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재능이 쏟아져 275화
173. 움직이는 사람들(2)
한세훈은 동료 검사와 선배 검사를 두루 만나며 해당 사건을 은근하게 물었다. 절대 큰 관심이 있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래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리겠지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봐도 자세하게 아는 이가 없었다.
“후, 어렵네.”
그러던 중이었다. 몇 년 전부터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형사부의 부장검사 김일학이 한세훈을 찾아왔다. 차기 검사장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가장 큰 실세 중의 실세였다.
“한세훈 검사.”
“예, 부장님.”
“오늘 저녁이나 먹지. 해야 할 말도 있고.”
“아,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일단 의문을 접었다.
저녁이 되면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업무가 끝나고 곧바로 김일학 부장검사와 함께 조촐한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래, 요즘 RS재단 알아본다면서?”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눈치 빠른 누군가가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이런 게 싫어서 조심스레 행동했던 건데.
“알아보니 재단한테 도움도 받았었고.”
“맞습니다.”
그만두라는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괜히 긴장되었다.
무려 서울 중앙지검의 부장검사였으니까. 하지만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표정 좀 풀어, 이 친구야.”
“……죄송합니다.”
“내가 뭐, 하지 말라고 억압이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 그런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그러면…….”
“일단, 그거 누가 했는지는 알고?”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누구? 유중렬?”
“……맞습니다.”
그에 김일학이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그 녀석. 이유까진 모르겠는데 그 녀석이랑 소모임에 속한 두 녀석. 그렇게 셋이서 작당했더라고. 처음에는 언론으로 흔들고 이후 국세청으로 흔들고. 이제 또 다른 것들로 흔들려고 할 거야. 뭐, 사실 제대로 흔들 수나 있을까 싶다만.”
“예……?”
“아니, 됐고. 그보다 지금 하는 그거, 제대로 해볼 생각은 있어?”
김일학 부장검사의 말이 잠깐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안 막으시는 겁니까?”
“그래, 안 막는다고 했잖아. 내가 막긴 왜 막아? 나도 RS재단 좋게 본다. 솔직히 좋은 일 많이 하잖아. 그런 재단에 흠집 내려는 새끼들, 나도 짜증 나거든. 하나 정도는 제대로 된 재단이 있어도 괜찮지 않겠어? 그래야 살 만하지 않겠냐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칼질해 볼 생각 있냐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한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칼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김일학 부장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부장실로 찾아와라. 자료 줄 테니까. 그거, 내키는 대로 휘둘러 봐.”
“감사합니다!”
“적당히 쓸 만할 거야. 물론 숨통까진 못 끊겠지만.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게 할 순 있겠지. 그때부터 진짜 시작인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판 짜놓겠단 얘기야. 열심히 해봐.”
“아, 네. 알겠습니다.”
“마시자고.”
둘은 시원하게 소주를 들이켰다.
“크흐.”
씁쓸하면서도 미묘한 단맛이 올라왔다.
마치 인생처럼 말이다.
* * *
출근하자마자 부장검사실을 찾아갔다.
“부장님, 저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그는 미리 준비해뒀던 서류를 한세훈에게 넘겼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지켜보마.”
한세훈은 그 말에 굳이 대응하지 않았다.
지켜보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지금 하는 일의 목표는 김일학 부장검사의 눈에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RS재단에 은혜를 갚을 뿐.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자료부터 확인했다.
한세훈의 눈이 빛났다.
대단치 않은 자료라고 하더니 이 정도면 압수수색 영장이 발급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증거 자료도 확실했으니 말이다.
“후우, 해보자고.”
곧바로 영장 발부를 신청했다.
하루가 지나고.
한세훈은 영장이 나오자마자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유중렬이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대한민국 재계서열 10위 중후반에 있는 대기업 본사로 향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일단의 무리가 건물로 들어섰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보안업체 직원으로 보이는 두 명이 다가와 앞을 막았고 한세훈은 압수수색 영장을 들어 올려 그들에게 보여줬다.
“압수수색 영장입니다. 비키세요.”
“아, 음…….”
“갑시다.”
