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질(2) >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RS 재단법인 이사장인 류성입니다."
지금은 류성이라는 이름보다는 재단의 이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안녕하세요? 민설린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한국 극장을 매각한다는 말을 들어서요."
(맞아요. 관심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흐음, 좋아요. 할아버지가 추천해주신 분이니 저도 관심이 가네요. 만나서 얘기할까요?)
"좋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극장 근처에서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럼 제가 주소 보내드릴 테니 거기서 뵙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문자 보내겠습니다. 바로 오시는 건가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하고 문자를 보냈다.
시간은 30분 뒤.
만날 곳은 류성이 소유한 건물 앞이었다.
*
약속 시간이 5분 남았을 때였다.
끼이익.
앞쪽 도로에 차량이 한 대 멈췄다. 창문이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착용한 20대의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사장님, 맞으신가요?"
"아, 네. 민설린씨?"
"네, 저예요."
"위에서 얘기 나누시죠. 일단 여기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2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녀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뒤에 류성도 건물로 진입해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기다리니 그녀가 도착했다.
"가시죠."
"네."
그녀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복도를 거닐면서 민설린은 주변 사무실을 조심스레 살폈다.
"좋은 건물이군요."
"그렇죠?"
"이런 곳은 임대료가 얼마나 할까요."
"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네...?"
민설린이 살짝 당황했다.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캐치한 까닭이었다.
"설마, 본인 건물이세요?"
"네. 최근에 매입했죠."
"아..."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어, 엄청나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모르셨던 모양이네요."
"어떤걸요?"
"이 건물, 회장님 건물이었거든요."
"아, 그래요?"
"네."
"거기까진 몰랐어요."
"그렇군요."
그 사이 휴게실에 도착했다.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
중앙 소파로 안내한 뒤에 인스턴트커피를 탔다. 그 사이 민설린은 선글라스를 벗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인스턴트커피 드시나요?"
"아, 네."
"잠시만요."
두 잔을 탄 뒤에 소파 앞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드시죠."
"고마워요."
민설린은 별생각 없이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예의상으로 말이다.
그런데 느껴지는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
"맛이 괜찮죠?"
"아, 네."
잠시 커피를 음미할 시간을 줬다.
호로록.
약 5분 정도 커피에 빠진 채로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설린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맛있... 네요."
"고맙습니다."
"크흠, 그보다 이제 매각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러죠."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네."
"한국 극장, 지분은 51퍼센트를 매각할 생각이에요. 다른 누군가에게 지분을 따로 판매하지 않는 이상 한국 극장은 말 그대로 구매자의 소유가 되는 거죠. 다른 주주들이 전부 힘을 합쳐도 해임할 수 있는 권리가 부족하니까요."
"그렇죠."
"그래서 이 지분, 얼마에 매입할 생각이신지 궁금하네요."
"그 전에,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지분은 왜 매각하시는 건지."
그 부분이 조금 궁금했다.
민설린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 이유는 없어요. 예전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지분을 저랑 남동생한테 주셨는데 지금은 극장 매출도 안 나오고. 굳이 들고 있어 봐야 가치만 하락하는 거 같아서요. 그나마 시세가 나올 때 팔고 싶은 생각이네요."
"솔직하시군요."
"그런 편이죠."
고개를 끄덕인 류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문제는 협상 중인 영화사가 있다는 건데, 거기서 얼마를 불렀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얼마를 불러야 할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방법을 꺼내 들었다.
"현재 협상 중인 곳이 있겠죠?"
"네."
"거기보다 50억을 더 드리죠."
기왕이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단번에 크게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500억은 넘지 않을 테니까.
"어, 50억을 더요?"
"네."
"그러니까, 435억에 매입하신다고요?"
들려온 소리에 류성의 눈이 조금 커졌다. 생각보다 훨씬 가격이 낮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잡았다.
"네, 435억에 매입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만요. 동생이랑 얘기 한 번만 할게요."
"그러시죠."
사무실에서 나간 그녀의 통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다. 길지 않은 대화, 그리고 다시 휴게실로 들어온 그녀의 표정이 단호했다.
"매각하죠."
"좋네요."
"지분 매각인 만큼 증권사를 대동해야 하거든요. 현재 저희가 매각 업무를 맡겨 놓은 증권사가 있으니 거기서 거래를 마치면 될 거 같네요."
"어느 증권사죠?"
"미래애넷 증권사요."
튼실한 증권사였기에 크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였다.
"그럽시다."
"오늘은 주말이라 안 되고, 이틀 뒤 월요일 오전 9시에 거래해요."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성도 슬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 지하로 이동했다.
"그럼 월요일에 뵙죠."
"네, 살펴 가세요."
인사를 하고서 각자의 차량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류성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본 민설린은 이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
일요일을 바쁘게 보냈다.
동물보호센터를 설립할 부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괜찮은 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장님, 여기가 땅값은 엄청 싼데 이동시간은 또 괜찮거든요."
"흐음, 그러게요."
동네인 금천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겨우 40분이 걸렸다.
"여기가 송산면인 거죠?"
"네, 화성시 송산면입니다. 어떠세요, 땅이 엄청 넓죠?"
"넓기는 하네요."
넓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위치도 괜찮았다.
이동시간도 딱이었고.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인 거죠?"
"음. 5만 제곱이니까 1만 5천 평 정도죠. 1천 세대급 조경 좋은 아파트 단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1천 세대급 아파트 단지라..."
"근데 여기다가 뭘 지으려고 하시는지."
"아, 제가 말을 안했던가요?"
"하하, 네."
"동물보호센터를 지을 겁니다."
