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 >
“아예 우리 회사 전속 작사가로 들어오실래요?”
갑작스러우면서도 꽤 난감한 제안이었다.
“그건 어렵겠는데요.”
“으으, 아까워라. 너무 고민도 안 하고 대답하시는 거 아니에요?”
류성의 거절에도 크게 슬퍼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장난스럽다고나 할까.
그녀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을 때 이미 그런 낌새를 눈치챈 류성이었다.
“농담인 게 티가 나서요.”
“앗, 그랬나요?”
“네.”
“하긴, 엄청나게 큰 재단도 운영하시는데 어떻게 전속 작사가로 오겠어요. 으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짜 혹시 모르니까 하는 얘기에요. 정말 나중에, 만에 하나라도 생각이 바뀌면 꼭 연락 주세요! 이건 농담 아니에요!”
“그럴게요.”
“진짜죠?”
“네, 생각이 바뀌면 제일 처음으로 연락할게요.”
“앗싸! 아, 그리고 이 가사도 계약하는 거죠?”
“물론이죠.”
“좋아요! 이번에도 최고 대우로 해드릴게요!”
“감사히 받아들이죠.”
그렇게 함께 점심을 먹고 회사로 향해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검토받은 계약서와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미룰 이유가 없었다.
“바로 사인할게요.”
“네!”
그렇게 두 개의 계약서를 넘겼다.
“일단 별산책은 이번 달에 발표될 거예요.”
“별산책이라면……?”
“아, 얼마 전에 주신 가사요. 제목을 별산책으로 지었거든요.”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앨범 타이틀이니까 아마 반응도 괜찮을 거 같아요.”
기대하긴 했지만, 타이틀이라니.
“저작권료도 상당할 거예요.”
“그렇겠네요.”
“그럼 다음에 또 가사 좋은 거 나오면 꼭 알려주세요!”
“네.”
류성은 짧게 대답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후우.”
좋은 일이 이어졌지만.
사실 기분은 영 좋지가 않았다.
계속 그 말이 생각났다.
마이유와 대화를 나눌 때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거지새끼라.”
왜 이리도 화가 나는지.
아마 마이유도 류성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쾌활하게 대해준 건지도.
“괜히 미안하네.”
다음에 더 좋은 가사를 써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회사로 향했다. 안 그래도 오후 2시부터 정기회의가 진행된다. 거기에 지금 류성을 괴롭히는 사안을 끼워 넣기로 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의견이 필요할 때였으니까.
* * *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오후 정기회의를 진행했다.
대규모 회의실.
차분한 어조로 그간의 일을 정리했다. 한편으로는 몇 가지 사안을 언급해 직원들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지난주에 공지했었죠? 힘든 사람들을 지원해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 싶어서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차례대로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찾아보니까 평생을 봉사하면서 지낸 분들이 생각보다 많으시더라고요.”
“그래요?”
“네, 근데 정작 그분들은 힘들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으음.”
“지난주에 이사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들은 충분히 보답받을 자격이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좋네요. 그러면 지금부터 봉사에 인생을 바친 분들을 찾아내고 그분들을 도울 방안을 마련해 보죠.”
“네!”
“음, 이 부분은 송이 씨가 책임지고 맡아주세요.”
“네, 이사장님!”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 마지막 안건을 끄집어냈다.
“폐지 줍는 분들을 어떻게 후원해야 할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 건가요?”
“좀…… 어렵더라고요.”
“네, 마땅한 방안이 영…….”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항상 조용하게.
하지만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홍보 담당 직원 백성욱이었다.
“어제 우연히 괜찮은 걸 발견했습니다.”
“그래요?”
“네. 근데 시간이 부족해서 보고서는 아직 못 만들었고요.”
“괜찮아요, 대략 설명만 해주세요.”
“리사이클 사업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리사이클 사업, 그러니까 재활용 사업을 하자는 얘기군요?”
“네, 그분들이 폐지 줍는 일을 하는 건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마땅치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냥 해왔던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으흠.”
“거기에 공부를 조금 해보니 사업성까지 갖추고 있는 거 같았고요.”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미 해오던 일을 한다.
거기에 사업성까지 추가한다면.
괜찮지, 그건.
폐지를 비싼 가격에 매입해서 재활용 사업을 실행한다면 지속적인 후원은 물론이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자금을 부담 없이 더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백성욱 씨.”
“네……!”
“보고서 작성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내용이 괜찮으면 그대로 진행하도록 할게요. 잘 되면 보너스도 드릴 테니까 파이팅입니다.”
“네, 이사장님!”
즐거움은 여기까지였다.
“후우, 본래라면 여기서 회의를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추가 안건 하나만 더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류성은 심각한 어조로 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그때 지나가던 아이가 그러더군요.”
직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당연히 좋지 않은 단어가 나올 거라는 건 예상이 되었다.
“거지새끼.”
“네……?”
“인아를 보며 거지새끼라고 하더군요.”
“뭐, 뭐라고요?”
“아니, 그게 무슨…….”
부사장은 물론이고 직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들이,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네.”
“허, 진짜…… 도대체.”
“충격이네요.”
류성이 손을 들었다.
혼란을 억눌렀다.
“그래서 의견이 필요해요. 가감 없이 말해주시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어른이 나서 아이를 혼낼 순 없겠죠. 그렇다고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요.”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방침이 어떻게 되는 거죠?”
“돈을 쓸 겁니다.”
“돈이요?”
