀 따는 거 알지? 근데 진짜 발렸다고.
-호오...!
-내 아이디 들어가서 과거 영상 빨리 보라니까.
-알았다, 알았어.
머지 않아 영상을 봤는지 메시지가 왔다.
-미친, 뭐야, 이게!
-봤냐?
-어, 이게, 이게 맞아? 진짜냐고!
-그럼, 가짜겠냐?
-아이디가 Ryu라고 했던가?
-맞아.
-바로 대국 신청해야겠는데?
-관전이나 해야겠네.
-으으, 제발. 받아줘라, 받아줘...!
Lollll. 줄여서 롤이라 불리는 플레이어가 눈을 빛냈다.
-수락했어!
-구경할 테니까 잘 해보라고.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류와 롤의 대국.
관전자는 일곱 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류성에게 패한 사람과 패한 사람의 지인도 있었다. 그들은 류성의 수를 지켜보면서 관전자 채팅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수가 평범하지가 않아.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중요한 건 그 모든 수가 결국 이어진다는 거지.
-맞아, 지나고 보면... 신의 한 수야.
-오우, 저건 또 뭐냐고...!
그 정도로 류성의 체스는 독특했다.
일반적이지 않았다.
배운 적이 없으니 자유로웠고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서 펼쳐졌으나 승리를 위한 수가 아니라 '재미'를 위한 선택을 했기에 기이했다.
그 차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실력으로 승리했으니 결국 지나고 나면 현명한 선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이런 스타일의 GM은 잘 모르겠는데.
-참신하고 재밌어.
-그랜드마스터야 전세계적으로 워낙 많으니 일일이 아는 건 어렵다지만 그래도 이런 독특한 수를 두는 GM이면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려나.
-아니면, 신진 고수일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네.
인터넷 고수 '류'가 체스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
대략 3시간 정도 체스를 하고 나니 머리가 아팠다.
“어우, 그래도 재밌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재능 ‘체크메이트’를 종료합니다.]
[사용 가능한 시간 : 11시간 57분]
재능의 사용을 종료한 순간이었다.
[특수 연계 퀘스트 발동!]
[1. 글로벌 체스의 레벨을 10까지 높여라.]
[보상 : 랜덤 카드]
갑자기 특수 연계 퀘스트가 발동했다.
"어...?"
그런데 보상이 평소랑은 달랐다.
포인트가 아니었다.
사실상 더욱 간절했던 랜덤 카드가 류성을 유혹했다.
"미친. 이건 무조건 해야지."
이번 특연퀘를 통해 카드를 최대한 모아서 한 방에 까버리면 정말 재밌을 것 같았다. 조금 쉬려고 했는데 보상을 확인한 이상 그럴 순 없었다. 시간을 더 투자해서 ‘글로벌 체스’를 했다. 아팠던 머리가 특연퀘로 인해 멀쩡해진 모양이었다.
[승리!]
[승리!]
[승리!]
계속되는 승리에 경험치가 쭉쭉 쌓여갔다.
관전자도 계속 늘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했을까.
드디어 레벨 10을 달성했다.
[특수 연계 퀘스트 갱신!]
[보상으로 최하급 카드를 획득합니다.]
[2. 글로벌 체스의 레벨을 20까지 높여라.]
[보상 : 랜덤카드]
이번에는 레벨 20이 목표였다.
"음..."
욕심이 나긴 하지만 이젠 정말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그래, 무리하지 말자.
오늘은 카드 하나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이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하냐?)
"그냥 쉬고 있지."
(오랜만에 치맥이나 한 잔 하자.)
"오, 그럴까?"
요즘 이신우를 만난 적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다.
워낙 바빴으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주말이니 녀석과 치맥을 즐기면서 수다나 떨기로 했다.
"지금 가면 되냐?"
(어, 오늘 쉬는 날이니까 와라.)
"오케이!"
토요일 저녁 시간, 류성은 가볍게 옷을 차려입고서 이신우의 치킨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벌써 치킨 냄새가 가게 내부를 가득 채운 상태였다.
"왔냐?"
"어. 크으, 냄새 쥑이네."
"흐흐, 맛도 끝내주지."
곧이어 치킨이 나왔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운 치킨과 손이 얼어버릴 것 같은 시원한 컵에 담긴 맥주.
환상의 궁합이었다.
"보기만 해도 좋네."
"먹자."
일단 다리를 하나 뜯고서 맥주를 들이켰다.
최고의 맛이었다.
이 정도면 진짜 인기가 많을 거 같은데.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왜 토요일에 쉬는 거야? 장사 제일 잘 되는 게 주말 아닌가?"
"어우, 평일에도 충분히 바빠."
"오, 그 정도냐?"
"어. 요즘 장난 아니거든. 그래서 남들 쉴 때 같이 쉬려고. 돈 욕심 내면 토요일에 하는 게 맞는데 솔직히 주말은 너무 힘들거든.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에 하루는 쉬는 게 맞는 거 같더라."
"하긴, 체력 관리도 해야 하니."
"어, 운동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
"뭐냐, 그 표정은."
류성이 가볍게 웃었다.