"예...? 어, 그러니까 유기견 보호소요?"
"네."
"그 정도면 5만 제곱이 아니라 5천 제곱만 되어도 충분하실 텐데요. 1,500평만 되어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류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넓게 지으려고요."
"허, 허허허."
"나중에 괜히 주변으로 넓히려면 귀찮잖아요.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죠."
"손이... 엄청 크시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허허, 당연히 칭찬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류성의 시야는 부지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주 적당한 위치였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얼마라고 했죠, 여기가?"
"시세대로 하면 147억이지만 판매자가 140억에 내놓은 상태죠."
"140억..."
"금액이 많이 크긴 하죠?"
"괜찮습니다. 계약하죠."
쿨한 대답에 중개인의 눈이 커졌다.
"거래는 언제 될까요?"
"어어, 지금 당장 가능할 겁니다. 사실 오랫동안 구매자가 안 나타났거든요."
"그건 왜죠?"
"땅을 나눠서 매도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눠서 매도하면 조금씩 팔려나갔을 텐데..."
류성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좋은 땅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저한텐 좋은 일이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에 대기업 구세계에서 테마파크를 짓는다며 땅을 매입하려고 했었지만 무산이 되면서 땅값이 크게 하락해버렸다. 덕분에 현재 주변 땅 시세는 3.3㎡, 그러니까 1평에 10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일단 사무실로 가시죠."
"네."
여러모로 시기가 좋았다.
*
부동산 사무실에서 잠깐 기다리자 땅주인이 나타났다.
"그래, 이분이 매입자신가?"
"네, 맞습니다."
"오래 걸렸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매도는 하실 거죠?"
"당연허지. 이거 팔아서 자식새끼들 조금 주고 나도 노후나 보내야지."
"잘 생각하셨어요."
뒤이어 땅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반가워요."
"네, 어르신."
"이제 나도 편히 좀 쉬겠구먼. 땅은 잘 써주게나."
"제가 잘 활용하겠습니다."
곧바로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본 뒤에 계약을 체결했다.
"잠시만요."
이후 어플을 통해 바로 140억 원을 땅 주인 계좌로 보냈다.
"돈 보냈습니다."
"예? 벌써 말입니까?"
"네. 확인해보세요."
땅 주인도 부동산 중개인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이어서 땅 주인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정말 들어왔네요."
"네."
"허허, 허허허. 아주 화통하신 분이군요."
"뭘요."
"고마워요. 그럼 나는 가보겠습니다."
"예,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걸로 1만 5천 평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 류성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저 위에 동물보호센터를 설립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유기견, 유기묘 보호소 화재!]
[퀘스트 클리어!]
[정산 완료.]
[중급 랜덤카드를 습득합니다.]
[선행포인트 21점을 획득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고용하고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 퀘스트가 있었다.
그게 지금 클리어가 되었다.
땅을 샀더니 이런 선물까지 안겨줬다.
중급 랜덤카드에.
선행포인트는 무려 21점이었다.
"역시 퀘스트가 최고네."
당장 카드를 오픈할 생각은 없었다.
체스 레벨 업 카드도 모으고.
최근 리어카 할아버지를 도와주면서 얻은 카드도 아끼는 중이었다. 월요일이 되어 한국 극장 거래 퀘스트를 마무리 지으면 그때 오늘 얻은 카드까지 더해 한방에 오픈할 생각이었다.
*
다시 평일이 찾아왔다.
"아침부터 바쁘겠구만."
류성은 집을 나서면서 노현찬 부센터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동물보호센터 설립 기준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여보세요?)
"접니다, 부센터장님."
(예? 아이고, 벌써 그렇게 부르시면 좀 창피합니다.)
"하하, 법인에 사업도 추가했으니 부센터장님이 맞으신걸요. 그리고 땅도 매입했어요."
(그래요?)
"네."
(와, 이렇게 빨리...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럼요. 아무래도 중개업자가 안내를 잘 해줄테니까 그쪽 주소를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이제 건물만 올리면 되는데 이 부분은 제가 경험이 없어서요. 부센터장님이 맡아주세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래도 제가 보호소를 지어본 가닥이 있으니까요.)
"든든하네요. 대신 이번에는 센터 설립이니까 더 제대로, 더 넓게, 더 확실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아시죠?"
(그럼요, 아주 놀랄 만큼 크고 넓게 짓겠습니다!)
장담하는 듯한 어조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
사람을 잘 골랐어.
물론 퀘스트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센터 설립이 막바지에 이르면 직원도 다수 고용해야겠죠?"
(음, 보호센터니까요. 필요할 겁니다.)
"천천히 준비해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 이후에는 부센터장님도 사무실로 출근해서 총괄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네, 센터장님!)
통화를 끊고서 전에 들렸던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오셨군요."
"네, 지금 같이 출발하시면 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변호사를 대동하고서 명동에 있는 미래애넷 증권사로 향했다. 민설린을 만나 한국 극장의 지분 51퍼센트를 매입하기 위함이었다.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미래애넷 입구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도착했습니다."
(잠시만요.)
그녀가 오른쪽 입구에서 나타났다.
"위로 올라가요."
"위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몸을 돌리자 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설린이 있었다. 선글라스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고 화장도 안 한 느낌이었다. 물론, 요즘은 안 한 느낌의 화장이 대세긴 했지만서도.
"네. 거기에 지점장님 사무실이 있거든요."
"아아, 그럽시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저 거래 상대일 뿐이었다.
걸음을 내디뎠다.
곧 도착한 지점장실에서 본격적인 한국 극장 지분 거래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