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재능이 쏟아져 249화
159. 1차 예선전(1)
공장 인수가 마무리되었다.
커피 레시피도 넘겼고.
의견을 충분히 교환해 프리미엄 제조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레시피를 토대로 세심하면서도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캘리그라피 공모전 개막식이 열렸다.
저벅-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는 류성.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단상 중앙에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반갑습니다, RS재단 이사장 류성이라고 합니다.
가벼운 인사에 우레같은 함성이 터졌다.
조금 과할 정도긴 하지만.
류성은 그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캘리그라피 공모전을 많은 사람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했습니다. 그래서 개막식도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아마, 꽤 재밌을 겁니다. 마음껏 즐기시고 오는 주말에 시작되는 예선전도 흥미롭게 지켜봐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공모전에 참여해주신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이상입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짝짝짝-
박수가 크게 들려왔다.
류성은 단상에서 내려왔고 뒤이어 본격적인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그럼, 개막 불꽃쇼를 보겠습니다!
단상 뒤쪽에서 엄청난 폭죽이 하늘로 솟구쳤다.
파아앙! 팡파바방!
폭죽이 터지면서 불꽃이 원형을 그리며 퍼졌다.
아름다웠다.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길 대규모 불꽃놀이였다. 관객 모두가 감탄하며 즐기는 사이에 류성은 뒤쪽 대기실로 향했다.
똑똑.
가장 먼저 1번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이 열리면서 매니저가 얼굴을 내밀었다. 류성을 알아보고는 눈이 커졌다.
“엇, 들어오세요!”
“고맙습니다.”
내부로 진입하자 이제 막 메이크업을 끝낸 듯한 마이유가 보였다.
“앗, 작사가님! 아니, 이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하게 불러도 돼요.”
“히히, 그럼 작사가님으로 부를게요!”
“그래요.”
마이유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번에 행사비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요.”
“무슨 인사요?”
“고맙다구요.”
“에헤이. 그냥 저도 돕고 싶어서 그런걸요. 오히려 해줄 수 있는 게 노래 두 곡이 전부라서 아쉬운데요?”
“차고도 넘쳐요.”
“정말요?”
“네. 그 노래에 위로받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요.”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으나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적당히 대화를 나누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떼어야만 했다.
“시간이 없네요. 이쯤에서 가볼게요.”
“네, 다음에 식사라도 해요!”
“좋죠.”
이후 다른 대기실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RS재단 이사장 류성이라고 합니다.”
“어엇,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휴, 아니에요.”
가수 전부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역시나 시간이 문제였다. 어느새 불꽃쇼가 끝나버린 것이다. 별수 없이 몸을 돌렸다.
-재밌었나요? 이번에는 더 즐거울 겁니다! 이번 무대는……!
개막식을 축하하기 위한 가수들이 등장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유명한 가수와 아이돌 그룹이 차례대로 등장해 노래를 불렀다.
“우와아아아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건 마이유였다.
그녀는 특유의 음색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밝고 경쾌한 노래였다.
첫 번째 곡이 끝나자 관객들은 앵콜을 외쳤고 마이유는 화답하며 약속되었던 두 번째 곡을 불렀다.
-고단한 하룻길 끝에
-거울을 보면 비치는 내 모습
-마치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들뜬 분위기를 휘어잡는 서정적인 곡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질 때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공허한 골목길 아래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
밝은 그림자.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음악이었다.
-먹구름이 자욱해지고
-빛이 사라져 시야가 멎어도
-너는 오늘도 나를
-나는 내일도 너를
자연스레 힘들었던 상황이 떠오르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위안을 받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슬픔은 가시고 어디선가 솟구치는 기운에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그런 노래였다.
-감사합니다!
마이유의 인사에 간신히 여운에서 빠져나왔다.
-자, 모두 정신 차리셔야죠? 축제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요! 이번에는 여러분의 정신을 아주 화들짝, 놀라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술사분을 모시겠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
마술사도 여럿 등장했다. 혼자서 마술을 보여주기도 했고 팀을 이뤄 대규모 마술로 관중을 휘어잡기도 했다.
“허어.”
구석에서 지켜보던 류성도 감탄할 정도였다.
