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가사(1) >
어느새 1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자, 밥 먹자."
"옙!"
"으음, 맛있는 냄새...!"
간소하지만 정갈한 한 상이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LA갈비.
그리고 가지런히 놓인 밑반찬들.
"잘 먹겠습니다!"
"먹자."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그 시작은 아버지였다.
즐거운 듯 웃는 표정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아들 덕분에 요즘 아주 즐거워."
"왜요?"
아버지는 연신 웃으며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운전 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녀석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아들한테 이런 선물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편인데 덕분에 요즘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중이라고 했다.
"만나기만 하면 우리 성이 얘기부터 물어보더라고. 맨날 뭐하냐고 난리야. 투자도 하고 작사도 하고 이모티콘도 내고 그러다 보니까 궁금한 모양이더라구."
"으흠."
"그래서 이제 조금 자제하려고. 최근 너무 자랑만 늘어놓은 거 같아서 좀 그래."
"에이, 이럴 때 자랑하는 거지, 뭐."
"그런가?"
"그럼."
"호호, 그러면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자랑할 거리를 하나 더 알려주기로 했다.
"참, 엄마."
"응?"
"사진 공모전에 사진도 냈거든. 그것도 자랑해."
"어머, 그래?"
"응. 그리고 며칠 내로 가족사진도 찍자. 아버지도 괜찮죠? 최근에 사진을 좀 제대로 배웠거든요."
"그래? 주말이면 괜찮지."
"가족 사진 찍으면 그걸로 또 자랑해야겠네."
웃는 어머니를 보다가 반응이 약한 동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 둘도."
"어어, 뭐. 그래."
"에이, 귀찮은데..."
귀찮다고 말한 류현아를 빤히 쳐다봤다.
"알았어, 알았다고."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때 어머니가 류현아를 보며 물었다.
"현아는 요즘 어때?"
"뭐, 나도 요즘 인기 급부상 중이긴 해."
인기가 급부상 중이라고?
이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다시 류현아를 쳐다봤다.
정말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인기? 네가...?"
"아오, 맨날 그 표정!"
"크흠."
"환이는?"
"귀찮아 죽겠어. 자꾸 태워달라고 난리야."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좋으면서 싫은 척하기는.
뭐, 류환의 경우는 정말로 귀찮을 가능성도 조금은 존재했다. 아무래도 디자인학과인 만큼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정말 많을 테니까.
"좋을 때지."
"귀찮다니까."
"즐겨."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며 다시 밥을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근데, 오빠."
"음?"
"최근 너튜브보다가 이상한 걸 찾았거든?"
"이상한 거?"
"응. 무슨 재단 이사장이라고 나왔는데 엄청 짧아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고. 근데 이름도 류성이고 흐릿하긴 한데 생김새도 오빠랑 닮아서."
"아, 그거?"
"응. 설마 오빠야?"
"어어, 맞아."
"진짜?"
다시금 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당황스럽진 않았다.
적당히 이야기를 해뒀던 상태였으니까.
무엇보다.
대단하다는 듯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전에 말했잖아, 적당히 후원도 하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
"후원하려면 법인 설립하는 게 낫더라고. 그래서 설립한 거야."
"아, 그래...?"
"어."
"그 공모전도 그럼 후원의 일종이고?"
"그렇지."
덕분일까.
가족 대부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갔다.
다만 한 사람.
아버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조각 공모전 말이냐?"
"네."
"최근 이슈라서 이야기를 좀 듣긴 했다만."
아마 작은 규모가 아니란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아버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믿음, 그리고 신뢰가 담긴 미소였다.
"보기 좋구나."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보거라, 좋은 일이니까."
"...그럴게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자극했다.
간질거리는 것이.
자그마한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
오늘은 류현아와 류환이 설거지 담당이었다.
"수고."
류성은 느긋하게 거실로 나갔다.
고로롱-
그러자 해먹 위에서 골골거리고 있는 럭키가 보였다.
"흐흐."
베란다 창문 높은 곳에 해먹을 하나 달아줬는데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 놓아준 캣타워를 타고 올라가서는 자연스레 해먹을 즐기는 중이었다. 마치 치즈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우면서도 신기했다.
"좋은가 보네."
