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은 일꾼(1) >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CL 인베스트먼트 투자사의 회장인 박순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반갑네. 거래가 잘 끝났다고 하더군.)
"네, 덕분입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해야 했는데 죄송하네요."
(괜찮네.)
문득 지난번 약속이 떠올랐다.
"참,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여유로운 편이지.)
"그럼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좋구만. 어디서 볼 텐가?)
"음, 실은 제가 카페를 하나 열었거든요. 여기로 오실래요? 커피 한잔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이후에 근처 식당으로 모실게요."
(호오, 좋지. 그럼 내가 가겠네. 충무로겠지?)
"네, 맞아요."
(지금 바로 가겠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네.)
통화를 종료하고서 바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금방 오시려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카페 문을 열고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투명한 창문 너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좋네."
뭔가 대비되는 느낌에 한껏 여유로워졌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정신을 깨우는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크흠, 양해를 구할 게 있네.)
"양해요? 아, 혹시 시간이 안 되시나요?"
(그런 건 아닐세.)
"그럼 어떤...?"
(내가 괜히 자랑하듯 말을 꺼냈는데 혹한 모양이야. 성욱이가 자기 누나랑 같이 가도 되냐고 묻더군. 괜찮겠나?)
잠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 괜찮긴 한데요. 성욱이라는 분이 누구신지..."
(아아, 이거 정신이 없구만. 설린이는 알고 있겠지? 한국 극장 주인이었던.)
민설린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 남동생일세.)
"아아, 그렇군요."
(어떻게, 같이 가도 되겠나?)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같이 와도 괜찮을 거 같네요."
(그래, 알겠네. 그럼 지금 같이 가도록 하겠네. 차가 조금 막힐 수도 있으니 한 20분 정도 뒤에 도착하는 거로 생각하고 있으면 될 거 같군.)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다시 창문을 보며 시간을 죽였다.
멍하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흐아."
은근히 스트레스가 풀렸다.
*
박순흠 회장과 민설린,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 민성욱.
세 사람이 카페로 들어왔다.
"호오, 여긴가?"
"네, 인테리어가 최근에 끝났는데 어때요?"
"아주 깔끔하니 마음에 드는군."
"감사합니다."
"자, 일단 뒤에 있는 아이들이랑 인사부터 나누게."
"네."
박순흠 회장을 지나쳐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민설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네, 생각보다 일찍 뵙게 되었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리고 얘가 제 남동생이에요. 꼭 같이 가자고 해서..."
생각보다 덩치가 좋은 젊은 남성이었다.
"반갑습니다, 민성욱이라고 합니다."
"류성이라고 합니다."
류성은 세 사람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자, 일단 여기 앉으시고요. 저는 이제 커피 좀 타올게요."
"오, 그래 주겠나?"
"네. 기대해도 좋습니다."
"내가 이런 카페에서는 커피를 잘 안 마시네. 가볍게 맛만 보도록 하지."
"믹스는요?"
"그건 자주 마시는 편이네."
"잘됐네요. 커피 믹스를 타드리려는 거라서요. 우유 넣어서, 괜찮으시죠?"
"호오, 좋지. 아주 좋아."
그 말에 민설린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저, 저기."
"네?"
"저는 양을 좀 많이... 주세요."
"아, 그럴게요."
그 모습을 민성욱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누나가 믹스 커피를 좋아했던가?"
"응? 아니, 뭐... 그냥."
"신기하네. 맛있나 봐."
"응."
"이야, 입맛 까다로운 누나가...?"
"쉿. 조용히 좀 하자. 어?"
"크흠, 알았어."
류성은 가볍게 웃으며 한쪽에 갖춰놓은 인스턴트커피를 꺼냈다. 카페 내에 전문적인 기구가 많이 놓여 있었는데 딱히 사용할 건 없었다. 그냥 우유 거품이나 조금 내는 수준이었다.
"따뜻하게 드릴까요?"
"추우니까 따뜻한 게 좋지."
