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좀 다를걸(1) >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이신우가 배를 쓰다듬었다.
"아오,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좋지. 메뉴는?"
"감자탕 어떠냐?"
"콜이다."
"예전에 하빈이 하민이랑 갔던 곳 있는데 거기 맛있더라고. 바로 근처니까 걸어서 가자."
이신우가 류성을 안내했다.
도착한 식당.
감자탕 2인분을 주문하자 금세 음식이 나왔다.
"끓이면서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큼지막한 등뼈 하나를 앞접시에 덜어 살점과 말캉거리는 골을 흡입하던 중이었다.
"최근에 내가 생각하던 게 하나 있거든."
"너도 생각이란 걸 하는 거냐?"
"어쭈? 내가 너보단 성적 좋았던 걸로 아는데?"
"...그랬지, 참."
이신우의 팩폭에 심장이 아팠다.
"아무튼, 치킨집에 그런 거 하면 어떠려나."
"어떤 거?"
"전에 네가 꼬맹이 데려오면서 치킨 좀 사주라고 돈 준 적 있잖아. 그 이후로 가끔씩 찾아오더라고. 그렇게 계속 챙겨주다가 보니까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류성은 등뼈를 발라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얘기하라는 듯 쳐다보면서.
"그래서 나도 착한 영향력 스티커 좀 알아봤거든. 거기 모임에 가입하는 게 어렵지는 않더라고. 그거 치킨집에 붙이고 동네 애들이라도 조금 챙겨줘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할 줄이야.
등뼈를 내려놓고.
티슈로 입을 닦아냈다.
"웬일로 그런 생각을 했냐?“
"내가 원래 속이 깊어.“
"지랄. 아무튼...“
이건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좋지. 괜찮을 거 같은데?"
"그래?"
"어, 투자자로서 말한다. 착한 영향력 가입해서 치킨 좀 나눠주고 해."
"그럼 프랜차이즈 지점도 전부 다 해버려?"
"어? 그건..."
생각을 못 한 부분이었다.
진입장벽을 만들 가능성은 있지만 어떻게 보면 흥미로웠다.
요즘은, 그래.
특별함이 필요한 시대였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어? 진짜? 그냥 해본 말인데?"
"아니, 아니야. 곱씹어볼수록 좋아, 그러네. 진짜 좋은데? 그거 하자."
"...진짜로?"
"어, 방향을 아예 그쪽으로 잡아버리는 거지. 상호명도 '맛있고 착한 치킨집' 이런 느낌으로 지어서 이미지랑 부합하게 만드는 거야."
"오호?"
"그런 특이한 부분에 이끌려서 찾아오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란 말이지. 이미지도 좋고 시선도 끌 수 있고. 실질적으로 어려운 아이들한테 도움까지 줄 수 있으니까 무려 1석 3조!"
그 순간이었다.
[연계 퀘스트 발동!]
[착한 프랜차이즈!]
[전국 곳곳에 배고픈 아이들이 존재한다. 착한 프랜차이즈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면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프랜차이즈 본점과 지점이 어려운 아이를 도울 때마다 차등으로 지급되는 '랜덤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 정산은 매달 말일에 이뤄진다.]
독특한 퀘스트가 등장했다.
보상이 포인트나 카드가 아니라 랜덤이었다. 순전히 시스템이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의도였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하려고 했던 일이니까.
기왕 하는 김에 추가적으로 랜덤 요소가 가득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은근 기대되네.
과연 어떤 보상이 찾아올지.
"딱 정했다. 바꾸기 없어, 오케이?"
"그래, 오케이다!"
이걸로 흥미로운 루트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럼 총 세 개인가.
첫 번째는 정기후원 퀘스트였다.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보상도 매달 증가하는 추세라 아주 꿀같은 퀘스트였다.
두 번째는 꿈과 목표를 위한 퀘스트였다.
전에 적어뒀는데.
류성은 슬쩍 메모장을 확인했다.
[미래의 꿈나무를 위하여!]
[많은 아이가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돈이 없어서, 환경이 불우해서, 기회가 없어서. 다양한 이유 속에서 각박한 세상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미래의 꿈나무들. 그 아이들에게 꿈과 목표를 가져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라! 아이들이 무언가를 이뤄낼 때마다 시스템이 판단하여 보상을 지급한다.]