“예!”
앞으로 밀고 나가자 경호원이 옆으로 물러났다.
영장이 나온 이상.
그들은 검사를 막을 명분도, 그럴 권한도 없었다.
저벅.
한세훈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슬쩍 뒤를 돌아봤다. 경호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예, 지금 갑자기 검찰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사전에 정보가 새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일학 부장검사가 개인적으로 들고 있는 자료였다. 그걸 직접 받았으니 정보가 샐 공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영장을 신청한 순간부터 정보가 샐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거기까지는 손이 뻗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케이.
이러면 제대로 털어버릴 수 있으리라.
“자, 서두릅시다!”
“예!”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을 들이닥쳤다.
직원이 분주했다.
저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동작 그만!”
그에 움찔하는 직원들.
“지금부터 움직이지 마십시오. 움직이는 순간 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두 멍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손짓하자 수색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서둘러 자료를 쓸어 담았다.
“하나도 놓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검사님!”
한참 자료를 수거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표정이 일그러진 유중렬이 껄렁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 시바. 뭔 상황이야, 이게.”
뻔히 한세훈을 쳐다보며 욕을 내뱉었다.
아주 대놓고 들으라는 식이었다.
자연스레 내부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한세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유중렬의 앞을 막았다.
“당신, 누굽니까?”
“뭐?”
“지금 압수수색 중이라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만.”
“어이, 나 몰라?”
“모르겠는데. 누구?”
“……이거 웃긴 새끼네.”
“웃긴 건 네 얼굴 꼬락서니고.”
한세훈의 반격에 유중렬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검사 나부랭이 새끼가, 감히.”
“직원 나부랭이 새끼가, 어딜.”
“너, 겁대가리를 상실했냐?”
“전혀.”
“시X. 나 여기 본부장 유중렬이야! 비켜!”
“아, 본부장이었구만.”
“이게 아직도 반말을……!”
“이거 죄송하게 되었군요. 지금 압수수색 중이니 대기해 주시죠, 우중…… 충? 본부장님?”
“죽고 싶냐? 유중렬이라고.”
“혀가 짧은 모양이네.”
악귀처럼 일그러진 표정의 유중렬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기대해라. 제대로 조져줄게.”
“어후, 입 냄새. 썩은 거 같은데? 평소에 양치나 좀 제대로 하고 살아라. 그 재수 없는 혓바닥도 깨끗하게 닦으면서.”
“너, 이 개새…….”
“닥치고. 잘 들어. 지금부터 아주 제대로 털어줄 테니까 그때까지 모가지나 제대로 간수하고 있으라고.”
한세훈은 유중렬을 비웃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료 수거 끝났습니까?”
“예, 다했습니다!”
“갑시다! 지금부터 제대로 조져야 하니까.”
직원들과 함께 유중렬을 지나쳤다.
녀석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채로 자리를 지켰다.
속이 아주 통쾌했다.
* * *
해당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xx기업, 압수수색 영장 발부!]
[검찰 발표, ‘xx기업’은 인사와 관련된 채용 비리, 자금 횡령, 폭행 및 협박, 노조 전임비 갈취 등의 죄목으로……]
[xx대기업 본부장, 난 떳떳하다고 밝혀.]
[유중렬 본부장, 검찰 조사 성실히 받겠다고 언급해.]
그와 동시에 묘한 소문이 SNS를 강타했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지금 조사중인 xx대기업 본부장이요ㅋㅋ
-아, 유중렬? 그 사람이 왜요?
-의혹이 엄청나더라고요ㄷㄷ
-저도 알아요!
-ㅇㅇ? 뭔 일?
-그 사람 망나니 재벌 3세로 유명해요ㅋㅋ
-레알요?
-네ㅋㅋ 특히 유흥에 돈을 그렇게 많이 쓴다고..
-ㅎㄷㄷ
-그리고 성격도 더러워요ㅠㅠ
-어우...!
-이건 실제 해당 기업 다니는 지인 피셜인데 진짜 성격 안 좋대요!
-폭력도 엄청 쓴다고 하네요, 쯧
-그게 이제 튀어나오다니!