"나 헬스장 다니는 건 알지?"
"알지."
"너도 나와라. 아침 일찍."
"아니, 그..."
"체력 관리 필수라며? 동의했잖아."
"그렇긴 한데."
"아니면 다른 곳 다니냐?"
"그건 아니고. 집에서 그냥 조금씩 하는 거지."
"그걸로 되겠냐고. 이제 건강 생각해야지, 우리도 곧 30대라고."
"크흠."
"올 거지? 오는 거로 안다."
"아오, 그래. 간다, 가!"
"콜!"
안 그래도 최근 혼자서 운동하는 게 조금 지루했는데 이신우랑 같이하면 즐겁게 운동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초보일 테니까.
조금 약도 올리면서.
"크흐흐."
"기분 나쁜 웃음인데?"
"그냥 웃은 거야."
"그러냐. 그보다 얼마 전에 젤트리온 매수하라고 문자 보냈더라."
"아, 그랬지."
"그거 보자마자 바로 샀거든."
"오, 잘했네."
"흐흐, 덕분에 수익 나는 중이다. 이거 언제 팔면 되냐?"
"음. 대충 12월 10일 넘어가면 팔아."
"12월 10일, 오케이."
틈틈이 정보가 생기면 이신우에게는 알려주고 있었다. 조금 바빠서 만나거나 통화를 하는 건 줄었지만 말이다.
"참, 근데 전업투자 그거 말고 다른 것도 하냐?"
"어? 왜?"
"아니, 요즘 엄청 바빠 보여서."
"음, 여러 가지 하고 있지. 법인도 세웠으니까."
"오호? 뭔데?"
"뭐, 영화도 투자하고 있고."
"이야, 그래?"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조금 쑥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아, 나도 프랜차이즈 하고 싶다."
"준비는 하고 있냐?"
"조금씩? 그래도 관심 있다는 사람은 꽤 있어서 말이야. 법인도 세웠는데 이게 쉽지가 않네. 역시 뭘 하려고 해도 돈이 문제더라고."
"그렇긴 하지."
"물론 다른 프랜차이즈처럼 곳곳에서 이득 취하면 쉽게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고."
녀석도 확실히 야망이 있었다.
조금 느리지만.
그래도 확실하면서도 안정적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니까.
뭔가 느낌이 온다, 느낌이.
[띠링!]
그 순간 거짓말처럼 퀘스트가 등장했다.
[퀘스트 등장!]
[프랜차이즈의 시작, 2호점.]
[정직한 마인드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신우. 그가 프랜차이즈 기업을 꿈꾸고 있다. 다만 자본과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 속도가 매우 더디다.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여 그 돈으로 전문적인 인력을 고용해 속도를 높여라.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당장은 2호점을 목표로 움직여라!]
[남은 시간 : 90일.]
[성공 보상 : 랜덤 카드, 선행 포인트.]
[퀘스트 실패시 치킨 알레르기가 생깁니다.]
류성의 눈이 커졌다.
이런, 미친...!
퀘스트 실패시 패널티가 너무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치킨 알레르기라니!
치킨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무조건 성공시켜야 돼.
의지가 무럭무럭 솟구쳤다.
목표는 2호점.
류성은 즉시 이신우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신우야."
"어?"
"솔직히 프랜차이즈 하려면 엄청 복잡한데 그걸 혼자서 할 수 있겠냐? 전문인력을 고용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그거야 아는데, 돈이 문제 아니겠냐."
"흐음. 특허는 냈고?"
"아니, 아직."
"비법 소스는 일단 특허부터 내야지. 잘못했다가는 대기업한테 뺏겨."
"으음, 그런가."
이신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내가 투자할게."
"뭐?"
"자본 제대로 투자할 테니까 전문인력 고용하고 특허 내고! 프랜차이즈 기업, 그거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솔직히 여기 치킨 한 번만 맛보면 무조건 단골 된다니까. 안 그러냐? 나도 듣다 보니까 욕심난다. 이거, 자본만 제대로 투입하면 PPQ 못지않게 커질 수 있어."
이신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원래 인생은 갑자기야."
"으음..."
"뭘 고민해? 내가 투자한다니까."
"뭐, 얼마나 투자하려고?"
"1차로 20억. 이 정도면 지분 나눠도 너한테 크게 부담 안 될 테고 스타트 하기에는 딱 좋지 않겠냐?"
엄청난 거금이었다.
20억이라니.
그 정도면 프랜차이즈를 시작하기에는 차고도 넘쳤다.
공장과 유통 협업.
그리고 홍보.
큰 돈이 들어가는 건 이 정도였으니까.
"그, 진짜로? 20억을 투자하겠다고?"
"어."
이신우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됐네, 됐어. 흐흐.
저 표정이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뭐, 싫으면 말고. 천천히 하다 보면 몇 년 안으로 2호점 하나 정도는 낼 수 있지 않겠냐."
"으으!"
"대신 나한테 투자받으면 내년만 되어도 10호점? 아니, 20호점까지도 무난할 거 같은데."
"20호점이라고...?"
"어, 20호점."
이신우가 갑자기 탁자를 쾅하고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