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물주를 위하여(2) >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이었다.
"지금 본론을 꺼내는 게 편하시겠죠?"
"네. 이야기 듣고 맛있게 먹을게요."
"그러면 본론부터 말씀을 드릴게요. 오늘 수현이가 축구하는 걸 봤거든요.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놀라셨다구요?"
"네. 천재적이어서요."
"네...?"
"수현이를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게 스포츠건, 다른 어떤 것이건 상관 없이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정수현과 그의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제 아들을... 지원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생활비는 물론이고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용품은 물론이고 들어가는 모든 비용 전액을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수현이가 천재라서요. 다른 스포츠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축구 하나는 제대로더군요. 태어나길 스포츠 선수로 태어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의 스포츠 스타를 도울 수 있다면 저한테도 그리고 재단 법인에도 긍정적일 테니까요."
법인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여인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순수한 선의보다는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사람은 안심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 점을 조금 더 강조했다.
"많은 아이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때, 그 뒤에는 언제나 저희 재단 법인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정수현이 가장 빛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더욱 후원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결심한 듯, 여인이 정수현을 쳐다보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현아. 축구 하고 싶니?"
"어, 그게..."
"지금은 솔직하게 말해도 돼. 너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까."
"...."
분명 식당에 오기 전, 둘이서만 대화를 나눴을 때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수현아, 어때?"
"...하고 싶어."
"진심으로?"
"응. 축구, 너무 하고 싶어..."
그게 녀석의 본심이었다.
꼭꼭 숨기고 있던.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가슴 깊은 곳에 감춰진 진실.
"이사장님?"
"아, 네."
"수현이가 하고 싶다고 하네요. 도와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그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정수현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였다.
한부모 가정.
그러나 서류상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라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힘든 생활에 정수현은 차마 꿈조차 얘기하지 못했던 모양이었고.
전에도 느꼈지만 참.
철이 너무 일찍 들어버린 꼬맹이었다.
"감사해요, 정말."
"뭘요. 남편분이 도망치고 연락이 안 된다고 하셨죠?"
"네."
"그 부분도 돕겠습니다. 법적으로 가면 충분히 이혼 처리가 가능하거든요."
"아... 고맙습니다, 정말."
"이혼 판결이 나면 나라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류성의 목소리가 따뜻해서였을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숨을 죽일 뿐이었다.
*
정수현에 관련된 일을 재단 업무로 넘겼다.
"한부모 가정이네요."
"네, 맞습니다."
"사정도 안타깝고... 제대로 준비해볼게요."
부사장은 언제나처럼 듬직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사장님. 제 아이처럼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뭘요, 그러려고 온 건데요."
"하하, 그렇죠."
그러기 위해 운영하는 재단이니까.
"아, 그리고 이사장님."
"네."
"공모전 접수 끝났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네,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류성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문제죠?"
조각 공모전에 참여하기 위한 접수 기간이 끝났는데 지원 품목에 적힌 몇 가지 특수 재료가 문제였다.
"이 재료들은 좀 특수해서 공모전 시작 전까지 구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래요?"
"네.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요. 재료를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그게 안 되면 최대한 빨리 공모전 참여하는 분들께 연락을 돌려야 할 거 같아요. 그래야 늦지 않게 컨셉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요."
"으음."
꽤 심각한 일이었다.
크게 미룰 순 없겠고.
"저도 최대한 빨리 알아볼 테니까 점심 이후에 다시 얘기하죠."
류성은 서둘러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만한 지인.
김창호 선생님은 물론이고 조각 관련 업체에까지.
(죄송합니다. 전부 예약이 된 재료들이라서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 주문을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나요?"
(네. 재료 자체가 수급이 오래 걸립니다. 대기자도 많고요. 몇 달 넘게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서 다시 여러 곳에 전화를 돌렸다.
전부 실패였다.
이대로라면 몇 가지 재료에 관한 지원을 멈춰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연락이 닿자마자 상황을 설명하고서 부탁을 했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잠시만요, 직접 얘기를 하겠다네요.)
"아, 네."
곧이어 통화 상대가 바뀌었다.
조금은 허스키한.
그러나 듣기에 참으로 좋은 목소리를 지닌 마이유였다.
(오랜만이에요.)
"네, 반갑네요."
(일단 설명은 들었어요. 특수한 조각 재료 수급이 문제라는 거죠?)
"맞습니다."
(음,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한국대 조소학과 교수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아요. 물어보고 연락처 알려드릴게요.)
"조소학과 교수님이요?"
(네.)
"아, 정말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나중에 가사나 써줘요.)
"...그럴게요. 쓰게 된다면 제일 첫 번째로 드릴게요."
(히히, 기다릴게요!)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다음에 봐요!)
"네."
통화를 끝냈다.
머지않아 연락처가 왔다.
마이유 매니저 : 여기 교수님 연락처에요! 파이팅!
나 : 고맙습니다.
류성은 곧바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 크게 이슈가 된 RS재단 공모전이라던데, 맞나요?)
"맞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도와야죠.)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렸다.
(안 그래도 재료가 꽤 남거든요. 좋은 일이니 제 재량으로 충분히 넘겨드릴게요.)
덕분에 특수 재료까지 아무 문제 없이 수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면 공모전 후원사에 대학교 이름을 넣어 달라고 요청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일절 없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조금 정리해서 서류로 보내드릴게요.)
"네, 기다릴게요. 고맙습니다."
(뭘요, 공모전 성공적으로 치르길 바랄게요.)
그렇게 전화를 끝냈다.
류성은 일단 부사장에게 해당 소식을 전했다.
