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재능이 쏟아져 246화
157. 피아노(2)
피아노를 그만둔 세월만 10년이 넘었다.
그 공백이 너무 컸다.
“나는 더 알려줄 수가 없으니.”
한참을 고민하던 선생님은 박세연의 부모님과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전화를 걸고 약속을 잡은 뒤 바로 가정을 방문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말은 해야 하니까.
안으로 들어가 박세연의 아버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어요.”
“허어, 제 딸이 말입니까?”
“네, 아버님.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요”
“하, 하하…… 좋네요. 정말 좋아요. 이런 무식한 아비한테서 그런 재능이 태어나다니. 제가, 제가 어떻게 해서든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꼭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일단 학원을 보내는 게 좋아요.”
“학원이라면?”
“하나만 가르치는 학원은 되도록 피하시고요. 바이엘, 체르니, 베스틴, 알프레드 등. 피아노 선생님이 여럿 존재하면서 아이들 상태에 맞게 가르쳐 주는…….”
말을 하던 한소유 선생님이 입을 다물었다.
비용이 너무 비쌌으니까.
“왜 그러세요, 선생님?”
“어. 그게…… 아무래도 단일 교육법을 가르쳐주는 학원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요. 피아니스트를 기르기 위한 전문 학원은 아무래도 시간당 10만 원이 훌쩍 넘을 테니까요. 주에 두 번, 세 번만 받아도 한 달이면…….”
“예? 시, 시간당 10만 원이요?”
“……네.”
그제야 현실의 냉혹함을 깨달았다.
서글프게도.
박세연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생긴 일이었다. 웬만한 학원에선 제대로 배울 게 없었다. 그렇기에 정말 유명한 전문 학원에서 배워야만 했다.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거 같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박세연의 아버지가 고개를 떨궜다.
참담한 심정이리라.
“아버님. 저도 어떻게든 한번 알아볼게요.”
“예……?”
“세연이 재능이 너무 아까워서요.”
“……감사합니다, 정말.”
“아버님도 포기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연락 드릴게요, 아버님.”
“예.”
선생님이 돌아가고 홀로 남은 박기식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후우.”
딸이 재능이 있다는데 어찌 그냥 두고만 볼 수 있을까.
뭐라도 해야만 했다.
곧바로 주변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그도 딸아이의 미래가 찬란하기를 원했으니까.
“어, 그, 난데 말이야. 혹시 피아노에 관해서 좀 알아? 어, 그게…….”
이렇다 할 뭔가는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연락을 돌렸다.
몇 명에게 전화를 건 걸까.
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거 같다는 불안감이 크게 차올랐을 즈음.
-어, 형님. 그거 말이에요.
“어, 왜? 뭐 좀 알아?”
-조금이요.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형님, 혹시 RS재단이라고 아세요?
“어어, 알지. 요즘 유명하잖아.”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도와주는 곳이기도 하고요.
“아, 맞아.”
-거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후원 신청 게시판이 있거든요?
“어, 그, 그래?”
-네. 요즘 거기서 예체능 계열 아이들한테 후원을 많이 해주더라고요. 거기 한번 신청서 넣어보시죠?
“그런 게 있었어? 알았어. 고맙다, 정말 고마워!”
-뭘요. 그냥 알고 있는 거 얘기만 해드린 건데요.
“이런 것도 난 잘 모르니까…….”
-그러면 형님.
“어?”
-신청서 넣는 것도 좀 어려울 수 있거든요.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도 좀 할 겸 지금 저랑 만나시죠? 제가 옆에서 좀 도와드릴게요.
“……고맙다, 정말.”
-어휴, 괜찮아요.
희망을 발견한 그는 공부 중인 딸아이를 슬쩍 쳐다본 후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응, 저녁 전에는 오지?”
“그럼. 와서 같이 밥 먹어야지.”
“알았어.“
요즘 들어 쾌활해졌다 싶었더니.
피아노 덕분인 걸까.
그는 걱정과 기대를 안고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생을 만나 함께 후원 신청서를 넣었다.
“서류는 크게 준비할 건 없네요.”
“오, 그래?”
“네. 아마 직접 와서 면담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모양이에요. 아니면 면담부터 하고 이후에 서류를 내거나.”
“그렇구만.”
“일단 신청은 해놨어요.”
“고맙다.”
“고마우면 나중에 저녁이나 사요. 오늘은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나 좀 하고요.”
“그래, 그러자.”
“근데 딸이 피아노를 잘 치나 봐요, 형님?”
“솔직히 나는 안 들어봤고.”
“그럼요?”
“음악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왔더라고.”
“이야, 그 정도면 진짜 재능이 있나 본데요?”
박세연 이야기를 하자마자 박기식의 표정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얼마나 자랑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오늘 있었던 일과 최근 딸의 달라진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 * *
캘리그라피 공모전 개막식 일정이 공지사항으로 올라갔다.
많은 이들이 기다려왔던 걸까.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뜨거웠다.
[드디어 나온 캘리그라피 공모전 일정!]
[캘리그라피 공모전, 축제 되나?]
[세계 최대 규모의 캘리그라피 공모전, 서예 대가들도 참여하겠다고 선언!]
[엄청난 참가 인원!]
[개막식부터 차원이 다를 거라 언급]
기사도 계속해서 쏟아졌고.
각종 게시판에서도 캘리그라피 공모전 관련 이야기가 다시금 솟구쳤다.
-오오, 일정 나왔네요!
-듣기로는 참가 인원이 진짜 엄청나다던데요?
