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의 중심(1) >
여전히 조각에 빠져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조각가, 정채훈.
"후우."
조각이 팔리지 않으니 갈수록 궁핍해졌다.
삶이 버거웠다.
국내에는 심지어 조각 공모전도 거의 없었다. 가끔 나와봐야 상금이 거의 없는 편이라 참여할 의미가 없기도 했다. 준비해야 할 재료나 투자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손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으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정말 미래가 보이지 않았었다.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조각을 판매하는 경우가 간간이 존재했다. 재료가 저렴한 목각으로 인형을 조각하고 그걸 쇼핑몰에 올려놓으면 정말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은 벌어들일 수 있었다.
어렵고 협소한 분야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조각이 좋았으니까. 조각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이런 생을 이어가야 할 팔자인 모양이었다.
삭. 사삭.
오늘도 목각 조각을 이어갔다.
쉽게 구할 수 있고 조각 난이도 자체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한 건 아니었다. 조각은 언제나 한 번의 자그마한 실수로 무너지곤 하는 법이니까.
극도의 집중력.
그게 필요한 순간이었다.
조각칼을 휘두를 때마다 나무껍질이 부드럽게 벗겨졌다.
사삭, 삭.
생각보다 빠르게 형태가 잡혔다.
귀여운 다람쥐였다.
형태가 잡힌 뒤로는 세심한 작업이 이어졌다. 더욱더 선명한 형태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3시간 정도 집중한 끝에 매우 정밀한 다람쥐 조각상 하나가 완성되었다.
"후우."
땀을 닦아내며 스트레칭을 했다.
몸이 뻐근한 까닭이었다.
다음 조각을 하기에 앞서 적당히 휴식을 취할 겸 충분히 몸을 풀고 목도 축였다. 이후 작업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스마트폰을 만졌다. 습관적으로 조각 공모전을 검색해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초록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예술 공모전 하나가 대문짝만한 글씨로 박혀 있었다.
[RS 재단법인 제1회 공모전]
[당신의 인생을 조각하라!]
정채훈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어...?"
에이,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조각가를 위한 공모전을 포털 사이트 메인 배너에 달아버린다고? 10년 넘게 업계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소개 문구에만 '조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눌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마법처럼 빨려들었다.
스윽.
손가락을 뻗어 해당 배너를 클릭하자 새롭게 창이 떠올랐다.
공모전 모집 요강이었다.
[지상최대 예술지원 제1회 공모전]
[인생을 조각하는 당신을 위하여]
1. 상금
대상 - 5,000만 원(1작)
최우수상 - 3,000만 원(5작)
우수상 - 2,000만 원(10작)
장려상 - 1,000만 원(15작)
특선 - 500만 원(30작)
2. 특전
상을 탄 모든 작품은 협력업체인 실내 전시관 및 실외 전시관에 전시됩니다. 전시관에서 판매될 경우 일부 수수료를 제외한 전액을 조각가에게 지급합니다. 단, 해당 조각이 판매되지 않으면 작품의 권리는 조각가에게 있으며...
정채훈은 멍하니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찬물에 세수했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다시 한번 모집 요강을 읽었다.
[모든 재료와 필요한 물품은 RS 후원재단에서 지원하며...]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읽을수록 말도 안 되게 좋은 조항이 나타났다. 이렇게 진행하면 장담하건대 주최 측은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리라.
"..."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서둘러 공모전 참여 신청서를 작성했다.
*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서버렸다.
새롭게 상세한 공지를 올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대부분 내용을 작성해뒀음에도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조금은 색다른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혹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인터뷰요?"
(네. 아무래도 조금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 많아서요.)
"네. 그런 거 같더라고요."
(이런 말씀은 그렇지만 저희가 예술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조금 있는 편이거든요.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가 될 거에요. 지금 사무실 난리죠? 인터뷰 기사가 나오면 어느 정도는 가라앉을 겁니다.)
기자의 마지막 말에 흥미가 크게 솟구쳤다.
"인터뷰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빠른 결정 감사합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기왕 시작한 김에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았다.
(최대한 빨리라면... 혹시 오늘 저녁도 괜찮으실까요?)
"아, 네. 됩니다."
(그럼 저녁에 뵙는 거로 할게요. 장소는 조용한 카페도 좋고 아니면 사무실도 괜찮아요.)
"조용한 카페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서 업무를 이어갔다.
"자, 갑자기 바빠진 느낌인데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배고픈 아이들입니다. 아시죠? 공모전도 공모전이지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건 아이들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후원 대상자가 보이면 바로 말씀해주시고요."
"그럴게요, 꼭!"
"그럼 다시 업무에 집중하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5시가 되자마자 퇴근을 종용했다.
"자자, 갑시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칼퇴근은 중요했으니까.
일과 일상.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고 류성은 약속 장소인 동네 카페로 이동했다. 커피는 맛있는데 사람이 적어서 가끔 들리는 곳이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이고, 오늘도 오셨네요."
"맛있으니까요."
"흐흐, 감사합니다. 뭐로 드릴까요?"