"저도요."
그때 민성욱이 혼자 외쳤다.
"전 얼죽아입니다."
"아, 얼죽아요? 알겠습니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라.
재밌는 친구였다.
그렇게 따뜻한 커피 석 잔, 그리고 아이스로 한 잔을 준비했다.
"잘 마실게요."
"나도 잘 마시겠네."
"잘 마시겠습니다."
류성은 세 사람의 인사를 들으며 직접 내린 커피를 음미했다. 민설린은 이미 맛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나마 덜했는데 박순흠 회장과 민성욱은 아니었다. 특히나 박순흠 회장의 반응이 격정적이었다.
"오오...?"
자그맣던 눈이 번쩍하고 뜨였다.
"이거, 정말로 맛있구만."
"제가 커피를 좀 잘 타거든요."
가볍게 대꾸했는데 회장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 정도가 아닐세."
"어, 그런가요?"
"이 정도 맛이면 어떻게 해도 성공할 수밖에 없겠구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먹어본 커피 중에 최고라는 걸세."
사무실 직원들도 좋아했고 류성 본인 또한 맛이 상당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회장의 말에서 그보다 더한 무게감을 느꼈다. 오래 살아온 만큼 경험 또한 많을 것이기에 그의 한 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온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퀘스트 보상이었으니까.
지금껏 얻은 재능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그러니 '바리스타의 손맛' 또한 평범하지 않은 게 정상이었다.
차티스트의 눈으로 3시간 동안 단타를 치면서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었고 창의력으로 이모티콘을 냈으며 시인의 재능으로 작사 공모전에 참여해 음원 순위 1위에 올랐다. 영화 투자 역시 성공적으로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크게 놀라야할 이유가 없었다.
"흘흘, 자네의 그 덤덤함이 참으로 좋군."
"제가 좀 그렇습니다."
회장이 류성을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군."
"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묘하게 더 친근한 기분이야."
그 말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향수.
남녀를 떠나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을 지닌 물품이었다. 지닌 용량에 제한이 있었기에 특별한 날에만 뿌려주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말이다.
아무래도 그 효과가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슬쩍 민설린과 민성욱을 쳐다봤다.
민설린도.
그리고 오늘 처음 본 민성욱마저도 류성을 관심 있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저도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뭐를 말이냐."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뭔가 알고 지내던 형처럼 친근해서요."
"흘흘, 그래?"
자연스레 회장의 시선이 민설린에게로 향했다.
"설린이는 어떠냐?"
"저는 뭐, 그냥..."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한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가 충분히 붉어진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답이 되어버렸다.
후르릅.
커피를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성이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보다, 무슨 사이세요?"
"우리 말인가?"
"네. 꽤 친한 거 같아서요."
"이미 떠나버린 친우의 손주들이지."
"아..."
"어릴 적에 자주 보기도 했었고."
"그랬군요."
괜히 아픈 기억을 들쑤신 것은 아닐지.
"죄송합니다, 괜한 질문을 해서."
"괜찮아요. 오래전 일이니까요."
"맞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들 괜찮다고 하니 신경 쓰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커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였다.
민성욱이 입을 열었다.
"어, 저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실 궁금했습니다. 한국 극장을 인수한 사람이 누구일까 싶어서요. 업황이 좋지 않다면서 누나가 극구 설득하는 바람에 지분을 넘기긴 했지만 저는 그냥 좋았거든요."
"좋았다고요?"
"네, 극장 자체가요."
"아아..."
간부는 없지만 대신해서 한국 극장의 일을 전부 도맡아 처리한 사람이 바로 본인의 남동생이었다던 민설린의 말이 떠올랐다.
전부라.
순간,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이 생각났다.
[퀘스트 발동!]
[극장 운영에 필요한 인재!]
[민성욱은 현실이라는 벽에 막혀 꿈을 접고 극장을 팔아버리게 된다. 하지만 팔고 나니 뒤늦게 후회가 몰려오는 상황. 그는 여전히 꿈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 한다. 그 꿈을 자극해 극장 운영에 필요한 인재로서 영입하라!]