[남은 시간 : 무제한.]
예전, 보육원 아이들의 잠재력을 보려고 했을 때 떠올랐었다.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나씩 이뤄내기 시작할 터였다. 그때부터 보상이 지급되리라.
그리고 세 번째 루트.
오늘 얻게 된 착한 프랜차이즈 퀘스트였다.
점점 무언가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느리지만 꾸준했다.
당장은 체감하는 정도가 작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뭉치고 뭉쳐 한없이 거대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자, 밥도 다 먹었으니 슬슬 가자."
"어어, 그래."
"프랜차이즈 관련해서 어려운 일 생기면 바로 얘기하고. 도와줄 테니까."
"알았어."
"전문인력도 고용해야 한다. 알지?"
"당연하지, 내가 혼자 어떻게 하냐."
"오케이, 믿고 간다."
"그래, 다음에 보자."
이신우와 헤어지고서 류성은 곧바로 RS 재단법인 사무실로 향했다.
*
문을 열자 부사장이 그를 반겼다.
"이사장님, 오셨어요?"
"어라, 오늘 주말인데 출근하셨네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니, 그래도..."
"애들 밥은 다 챙겨주고 나왔어요. 그리고 요즘은 저 대신 보육원 관리해주는 분도 계시고요. 자자, 할 일이 많아요. 12월 중순 전에 50억 넣어주신다면서요."
"그렇죠?"
"그럼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그리고 소년 소녀 가정에서 지내는 아이들 조사도 끝났고요."
"오, 그래요?"
"네. 여기 서류요."
류성은 서류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아이들의 꿈이 보였다.
이루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꼼꼼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엄청 상세하군요."
"저도 보고 놀랐어요."
구청 사람들이 고생을 좀 한 모양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야, 참.
그쪽 공무원이야 반대로 류성을 더 고맙게 여기겠지만. 뭐, 서로서로 감사하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바로 추진하죠."
"네, 그럴게요. 그리고 공모전은..."
"12월 중순 입금 확정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르세요."
"정말 그래도 되죠?"
"네, 됩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홍보부터 제대로 할게요."
"기대해도 되겠죠?"
"물론이에요. 그리고 서류 몇 가지 정리한 게 있으니까 사인부터 해주세요. 아이들 선물 준비하려면 할 일이 많아서요. 끝나는 대로 바로 구청에 보내려고요. 연락해보니까 자원봉사자는 이미 구해놓은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류성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업무 진행에 필요한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본 뒤 사인을 했다.
슥, 스슥.
거침없는 일필휘지였다.
*
금천구청 가정 위탁 담당 부서는 월요일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서류를 정리하고 일정을 재차 확인한 뒤에 물품까지 체크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가 넘어갈 무렵에는 물품 전달을 위해 대부분 인원이 투입되었다.
"자원봉사자는?"
"이제 곧 도착할 예정이에요."
"좋아, RS재단에서 물품도 보내왔으니까 바로 나갈 준비 하자고.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힘들진 않을 거야."
"네, 팀장님!"
"근데 오늘은 그분 안 오시나 봐요?"
팀원 한 명이 물어왔다.
그에 팀장 고형준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 이사장님?"
"네."
"오늘은 안 오실 거고 필수품 후원할 때 오실 거야."
"아아."
"왜?"
"저녁도 맛있는 거 사주시고 하셔서요."
"안 그래도 봉사하는 분들이랑 너희 맛있는 걸로 먹이라고 하시더라. 아, 당연히 3만 원 넘으면 안 되는 건 알지? 걱정하지 말고 물건이나 잘 전달해."
"오오오!"
"네엡! 알겠습니다!"
팀장 고형준이 일사불란하게 지시했고 팀원들은 그 지시를 깔끔하게 수행했다. 그 와중에 도착한 물품이 실린 트럭과 자원봉사자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팀장은 자원봉사자 둘과 함께 맡은 구역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돌린 터라 아이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아린이. 안녕?"
"안녕하세요!"
"그래,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거 물었잖아. 기억나?"
"네, 기억나요."
아이가 이루고자 하는 꿈.
그 길에 자그마한 도움이 될 각종 물품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부족하면 말하고."