-그래서 예선전도 1, 2차로 나뉘나 보네요
-기대되네요 진짜ㅋㅋ
-약간 월드컵이나 올림픽 느낌 나요ㅎㅎ
-저두요!
-전 그때보다 더 설레요ㅎㅎ 직접 참여해서 그런 거겠죠?
-오, 맞아요. 진짜 기대하는 중^^
-요즘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ㅎㅎ
-저두요!
-전 지금도 직장에서도 몰래 쓰는중...!
-재밌네요 이거 은근ㅋㅋ
-너튜브에 보면 서예 대가님들 많으신데 따라서 쓰면 진짜 시간이 순삭이에요!
-ㅇㅈ해요ㅋㅋ
-크, 그분들도 참여하겠죠?
-아마도요
-진짜 멋있을 듯...!
-어라, 근데 토, 일요일에 예선전이 집중되어 있네요.
-좋은 듯!
-다행이죠ㅎㅎ
-본선에 오르면 월차랑 년차 써야겠지만요!
-그 정도야 뭐ㅎㅎ
류성은 해당 게시판의 실시간 채팅을 주시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관심이 뜨겁네.”
이제 계획했던 대로 실행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몸이 조금 뻐근했다.
“으차.”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커피나 한잔해야지.
휴게실에 몇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류성을 보더니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네, 편하게 쉬세요.”
웃으며 대답해 준 뒤 궁극의 커피를 만들었다. 뒤를 슬쩍 쳐다보니 직원들이 힐끔 쳐다보는 중이었다. 일단 입사를 하면 직접 궁극의 커피를 타다 줬기 때문에 그 맛을 잘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거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직원이 너무 많아져서 이젠 일일이 커피를 타줄 수 없었다.
경리, 업무, 홍보팀.
최근 신설한 대응팀까지.
팀을 이끄는 대리급 직원과 부사장에게만 커피를 타줄 생각이었다. 다음에는 주임급 직원에게까지 커피를 타주고.
별거 아니겠지만.
이것도 나름의 대우라 할 수 있었다.
“전 먼저 가볼게요.”
“아, 네!”
“들어가세요, 이사장님!”
사무실로 들어가 부사장님에게 한 잔.
“어머, 잘 마실게요.”
“맛있게 드세요.”
홍보팀 백성욱 대리에게 한 잔.
“헛,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뭘요, 천천히 드시고요.”
업무팀 최송이 대리에게 한 잔.
“잘 마실게요!”
경리팀 임나연 대리에게 한 잔.
최근 신설한 대응팀 박영준 대리에게도 한 잔을 건넸다.
“앗, 감사합니다. 헤헤.”
“우와, 궁극의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류성은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잔을 손에 들고서 옥상 공원으로 향했다.
“후아, 날씨 좋네.”
머릿속으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특히 음료 사업.
건강 음료를 구상하는 중이긴 하지만.
“커피도 괜찮겠지.”
초궁극의 커피를 한정으로 제작해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벌써 흡족해졌다.
그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하고.
“언제 연락이 오려나.”
계획을 정리하며 마시다 보니 어느새 커피 한 잔이 사라졌다.
다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다만 공모전 일정이 공지사항으로 나가면서 개막식이 열릴 때까지는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없었다.
워낙 준비를 잘해놨으니까.
“흐음.”
고민하다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후원 신청서>를 확인했다. 외부 인원들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는 있지만,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나도 좀 볼까.
최근에 올라온 신청서 몇 개를 확인했다.
이건 별로고.
영 거짓말처럼 보이는 건 뒤로 넘겼다.
“이것도 애매하고.”
몇 개나 그렇게 넘겼을까.
오랜만에 깔끔한 신청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확인해봐야겠는데.
곧바로 김만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이사장님!
“만호야, 지금 후원 신청서 보고 있거든?”
-아, 네.
“거기 1,917번째 신청자는 내가 만나볼게.”
-1,917번이요?
“맞아.”
-알겠습니다!
“그래, 고생하고.”
-고생은요, 즐겁게 뛰고 있죠.
“덕분에 든든해, 알지?”
-흐흐,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끊는다.”
류성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전화를 끊었다.
자, 그러면 이제 가볼까.
사무실을 나서면서 서류에 적힌 신청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반갑습니다. RS재단 이사장입니다.”
-어, 아, 바, 반갑습니다!
“제가 직접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무, 물론입니다!
“그러면…….”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네, 그럼 근처 카페에서 뵙겠습니다.”
차를 끌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신청자는 딸의 아버지였다.
“저는 이사장, 류성이라고 합니다.”
“박기식이라고 합니다.”
“놀라신 모양이네요.”
“후아, 네. 솔직히 재단 이사장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열심히 움직여야죠. 그보다 따님의 피아노 재능이 뛰어나다고 적으셨던데요.”
“네, 맞습니다.”
“직접 들어보셨을까요?”
박기식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들은 건 아닙니다.”
“그러면……?”
“딸이 중학교 1학년인데 음악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오셨죠. 딸 아이의 재능이 정말 뛰어나다면서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우면 좋을 거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학원비용을 듣는 순간 차마……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음, 그랬군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신청서를 넣었습니다.”
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님의 이름이랑 학교가 어떻게 되죠?”
“세모 중학교 1학년, 박세연입니다.”
“좋습니다.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움직이시는 건 어떨까요? 박세연 양의 피아노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은 하셔야 하니까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버님.”
“네.”
“무작정 후원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가시죠.”
박기식은 걱정과 기대로 얼룩진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디……
딸 아이의 재능이 뛰어나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