[남은 시간 : 7일.]
[성공 보상 : 랜덤 카드, 선행 포인트.]
[퀘스트 실패시 뜨거운 커피에 혀가 데입니다.]
등을 밀어주듯, 퀘스트까지 떠올랐다.
이걸로 확신하게 되었다.
민성욱은 현 상황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음, 그럼 가볍게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예? 어떤 걸 말입니까?"
"한국 극장을 좋아했다고 하니 제가 어떻게 운영할지 말씀을 드리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애정을 갖고 한국 극장의 전반적인 업무 처리를 했다고 들었거든요."
"아아, 맞습니다. 정말 즐거웠는데..."
짧은 아쉬움은 밀어낸 민성욱이 눈을 빛냈다.
"들어보고 싶습니다."
"뭐, 사실 대단할 건 없어요. 일단 현재 상영하는 유명작은 대부분 내릴 생각이거든요."
"예? 그러면 수익이..."
류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돈은 다른 거로 벌면 되니까요."
단순한 말이었지만 듣고 있는 이들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사업체의 운영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이색적이었으리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순흠 회장도 반응을 보일 정도로.
"놀랍군."
"네?"
"자네는 볼수록 날 재밌게 만들어주는군. 흘흘, 이 늙은이는 빠져있을 테니 일단 성욱이랑 대화를 나누게나. 내가 끼어들 타이밍은 아닌 것 같으니."
"아, 네."
어느 부분에서 놀란 걸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묻기에는 상황이 이상했기에 일단은 민성욱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돈은 다른 방법으로 벌면 됩니다. 대신 극장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생각이에요. 인기작을 전부 내리고 독립예술영화를 위주로 상영할 계획입니다."
"아아...!"
감탄을 내뱉은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렇군요. 부럽습니다."
부럽다는 말에 확신이 들었다.
저 사람도.
수익 걱정만 아니었더라면 비슷한 길을 걸었겠구나.
그래서 조금 더 자극했다.
"추가로 직접 투자도 할 생각이고요."
"예?"
"독립예술영화 시장이 좁기도 하고 열악하잖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거기서 나온 좋은 시나리오에 투자할 생각이에요.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한국 극장에 상영할 거고요. 투자, 그리고 상영까지. 확실한 루트 하나를 만들어두는 거죠. 물론 수익은 저조하겠지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늘어나면 본래는 없었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외에도 여러 가지 계획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니 민설린씨."
"네?"
"나중에 초기 투자자분들 데려오시기 전에 꼭 말씀해주세요. 저는 독립예술영화를 위주로 상영할 생각이라고요. 수익은 기대하는 바에 한참 미치지 않을 거라는 부분도 포함해서요."
"아...!"
"제 생각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요. 부탁드릴게요."
"...그럴게요."
그때, 민성욱이 류성을 빤히 쳐다봤다.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류성이 말한 것에서 자극을 확실하게 받은 모양이었다.
의도한 부분이기도 했고.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뭔가요?"
"한국 극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에 류성이 내심 웃었다.
"극장 수익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연봉은 얼마나 생각하세요?"
"돈은 그냥 기본만 주셔도 됩니다. 지분을 팔면서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은 받았으니까요. 그저 제가 진심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을 마무리해보고 싶어서요. 아, 대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지분을 어느 정도는 구매할 수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 현재 초기 투자자 중에서 일부는 지분을 매도할 거 같아서요."
"그들의 지분을 사고 싶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류성에겐 긍정적인 일이었다.
민성욱이 지분을 들고 있게 되면 아무래도 일을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현재 류성이 지닌 지분이 51%에서 더 떨어질 일은 없으니 경영에도 문제가 없었고.
"좋네요. 그러면 전반적인 업무를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하던 일이니까요."
"같이 한 번 해보시죠."
"감사합니다!"
괜찮은 일꾼 한 명을 얻어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