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온 길(1) >
류성은 가만히 기다렸다.
진료가 끝날 때까지.
"가볍게 배탈이 난 거 같으니 따뜻하게 해주시고요. 잘 때는 이불 꼭 덮고 주무세요, 할머니. 아시겠죠?"
"그럴게요, 정말 고마우이."
웃으며 떠나는 마지막 환자가 보였다.
그제야 천막이 조용해졌다.
"으음...!"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는 한석호에게 다가갔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많이 아프세요?"
한동안 신음하던 그가 손을 저었다.
"후우, 괜찮아요, 괜찮아. 그보다 아까부터 기다리시던데..."
"네, 너튜브보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왜 찾아오신 건지?"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허허, 고마운 말이군요. 근데 괜찮아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야죠."
류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움을 받는 걸 꺼리시나요?"
"스스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이 마을 주민분들은요?"
"음...?"
의아한 듯 고개를 드는 한석호.
류성이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천막에서의 진료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느낀 그만의 생각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여기 살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들인가요?"
"그건..."
"제가 볼 때는 충분히 잘 걸어 다니시고 몇 분은 운전도 하시던데요. 오히려 환자라고 찾아온 사람들이 선생님보다 더 건강해 보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시내로 나가서 병원에 들를 수 있어 보였고요. 그런 분들도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으며 웃으셨죠. 그런데 왜 선생님은 돕기만 하시고 도움을 받진 않으시는 걸까요? 그 이유가 궁금하네요."
그 말에 한석호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뭔가 실수라고 한 걸까 싶었지만 분명히 그건 아니었다.
그저 차분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안한 듯 옆에서 지켜보던 '인생의길' 채널 주인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한석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군요."
"네?"
"왜 그랬을까요? 저도... 정확하게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문제군요. 돕는 건 그저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었고 사명이었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인 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 숨을 쉬듯이, 난 그냥 누군가를 돕기 위해 의술을 펼쳐야 하니까요. 하지만 도움을 받는 건 어려웠다고 하면 될까요. 으음, 그것도 아닌 거 같고..."
말을 흐리는 그의 모습.
"그냥, 나도 모르게 그랬던 거 같군요. 주변에서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스러워졌다고 하면 될까요. 모든 도움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무섭습니다. 그쪽이 날 도우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요."
그 순간, 한석호의 표정에서 힘이 풀렸다.
고집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왠지 이때를 놓치면 안 될 거 같은 마음에 다시 청했다.
"한석호 선생님, 저는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유를 몰라 두렵다고 하셨죠?"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한석호가 류성을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허공에서 얽혀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도움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게 제가 선생님을 돕는 이유입니다."
"그런...“
"그러니 제대로 도와드려도 될까요?"
"진심입니까?"
"네."
흔들리지 않는 류성의 눈빛에 한석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격, 자격이라... 그런 이유는 정말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하게 제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요."
"...그렇군요."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럽시다."
겨우 첫발을 떼었다.
하지만 진짜 대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럼 재활을 최우선으로 해서..."
그 순간 한석호가 손을 들었다.
"조건을 걸지요."
"어떤...?"
"그래도, 환자를 보는 게 최우선입니다."
"한석호 선생님 말씀은 의료 봉사가 최우선이라는 얘기신 거죠?"
"맞습니다. 제 건강은... 그 다음으로 하죠. 도움은 받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으음."
"사람은 살기 위해서 숨을 쉬죠. 저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그래야 합니다. 멍청하고 답답하게 보여도 그게 내가 살아온 길이고 살아갈 길입니다. 제 조건, 받아줄 수 있겠어요?"
류성의 눈이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나머지 부분은 저한테 맡겨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류성은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대한한성 종합병원 원장실 내부.
"흐음."
병원장은 커피를 마시면서 어제저녁 있었던 일을 떠올랐다. 늦은 밤이라 연락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부탁을 하나 해왔던 RS재단의 젊은 이사장.
-정말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한석호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아, 후배셨군요.
-제가 그분을 꼭 돕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침, 재단 측에서 후원을 조금 더 늘릴 계획이었거든요.
-소아병동뿐 아니라 다른 병동 후원을 병행할 계획이어서요.
-네, 정말로요.
-한석호 선생님을 돕는 이유요?
-보답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마지막 말에 홀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석호, 그 녀석 정말."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 줄이야.
대견하면서도 답답했다.
하지만 보답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돕겠다고 대답했다.
앞선 병동 후원은 거절하면서 말이다.
-어, 후원을 거절하신다구요? 근데 진짜로 본래 시작하려던 부분이라서요.
-이번 부탁을 빌미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른 병원도 실시할 예정이라...
그 말에 웃고 말았지만.
"너무 무심했군, 무심했어."
갑자기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녀석, 그때도 그랬는데.
추억에 빠져 씁쓸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다.
"네, 대한한성 병원장입니다."
(접니다, 병원장님.)
"그래요. 그 친구는 만나고 있나요?"
(네, 바로 옆에 있어요.)
"호오."
(어제 그 이야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곧이어 목소리가 바뀌었다.
(여보세요?)
"나다, 석호야."
(예...?)
"나라고, 내 목소리 벌써 잊은 거냐?"
(설마, 정호 형님?)
"그래, 이 녀석아."
(아니, 그...)