"다행이네요."
"그렇죠?"
"그리고 좋은 곳이기도 하구요"
"네.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그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주기로 했다.
"후원사에 해당 대학교를 올리는 건 어떨까요?"
"좋죠. 그럴듯한 후원사가 있으면 아무래도 더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그렇게 진행하죠."
"네. 한국 대학교가 RS 재단 법인의 첫 번째 후원사가 되겠네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후원을 해주기만 하던 와중에 받은 첫 번째 후원이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신입 직원 넷을 뽑았다.
덕분에 류성과 부사장을 포함해 총 아홉 명이 사무실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탓일까.
사무실이 조금 좁게 느껴졌다.
"사무실이 꽤 좁죠?"
"전혀요."
"크흠, 그래요?"
"네. 너무 넓은걸요? 물론 다섯이서 쓸 때보다야 당연히 좁지만요."
"직원이 더 늘면 더 좁아지겠고요."
"그거야 어쩔 수 없죠."
부사장이 묘한 시선으로 류성을 쳐다봤다.
"이사장님, 벌써 사무실 옮길 생각은 아니시죠?"
"그거야, 뭐..."
"돈 아껴야죠."
"괜찮은 건물이 곧 생길 거 같아서요."
"건물이요?"
"네."
"어머, 임대가 아니라 매매하는 건가요?"
"그럴 거 같아요."
"음, 그러시다면야..."
"매매는 괜찮은가 봐요?"
"건물주는 모두의 꿈이잖아요. 그리고 재단 법인인데 그럴듯한 건물 하나 있으면 보기에도 좋으니까요. 임대에서 임대면 굳이 무리해서 옮길 필요가 없겠지만 자가 건물이면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하죠."
"으흠, 그렇군요."
류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3,500억짜리 건물.
그걸 구매하게 되면 바로 사무실을 옮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거리는 좀 멀어지겠지만.
운이 좋게도 충무로, 그러니까 명동역까지는 지하철을 타면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출퇴근 시간에 조금 더 여유를 두면 크게 불편할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처음의 그 중독적인 욕망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일상에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커피나 한잔할까요?"
"이사장님이 타주시게요?"
"그럼요."
"너무 좋죠!"
기존의 직원들도 기뻐했다.
"그럼 금방 타서 올게요."
류성이 휴게실로 들어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새롭게 온 네 명의 직원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사장님이 직접 타주시나 봐요?"
"네. 커피를 잘 타시거든요."
"그냥 잘 타는 게 아니라 어어어어엄청 잘 타시죠."
"어머, 그 정도예요?"
"네. 놀랄걸요."
"근데... 부담스럽지 않아요?
"어, 글쎄요. 워낙 편한 분위기라서요."
"신기하네요."
신입의 말에 최송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금방 적응될 거에요. 해야 할 일만 하면 터치하는 것도 없고 출퇴근도 넉넉하고 아무튼, 진짜 좋은 곳이거든요."
경리 직원 임나연.
업무 직원 백성욱.
두 사람 역시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후원 물품 전달하고 나면 설명하기 어려운 뿌듯함이 있어요."
"사실 그런 감정 느껴본 적이 없어서..."
"저도 여기서 처음 느꼈어요."
"정말요?"
"그럼요.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거든요."
"크리스마스요?"
"네. 그때 큰 선물을 전할 예정이라서요."
"아하...!"
업무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류성이 따뜻하게 커피를 타왔다.
총 아홉 잔이었다.
"자, 요즘 쌀쌀하니까 따뜻하게 커피 한 잔씩들 마셔보세요."
"우와,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이사장님, 오늘도 기대해도 되나요?"
부사장의 질문에 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번보다 맛있을 겁니다."
"오오...!"
"이사장님, 그러면 기대감이 너무 높아진다구요."
그래도 상관없었다. 미리 살짝 마셔봤는데 오늘은 류성도 크게 놀랐을 정도니까.
"그럼 잘 마실게요!"
"잘 마시겠습니다!"
직원들이 잔을 하나씩 가지고 갔다. 류성은 마지막 남은 커피잔을 들고서 테라스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오는 몇 명의 직원들.
문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찬 바람이 얼굴을 거칠게 때렸지만 손에 들린 온기를 느끼면서 묵묵히 견뎌냈다. 이윽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잔을 들어 올렸다.
후르릅.
도심의 경치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아...!"
혀를 타고 올라오는 커피의 짙은 맛에 한번 놀라고.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농밀함에 다시금 전율했다.
정말로 끝내줬다.
크으, 최고구만.
슬쩍 다른 직원들의 반응을 살펴봤다.
모두 눈이 동그래진 상태였다.
"대, 대박."
"우와, 뭐에요, 이거?"
"너무 맛있어...!“
직원들이 류성에게 다가왔다.
"이사장님, 너무 맛있어요!"
"저, 오늘도 완전 감동!"
"최고예요, 진짜."
"근데 이사장님. 제가 집에서 배운 대로 해봤거든요. 근데 이런 맛이 안 나더라구요. 어떻게 된 걸까요?"
"어, 글쎄요."
"이게 바로 그 손맛인가요?"
"하하, 그럴지도요."
기존 직원은 물론이고 신입 직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맛있게 먹어주니 류성도 뿌듯해졌다.
"맛있게 드세요. 다음에 또 타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흐아, 너무 좋아..."
어느새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이사장임에도 어렵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서 편하게 다가오는 직원들. 그들과 어우러지는 이 순간이 참으로 좋았다.
*
찾아온 일요일 아침.
류성은 가면을 쓰고서 생방송을 틀었다.
이제 돈을 벌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