"우와, 감사합니다아!"
그렇게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이제 한 곳 남았네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오늘은 뭐, 그렇게 힘들지도 않은걸요."
"그렇긴 하죠?"
"네. 무거운 것도 없고요."
"맞아요."
자원봉사자 둘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엇보다 기분이 너무 좋네요."
"저도요. 필수품 전달은 몇 번 해봤는데 이런 건 또 처음이라..."
"하하, 특별하긴 하죠."
"꿈을 위한 선물이라니."
그 사이 마지막 집에 도착했다.
홍민기의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할아버지가 몸소 반겨줬다.
"아이고, 오셨구먼."
"아니, 할아버님. 이렇게 나오셔도 괜찮으세요?"
"흘흘, 그럼. 많이 좋아졌어."
꼬마 숙녀가 즐거운지 크게 외쳤다.
"우리 할아버지, 튼튼해져써여!"
"오, 그랬어?"
"네에! 의사 선생님이 막 집에 찾아와여!"
"오오, 그랬구나. 좋은데?"
"히히."
홍민기도 다가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민기도 오랜만이네."
"네, 근데... 그 아저씨는 안 왔네요?"
"아저씨?"
"재단 아저씨요."
"아, 이사장님 말이냐? 오늘은 크게 나눠줄 게 없어서 안 오시는 모양이야. 다음에 필수품 나눠줄 때는 오실 거다."
"아, 네."
고형준 팀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궁금하면 연락해봐."
"예? 아, 아니에요, 그런 거."
"허허, 그렇다고 치자."
"아, 진짜 아니에요!"
"그래, 알았다니까."
홍민기는 귀가 붉어져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자자, 일단 물건부터 받자."
"우와아아아!"
홍민기의 동생 두 명은 사실 아직 크게 지원할 게 없었다. 이렇다 할 꿈이나 목표를 갖고있지 않은 상태여서 다양한 즐길 거리를 선물했다.
"민기."
"네...!"
"자, 이거 받아."
홍민기는 달랐다.
명확한 꿈과 목표가 있는 아이였다.
웹툰 작가.
만화를 워낙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공책에 낙서하는 등, 혼자서 그림을 그린 아이였다. 그 탓에 전문적이진 않지만 오랜 노력으로 누가 봐도 잘 그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다.
하지만 한계 역시 뚜렷했다.
채도, 명암, 인체비율 등.
여러 부분에서 전문적으로 배운 아이들에게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 전용 태블릿."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종이 하나를 내미는 팀장.
홍민기는 이게 뭔가 싶은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이게...?"
"유명 웹툰 미술 학원 6개월 등록증. 이거 들고 해당 학원에 찾아가면 바로 수업 들을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홍민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미, 미술 학원 6개월이요?"
"그래. 그냥 미술 학원 아니고 정말 유명한 학원이라더라. 기간 끝나기 전에 더 배울 의사만 있으면 계속 연장된다고 하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아, 아..."
얼어버린 듯 홍민기는 말이 없었다.
손에 들린 등록증.
고개를 숙인 채로 하염없이 그것만 쳐다봤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고형준 팀장은 두 명의 동생과 할아버지를 모시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자, 우리는 먼저 갈까?"
"오빠는여?"
"형아!"
"괜찮아, 이럴 때는 혼자 두는 거야."
"우웅...!"
"허허, 그래. 할아버지랑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나서서 손주를 데리고 갔다. 고형준 팀장도 그 뒤를 따르면서 홍민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하고 건드렸다.
"열심히 해봐."
그에 간신히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뱉고야 말았다.
"후우으..."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저 또 한 번의 도움.
고맙지만 딱 거기까지인, 삶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을 가벼운 손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상한 아저씨는 할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셨고 이제는 의사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진료를 해줬다.
슬픔만이 가득했던 공간.
그 위로 오렌지색 태양이 내려앉은 기분이다.
전에 없던 웃음이 번지고.
꿈꿀 수 없던 미래가 그려진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넘칠 만큼 받고 있다고 여겼는데 또다시 과한 선물을 받아버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런 상념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어찌 보답해야 할까.
결국 열심히 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문득 RS 재단 법인의 이상한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난 좀 다를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던 그 말이 지금은 짙게, 그리고 깊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