“네. 거지라는 말을 들었으니 돈을 써서 생각을 바꾸게 만들어야죠. 그 말도 안 되는 생각 자체를 지워 버리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류성의 말에 다들 표정이 굳었다.
“그렇군요.”
“조금 화나네요, 저는.”
“저도요.”
“전 화가 많이 납니다. 후원받는 아이가 욕을 먹었는데 욕을 한 아이랑 그 아이의 부모에게 돈을 써야 한다니…….”
직원의 말에 류성도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요. 당연히 화가 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찍소리조차 할 수 없게 돈으로 짓눌러 버릴 겁니다.”
짓눌러 버린다는 말에.
그제야 부사장도 직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돈을 활용한 각종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일단 먹을 거로 공략을…….”
“좋군요.”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먹을 거에 약하니까요.”
“그리고 학교 부대 시설도…….”
“그 아이들의 부모한테도 인지시켜야 하고요.”
“네, 그러기 위해서는…….”
“장학금을 크게 후원하면서…….”
정말 다양한 방안들이 튀어나왔다.
모두가 진심이었다.
후원받는 아이가 욕을 먹었다는 사실에 저들 역시 분노했으니까.
“좋습니다. 지금 한 이야기들 정리해서 하나씩 진행하죠.”
“전부 다요?”
“네, 아까도 말했듯이 돈의 무게를 느끼게 만들 겁니다.”
“알겠습니다……!”
“추가로 하나 더 말씀드리죠. RS재단에서 후원하는 아이들 그 어떤 한 명도 그런 상처를 받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다른 아이들의 학교생활도 파악해야겠습니다.”
“아, 물론이죠!”
“확실히…….”
“으음, 다른 아이들 역시 그런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맞습니다.”
“그럼 일단 파악부터 시작해보죠.”
“네!”
“오늘 정기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다시 업무가 시작되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 *
사진 공모전 심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대한민국 시총 1위 기업, 성삼전자. 그곳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부회장이 심사장에 도착했다.
“이제 막바지겠군.”
“맞습니다, 회장님.”
“그럼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
부회장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중앙 자리에 앉으니 전방에 스크린이 내려왔다.
“대상 후보작은 총 다섯 개입니다.”
“즐거움은 마지막이어야겠지. 우수상 후보작부터 차례대로 보겠네.”
“예, 회장님.”
사진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우수상 후보작이 대거 화면에 담겼으나 부회장의 기준에 닿는 작품은 없었다.
“나쁘진 않지만 아쉬워.”
“최우수상 후보작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엔 부회장이 자세를 살짝 바꿨다.
기준에 와닿은 것이다.
“좋군. 이게 최우수상 후보작이라고?”
“예, 부회장님.”
“지난번 대상작 후보작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이번 출품작의 수준이 특히 좋았습니다.”
“대상 후보작이 아주 기대되는군.”
충분히 사진을 감상한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우수 후보작은 전부 구매하도록 하지.”
“준비하겠습니다.”
이어서 대망의 대상 후보작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단 한 장의 사진이 화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첫 번째 대상 후보작입니다. 해당 사진은 비가 많이 쏟아지는 날 서울 강남이 물에 살짝 잠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흐음.”
“작품의 제목은 온난화입니다.”
“그럴 거 같더군.”
온난화로 인해 매년 해수면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그로 인해 비가 올 때마다 지대가 낮은 지역은 침수되는 것이다. 그 현실에 경각심을 심어주는 미래지향적인 사진이었다.
“어둑한 분위기가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다음 사진으로 넘어갔다.
체육관 계단을 밟고 오르는 아이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으음……!”
부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스크린에 떠오른 사진을 눈에 담았다.
달랐다.
이건 앞선 사진들과 너무나 달랐다.
미적 감각, 균형감.
아이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열망까지. 뛰어난 사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이고 그걸 넘어서는 감성적인 부분도 존재했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자꾸만 추억을 자극한 것이다.
“허, 허허…….”
그 또한 저러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라면서도 항상 단 하나만을 원했으니까.
성삼전자 그룹.
그 모든 것을 갖기 위해 죽도록 달려왔다.
이제 그 끝이 보이건만.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 것인지. 그런데 죽어가던 불꽃이 저 사진 한 장으로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강한 의지가 솟구쳤다.
“좋구나, 참으로 좋아.”
“다음 사진으로…… 넘어갈까요?”
“으음, 아니, 조금만 더.”
“예, 부회장님.”
한참을 음미하던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누구 사진이지?”
“류성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진작가입니다.”
“처음 듣는군.”
“예, 신인으로 보입니다.”
“……놀랍군.”
사진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강당 사진이었다.
느껴지는 감정은 다르지만, 이 또한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허어…….”
올바른 길로 나아가라는 미래. 그런 성인으로 자라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사진 한 장이 그를 질타했다.
지금껏 걸어온 사투와도 같았던 삶이 하나씩 떠오르며 과연 그게 진정 올바른 길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
“……상념이 짙군.”
여러 생각이 끼어드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의 주인은 누구지?”
“전 사진과 동일한 인물입니다.”
“류성.”
“예, 부회장님.”
“대단하군, 다음 사진을 보도록 하지.”
소아병동 사진이었다.
……우습구나.
이 나이를 먹고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결이 비슷한데.”
“예, 맞습니다. 같은 사진작가입니다.”
“그를 꼭 시상식에 부르게.”
“알겠습니다.”
“궁금하군, 어떤 사람일지.”
대상은 그렇게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