"소식이 안 들려서 잊고 살았는데. 아직도 그렇게 지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그건 됐고.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예.)
"우리 병원으로 와."
(죄송합니다.)
"그냥 오라는 거 아니다. 네가 원하는 무료 진료 봉사, 원 없이 하게 해주마. 국내건 해외건 어디건, 원하는 대로 전부 말이다. 지원도 제대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이동해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진료를 보란 얘기야. 당연히 주기적으로 여기서 치료도 받고!"
(예...?)
"나도 같이하자고, 이 녀석아!"
(형님...)
"여전히 답답하게 구는구나. 자세한 얘기는 거기 있는 이사장님한테 들어라."
(어, 그게...)
"오는 거로 알고 끊으마. 조금 뒤에 보자."
통화를 종료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한동안 바빠질 모양이었다.
*
류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들으셨죠? 원하는 무료 진료 봉사,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혼자가 아니라 병원 지원까지 포함해서요. 주기적으로 의사와 간호사가 따라붙는 건 물론이고 제대로 된 의료 도구까지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해외로 넘어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되고요."
"...허허."
"원하는 걸 들어드렸습니다, 저는."
한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거절할 수가 없겠군요."
"가시는 거죠?"
"가야죠. 근데, 치료비용도 거기서 지원해준답니까?"
"그건 제가 해드릴 겁니다."
"사실 몸이 많이 안 좋아요.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 겁니다. 특히나 전문 재활 치료는 대부분이 비급여 항목이라..."
기본적인 물리치료가 아닌 전문 재활 치료는 비급여 항목이 대부분이었다.
그 탓에 금액도 상당했고.
하지만 류성에겐 정말 부담 없을 돈이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남는 게 돈이라서요."
"아...?"
"그러니까 이제 가시죠."
"그래요, 갑시다."
이동하면서도 한석호는 그다웠다.
"근데 말입니다."
"네."
"오늘부터 재활을 시작해도 내일 무료 진료 봉사는 나올 수 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숨 쉬듯이 해야 하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긴 했지만.
이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그렇게 만들어드릴게요."
"예?"
"대신 몇 가지 더 부탁을 드릴 테니까 그대로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럽시다."
"분명, 그러겠다고 대답하셨어요?"
"그래요, 했습니다."
류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했던 걸 실행에 옮겼다.
*
병원장과 한석호는 따로 긴 대화를 나눴다.
"석호야, 앞으로는 자주 좀 보자."
"알겠습니다."
"그래, 치료 잘 받고."
"예, 형님."
이후 재활 치료사가 기본적인 검사를 시작했다.
"음, 체력이 많이 부족하신 거 같아요. 근육이 많이 없고요."
"그런 편입니다."
"지금 컨디션으로는 제대로 된 재활 치료는 무리에요. 적어도 이틀은 푹 쉬면서 컨디션부터 회복을 시켜야 합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습니까?"
"으음. 활기를 채울 수 있는 가벼운 동작 위주의 재활운동은 가능합니다."
"그럼 그거라도 합시다."
"그조차 힘드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무리가 가지 않게 잘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동작 위주의 재활 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움직임조차 그에겐 힘든 모양이었다.
"후우..."
어느새 한석호의 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후아, 수고했습니다."
한석호는 지친 표정으로 치료실을 나섰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네. 근데 지금까지 절 기다린 겁니까?"
"그럼요. 오늘은 끝까지 모셔야죠."
"으음..."
"내일부터는 직원을 붙여드릴 거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자, 그러면 모시겠습니다."
"어딜 말입니까?"
"선생님, 오늘은 제 말을 따라주시기로 했죠?"
"그, 그랬지요."
"그러면 가시죠."
어색해하는 그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병원 근처 호텔이었다.
"여기는..."
"들어가시죠."
"비쌀 텐데요."
"괜찮습니다."
여기라면 피로를 제대로 풀 수 있으리라.
괜찮은 시설도 많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 혼자 지내기에 충분히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적어도 재활 치료하는 동안은 여기서 지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거절할 수도 없을 터였다.
"웬만한 건 전부 다 있으니 불편한 점은 없으실 거예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전담 매니저에게 말하면 되고요. 비용 걱정은 전혀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근육을 조금 더 풀어줄 수 있는 전문 스포츠 마사지사도 불렀어요. 지금은 힘드실 거 같아서 저녁에 예약을 잡아뒀고요."
"스포츠 마사지 말입니까?"
"네. 재활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 도움이 될 겁니다. 그냥 쉬면서 마사지 받는다고 생각해주세요. 식사도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거로 호텔 측에 말해뒀습니다. 고기를 특히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한석호가 류성을 쳐다봤다.
"정말 이래도 될지..."
"선생님은 의료 봉사가 최우선이라고 하셨죠?"
"그랬지요."
"저는 선생님의 컨디션이 최우선입니다. 그렇다고 의료 봉사를 막으면 도움조차 안 받으실 거 같아서 제 나름대로 준비한 겁니다. 그러니 거절하지 마세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그러면 샤워하시고 푹 쉬세요. 내일부터는 다른 직원을 보내도록 할게요."
"저기."
"예, 선생님."
잠깐 망설이던 그가 류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너무 늦었군요. 고맙습니다, 정말로."
"...저야말로요."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물론 이게 시작이겠지만.
류성은 열과 성을 다해 그에게 제대로 된 보답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