이야, 신기하네, 정말.
아무리 봐도 마법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술에 온전히 빠진 채 아이처럼 즐겼다.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자, 이번에는 여러분과 함께하는 마술이에요. 다 같이 참여해 주셔야 합니다.
최면 마술도 경험을 해봤다.
기분이 묘했다.
정말 최면에 걸린 느낌이었으니까.
-아쉽게도 벌써 저희 시간이 끝나려고 하네요. 어떻게, 재밌으셨나요? 저희는 이번 마지막 마술을 끝으로 물러가겠습니다.
환상적인 시간이 흘러갔다.
-이번에는 세계 최고의 댄스……!
진정 축제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 *
캘리그라피 공모전은 개막식부터 주목을 받았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이들이 등장해 공모전을 축하해 줬으니까.
-와, 가수랑 아이돌 장난 아니던데요?
-행사비 어마어마할 텐데...
-듣기로는 행사비 안 받은 가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엥? 왜요?
-RS재단의 사회공헌에 한 손을 보탠다던가ㅎㅎ
-오, 누구죠?
-일단 마이유랑...
-역시! 클라스가 다르네요!
-다른 가수도 많아요!
-근데 마술도 엄청나지 않았나요?
-끝내줬죠!
-진짜 멋있더라고요ㅎㅎ
-마술 배워볼까 싶기도...!
-전 댄스팀도 좋았습니다ㅎㅎ
-확실히 전문 댄스팀은 달라도 다르더라고요
-찐 축제네요ㅋㅋ
-맞아요ㄹㅇ
-오랜만에 즐겁네요ㅎㅎ 올림픽이나 월드컵하면 주변 지인들 다 응원하잖아요? 지금 딱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요?
-네, 주변 사람들 전부 캘리그라피 공모전에 관심이 꽤 많더라고요ㅋㅋ
-오오!
그즈음이었다.
해당 개막식 영상이 편집되지 않은 채로 RS재단 채널에 올라왔다.
조회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하루 만에 500만이 넘어설 정도였다.
[댓글]
일점사 : 우와, 이게 너튜브에 올라왔네요ㅎㅎ
어섭쇼 : 다시 보는데 감회가 새롭군요
빵죠아 : 개막식에 참여 못 한 게 아쉬울 정도ㅠㅠ
└클리커 : 저도요ㅠㅠ
└팬다 : 와, 저 정도였군요...ㄷㄷ
어깨짱 : 진짜 멋지네요!
아팟트 : 헐, 나도 갈걸...!
└갸웃 : 폐막식에라도 참여하시죠
└아팟트 : 오, 폐막식! 감사합니다!
└갸웃 : 예선전도 보러 오세요
└아팟트 : 꼭 가겠습니다!
도둑새 : ㅠㅠ아니, 이거 까먹고 있었...!
└일점사 : ㅋㅋㅋㅋ
└어섭쇼 : 안타깝네요ㅋㅋㅋ
└도둑새 : 하, 젠장ㅠㅠ
민들레 : 개막식 실제로 봤는데 대박이었어요!
콜드바 : 다음엔 무조건 보러 갑니다!
많은 이들이 개막식이 열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규모를 짐작하진 못했다.
아니, 해봤자 평범한 수준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런 고정관념이 영상 업로드로 인해 깨져 버렸다.
차원이 달랐으니까.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의 축제였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개막식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1차 예선전 토요일이죠?
-맞아요!!!
-거기 한강 둔치 공원에서 한다던데...
-구경하러 와도 된다고 했어요
-참가자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서울시랑 협조했다고 하네요
-오호...!
-대신 안전라인 넘어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정도야, 뭐ㅋㅋ
-슬쩍 보러 가봐야겠군요!
-전 참여하러^^
-크,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저도 바람 쐴 겸 한번 보러 가야겠네요
-꼭 예선전 통과하고 싶네요ㅎㅎ
자연스럽게 1차 예선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다린 토요일이 찾아왔다.
* * *
장춘복 서예가가 차량에서 내렸다.
“태워다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는 주차하고 올 테니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 걸릴 터인데.”