냐아아아-
"근데 왜 이렇게 늘어져 있어? 떨어질라."
다가가서 자세를 조금 바꿔줬다.
균형감 있게.
이후 분홍색 뱃살을 만지면서 거실 뷰를 눈에 담았다.
해가 내려앉아 어두운 시각.
반짝이는 불빛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멋있지, 럭키야?"
대답 대신 골골거리는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따뜻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해먹에 눌어붙은 럭키를 쓰다듬었다.
[연계퀘스트 '어서 와, 정기후원은 처음이지?'가 갱신됩니다.]
그리고 마침.
기다리던 홀로그램이 연달아 떠올랐다.
[선행포인트 29점을 획득합니다.]
[상한선에 도달했습니다.]
[후원금액이 초기화됩니다.]
[소아병동의 키다리 아저씨!]
[소아병동 아이들 치유 진행 정도를 파악합니다.]
[파악 완료.]
[하급 랜덤카드를 습득합니다.]
[선행포인트 7점을 획득합니다.]
끝이 아니었다.
[착한 프랜차이즈!]
[지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점만 파악합니다.]
[파악 완료.]
[최하급 랜덤카드를 습득합니다.]
쏟아지는 보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크흐. 좋구만."
정기후원으로 29포인트, 소아병동으로 7포인트를 얻었다.
총 36포인트였다.
덕분에 현재 372포인트가 되었다.
그간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먼저 시인의 재능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흥미였다.
작사에 관한 흥미.
한 번 해보니 솔직히 취향에 맞았다.
"약속도 했고."
마이유에게 가사를 주기로 했었다.
시일이 꽤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약속을 지키는 게 옳을 터였다.
그래, 사자.
곧바로 상점을 오픈했다.
[재능]
1. 그림작가의 창의력(소모성)
필요 선행포인트 : 35
패시브 구매 필요 포인트 : 350
2. 차티스트의 눈(소모성)
필요 선행포인트 : 35
패시브 구매 필요 포인트 : 350
3. 재능 관찰자(3회)
필요 선행포인트 : 35
패시브 구매 필요 포인트 : 350
4. 시인이 보는 세상(소모성)
필요 선행포인트 : 35
5. 랜덤 재능
-각종 재능을 무작위로 지급한다.
필요 선행포인트 : 35
4번, 시인이 보는 세상을 선택했다.
[차티스트의 눈을 구매하시겠습니까?]
[1. 소모성]
[2. 패시브]
당연히 패시브 스킬로.
[재능 '시인이 보는 세상'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예를 선택하자 350포인트가 소모되었다.
[선행포인트 : 27]
정말 적은 포인트만 남은 상태였으나 걱정은 없었다. 돈을 불리기 위한 단타 재능인 '차티스트의 눈'이 존재했으니까. 주기적으로 단타만 해줘도 돈은 충분히 모일 터였다.
그렇기에 목표는 단순해졌다.
남은 재능을 차례대로 구매하고 그 이후부터는 랜덤 재능을 사서 재능의 개수를 하나씩 늘려나가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재능을.
전부 다 얻을 때까지 말이다.
*
사진 공모전에 내진 못했지만 다양한 사진이 여전히 파일로 남은 상태였다. 종류별로 나누면서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아, 이것도 좋은데."
공모전에 내지 못해 아쉬운 사진들이 꽤 보였다.
이것도 괜찮았고.
기회가 되면 다른 공모전에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뭐, 그때가 되면 더 많은 사진이 사진첩 파일에 모인 상태겠지만.
그때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것도 찍었던가?
워낙 많은 사진을 찍은 까닭에 기억에서 지워진 모양이었다.
"음...!"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흐린 영감이 떠올랐다.
부여잡기 위해 눈을 감고서 상념에 빠졌다.
서서히 영감이 짙어진다.
그래, 희망.
주제는 사진 공모전과 같은 희망이었다.
희망을 주제로 한 이야기.
시인의 재능이 펼치고자 하는 단어들이 몽글거리며 형태를 갖춰나갔다.
번뜩.
눈을 뜨고서 손을 움직였다.