"음. 잠시만요."
류성은 메뉴판을 확인했다.
가장 상단에 드립 커피가 있었는데 원두는 두 가지였다.
"오늘도 원두가 바뀌었네요?"
"네. 주기적으로 바꾸고 있죠."
"그러면, 이걸로 할게요."
"엘살바도르 디비사데르 말씀이시군요."
"네."
"이 원두가 자두향이 조금 나면서 아몬드 느낌의 여운이 남는데 괜찮으실까요?"
"좋네요."
"그럼 준비해서 드리겠습니다."
류성은 계산을 하고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져온 노트북을 펼쳤다.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까지는 1시간이 남은 터라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일단 종토방이나 좀 볼까.
인터넷에 접속해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역시나 좋았다.
[아니, 와. 할 말이 없네ㅋㅋㅋ]
[시총이 25조라고... 말이 됨?]
[이건 이제 실적보다 너무 고평가가 돼버린ㅠㅠ]
[근데 숏스퀴즈라서 뭐ㅎㅎ]
[다시 10만으로 돌아온다, 반드시!]
[위에, 악의적 글 신고!]
[20만 뚫어야지, 무조건!]
[25만까지 가즈아아아!]
[아니, 25만은 무슨ㅋㅋ 솔직히 20만도 오버 아니냐?]
[인정ㅋㅋㅋ]
[지금 타는 흑우 없제?]
[나 세력형아인데 정보 풀어준다. 내일부터 떡락이란다^^]
[미친 놈들...ㅋㅋ]
활기찬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슈가 되어 사람들을 끌어모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아직 가면남이 안 팔았다!]
[아, 그러네?ㅁㅊ]
[아이고, 고건 또 몰랐구만ㅋㅋㅋ]
[아, 나만 알고 싶었는데ㅠㅠ]
[그런 고급 정보 풀리 말라고, 이 새키들아ㅋㅋ]
[ㅠㅠ하, 내 필살기였는데]
[ㄹㅇ, 짜증나네 위에 저놈ㅋㅋ]
마침 류성의 이야기가 나왔다.
글을 보며 웃고 있는데 커피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핸드드립 커피.
향을 음미하고.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대어 맛을 느꼈다.
"으음...!"
이 상큼한 맛. 고소하면서 동시에 묘하게 시원한 이 느낌. 얼음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맛 자체에 설명하기 힘든 상쾌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매번 원두가 달라지지만 언제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커피였다.
"후아, 좋네."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커피 한 잔의 여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사실 커피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맛이 특별하다는 건 느낄 수 있으니까. 여기서 마셔본 커피가 개인적으로는 최고였다.
다시 젤트리온을 체크했다.
최고점 24만 7,500원을 찍게 되는 날은 12월 13일.
"얼마 안 남았구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으리라.
홀짝.
나름의 계획을 그리면서 커피를 음미했다.
어느새 바닥이 보였다.
얼음을 입에 하나 넣고 아그작 씹어먹었다.
곧 오려나.
약속 시각이 5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딸랑-
마침 카페의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젊은 여성과 중년의 남성이었다. 두 사람은 류성을 쳐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류성은 이미 감이 왔다.
들고 있는 노트북.
목에 건 카메라와 티셔츠에 꽂힌 수첩과 펜.
누가 봐도 기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혹시 인터뷰 기자님 아니신가요?"
"아, 맞아요. RS 재단 이사장님...?"
"네, 제가 이사장입니다."
류성은 명함을 꺼내어 건넸다.
"죄송해요. 너무 젊으셔서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럴 수 있죠."
"일단 앉으실까요?"
"네."
류성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젊은 여성이 인터뷰 기자인 모양이었다. 중년의 남성은 벌써 카메라를 들고서 구도를 잡는 중이었다. 아마도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것 같았다.
"음, 그러면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네. RS 재단법인 이사장, 류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일단 이번 공모전이 생각보다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특이하게도 조각가를 위한 공모전을 여셨더군요."
"맞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류성은 예전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던 일을 언급했다.
"그때, 홍콩에서 조각상을 보는데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림에 못지않은 감성적인 부분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조각가가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까 생각했죠."
인터뷰 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음, 그래서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떠올랐습니다. 궁금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국내는 예술가가 살아가기엔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많은 예술가가 해외로 넘어가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아..."
"지금은 문화도 힘이 되는 시대 아니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생각했죠. 문화의 힘이 이어지게 만들어야겠다고. 그걸 주제로 간단한 회의를 진행했고 그때 공모전을 열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아, 공모전 아이디어는 부사장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한 겁니다."
그 말에 기자가 웃었다.
"부사장님을 많이 생각하시나 보네요."
"네, 없으면 재단 운영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죠."
"대단하신 분이군요."
기자는 노트북 키보드를 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이번 공모전이 제1회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첫 번째 공모전이죠."
"제2회 혹은 그 이상도 생각하고 계실까요?"
"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여쭤볼게요. 앞으로도 조각가를 위한 공모전만 개최할 예정이신가요?"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