“괜찮습니다, 선생님. 근처에서 구경하면 저한테도 공부가 되니까요.”
“그리하게.”
고개를 끄덕인 장춘복 서예가는 본인의 자리를 찾아갔다. 반투명한 유리관의 출입문을 열고서 내부로 진입하자 책상과 의자, 그리고 준비된 물품들이 보였다.
태블릿.
그리고 문방사우였다.
“흐음.”
선택은 참가자의 몫이었기에 장춘복 서예가는 곧바로 태블릿을 아래쪽에 내려놓았다. 이후 먹과 벼루를 책상 오른쪽에 놓고 중앙에 연습지를 깔았다.
왼쪽에는 여러 종류의 붓이 담긴 붓발과 작품지를 내려놓고서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물품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허허.”
가만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시끄럽진 않았다.
생각보다 방음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외부에서 구경하는 이들이 정말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거나.
어찌 되었건.
그로서는 흡족한 일이었다.
이윽고.
사회자가 등장했고 그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1차 예선전의 주제는 배려입니다! 무엇을 위한 배려인지, 누구를 위한 건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저 배려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각자의 생각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장춘복 서예가가 눈을 떴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주제는 배려.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마음에 드는 문구를 완성하고서 그 옆에 그릴 사군자도 정했다. 그제야 벼루에 먹물을 붓고서 먹을 갈기 시작했다.
슥, 스윽-
천천히, 서두르지 않은 채로 적당히 힘을 줘서 먹을 갈았다.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말이다.
시간이 적잖게 흘렀다.
20분 이상.
여전히 장춘복 서예가는 먹을 갈았다. 그럴 때마다 먹이 찰랑이듯 흔들렸는데 그 움직임을 보면서 농도를 가늠했다.
“적당하구나.”
먹을 정리한 뒤 한글을 쓰기에 적합한 천수필로 만들어진 붓을 손에 쥐었다.
푸욱.
그걸 먹물에 깊게 찍으니 붓 깊은 곳에 담겨 있던 공기가 빠지면서 기포가 발생했다. 기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붓을 적시면서 붓의 모양을 잡았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가지런한 상태의 붓날이 완성되었다.
“후우.”
먼저 연습지에 느리게 선을 그었다.
먹이 퍼지면서 반듯한 일직선이 완성되었다.
먹을 다시 묻히고.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선을 그었다.
다시, 조금 더 빠르게.
드디어 만족스러운 수준의 발묵이 나타났다.
붓을 긋게 되면 먹이 퍼지게 되는데 그걸 발묵이라고 한다. 하지만 느리게 선을 긋게 되면 먹이 많이 퍼지게 되면서 반듯한 선이 그어질 수밖에 없었다.
좌, 우가 완벽한 길이로 그려진 글자는 반듯하지만 예술적이진 않다. 그런 글을 쓸 거라면 컴퓨터로 작성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발묵은 적당히 깨어져야 한다.
먹이 덜 퍼졌을 때 선의 곳곳이 흐트러지게 되는데 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게 되는 것이다.
몇 차례 더 선을 그으면서 먹이 흐트러지는 형상을 눈에 담았다.
붓에 어느 정도의 먹을 묻혀야 하는지.
붓을 어떤 속도로 놀려야 하는지.
종이의 흡수력은 어떠한지.
그 모든 것을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펄럭-
이윽고 연습지를 옆으로 치우더니 작품지를 앞에 놓았다.
“…….”
잠깐의 고요함이 흐르고.
드디어.
장춘복 대가의 붓질이 시작되었다.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글자였다.
심지어 익숙한 한글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신비로운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남이 아닌
-모두가 나와 같은
짧지만 ‘배려’라는 주제가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완벽했다.
그러나 이어진 붓질에 오른쪽 여백이 서서히 차오르더니 느껴지지도 않았던 부족함이 온전하게 더해졌다.
피어난 대나무 형상이 완성에 다다를수록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이 작품지에서 솟구쳤다. 우아하면서도 단호한 기상이 울려 퍼졌다.
“좋구나.”
시선을 내리자 종이를 채운 글자와 사군자가 마치 살아 숨 쉬듯 꿈틀거렸다.
그야말로 고고한 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