탁, 타다닥.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느새 백지 위로 글자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덤덤한 발걸음을 내디뎌 보지만
마음은 무거워지고
시야는 어둠에 삼켜져]
[고개를 들어 봐
보이진 않아도
무수한 별들이 떠있어
길을 비춰줄 거야]
[눈앞에 새겨진 별빛 따라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순식간에 가사를 적어 내려갔다.
"후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완성된 상태였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시간이 사라진 느낌이기도 했고.
"신기하네."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류성이 천천히 가사를 읽어봤다.
"이 정도면..."
영감은 가라앉았으나 감각은 여전했다.
그 감각이 외쳐댔다.
아주 좋은 가사가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
요즘 자꾸만 음악 작업이 막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로드매니저가 조심스레 물었다.
"잘 안 되지?"
"응, 생각보다 더디네."
"산책하러 갈까?"
"아니야, 조금만 더 해볼게."
"그래, 무리하지 말고."
"응, 걱정하지 마."
마이유는 애써 웃으며 작곡 작업을 이어갔다. 잠깐 자리를 비켜줘야겠다고 여긴 로드매니저가 몸을 돌려 작업실을 벗어났다.
스윽.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몇 가지를 확인했다.
그러던 중 파일이 첨부된 메시지 하나를 발견했다.
"음? 이건..."
류성 작사가가 보낸 것이었다.
클릭해서 내용을 확인했다.
[늦은 밤이라 메시지만 보냅니다.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주세요.]
스크롤을 내려보니 가사였다.
"아...!"
그는 다급히 작업실로 들어갔다.
"이유야!"
"응? 왜 그래, 오빠?"
"여기, 가사!"
"가사...?"
"어, 그 류성 작사가님이 가사 보내주셨어!"
"진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마이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그가 내민 스마트폰을 받아들고서 가사를 읊조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덤덤한 발걸음을 내디뎌 보지만
마음은 무거워지고
시야는 어둠에 삼켜져]
마치 지금 본인의 모습 같았다.
앞이 보이질 않는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그래서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견디지 못한 로드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이유야. 어때...?"
"아."
그 질문에 정신을 차린 마이유가 대답했다.
"별산책."
"응?"
"제목이야, 괜찮지?"
"별산책이라. 좋은데?"
"히히."
마이유는 해당 가사를 토대로 다시 작업을 이어갔다. 막혀있던 구간이 뻥하고 뚫리면서 순식간에 가사와 어울리는 곡이 태어났다.
♩♪♫♬♭♪♫-
마이유는 곧바로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가사였다.
희망찬 노래였고.
잔잔하면서도 밝은 곡조가 딱 그녀에게 어울렸다.
"어때?"
노래를 모두 들은 매니저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최고지, 뭐."
"이거 타이틀로 갈래."
"그래, 그러자."
누가 들어도 호불호 없이 좋아할 노래였다.
타이틀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아침 일찍 마이유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진짜 고마워요!)
"약속이니까요."
(히히, 그래도 계약은 작성해야 하니까 시간 될 때 오세요. 아, 오늘은 어때요?)
"음, 점심에는 괜찮을 거 같네요."
(그럼 그때 뵐게요!)
"네."
가사를 준 건 준거고.
계약은 계약이었다.
이걸로 류성이라는 작사가의 두 번째 곡이 곧 세상에 발표될 터였다. 마이유라는 아티스트를 통해서 말이다.
"어떠려나."
과연 어떤 곡을 완성했을까.
궁금했다.
계약하러 가게 되면 들어볼 수 있으리라.
"다녀오겠습니다."
"운전 조심하고!"
"네."
대답하면서 신발을 신으려는데 럭키가 다가와 얼굴을 비벼댔다.
냐아아아.
가지 말라는 듯 애교를 부리는 녀석. 참 귀엽기는 한데, 이럴 때마다 떼어놓고 가려니 마음이 조금 아파진다.
"저녁에 보자, 럭키야."
그래도 오전에는 어머니가 집에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휴, 애교부리는 것 좀 봐."
어느새 베란다로 나온 어머니가 럭키를 덥석 안아 들었다. 그리곤 앞발을 조심스레 쥐더니 인사를 하듯 흔들었다.
"잘 갔다 오라네. 어서 가."
"흐흐, 알았어."
럭키도 외롭지 않을 테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집을 나섰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