-쩝, 재벌이니 뭐...
-제대로 좀 처벌받으면 좋겠네요!
시작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가벼운 흥미였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내용은 섬세함을 더해갔다. 심지어 유중렬의 만행은 파면 팔수록 놀라웠다.
거기에 팩트로 꽂히는 검찰의 발표까지.
[유중렬, 폭행 사주 인정...!]
[회사 자금 사적으로 활용!]
[드러난 증거 명백해...]
[각종 엔터계에 뻗어 들던 검은 손의 정체?]
[유중렬, 성상납까지?]
그가 저지른 각종 범죄와 비리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이 화제가 쌓여갔다.
-와ㅁㅊ 아이돌 성상납 비리까지?
-협박에 못 이긴 대표도 많은 듯
-거의 강제 아님?
-정신 나갔네요ㄹㅇ
-미친 수준인데...!
화제는 이윽고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야, 그 이야기 들었냐?”
“뭐?”
“그 유중렬인가?”
“아, 그 미친놈? 진짜 정신 나갔던데.”
“어휴, 제대로 좀 구속되면 좋겠네.”
“그런 놈은 무조건 감옥 가야지!”
“인정. 물론 쉽진 않겠지만. 쯧.”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졌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 : RS엔터 직원인데 유중렬, 여기에도 연락이 왔었던 듯?]
[내용 : 이거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내가 RS엔터에 속해 있거든. 뭐, 워낙 관계자가 많으니까 들킬 염려는 없을 거 같아서 고민하다가 적는 거임.
일단 인증부터.
여기 직원증 보이지?
중요한 부분은 다 가리긴 했지만 찐임.
어디 보자.
그러니까, 이야기를 해보자면 보고할 일이 좀 있어서 부대표실에 들러야 하는 상황이었거든ㄷㄷ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더라고.
어우, 좀 무섭더라.
워낙 소리가 커서 생각보다 잘 들렸고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음. 유중렬 본부장이란 단어도 분명히 들었고. 이어서 미쳤냐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전화를 끊으시더라고.
이어서 책상 치는 소리까지.
콰앙!!! 하고 났다니까.
ㅠㅠ그때 깜짝 놀람!
조금 있다가 대표님. 그러니까 RS재단 이사장님까지 오더니 심각하게 이야기 나누던... 덕분에 난 오래 기다렸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음!]
해당 글은 인터넷 기사, SNS, 그리고 각종 게시판에 공유되었다. 조회수가 폭발하면서 하루 만에 수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
와이엠키키 : 와, 이게 진짜면 심각한데요?
레알 : 네? 어딜 건드렸다고요?
망치대령이오 : 잘못 본 거 아니죠? RS엔터요? 감히?
너냐범인이 : 찐이에요? 에이, 설마.
미끼왕 : 아무리 그래도 RS재단을 건드렸다고요? 아니, RS엔터지만? 이거 진짜면 나 그냥은 못 있겠는데?
음모론자 : 어라? 이거 딱 싸이즈 나오는데?
└낚시꾼 : 무슨 싸이즈요?
└음모론자 : 유중렬이 RS엔터 성상납 요구했고 RS엔터는 거절했고. 거기에 열받아 가지고 재벌 특유의 돈지랄로 RS재단 털어버린 거고. 그, 얼마 전에 RS재단에 국세청 감사 조사 들어갔잖아요. 딱 들어맞지 않음?
└물통 : 헐, 너무 그럴듯한데요?
└가소 : 미친, 이거네!
└비내린다 : 와씨, 소름 돋네ㄷㄷ
해당 댓글의 ‘좋아요’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유중렬의 악행에 치를 떨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타이밍에 기사가 올라왔다.
[국세청 과장과 만난 유중렬?]
[RS재단이 국세청 감사를 받은 이후 해당 사건을 면밀하게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만났던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고 운 좋게 해당 업체로부터 중요한 장면을 습득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재벌 3세 유중렬이 국세청 과장과 만나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다. 날짜는 정확히 9월 11일. RS재단이 국세청 감사를 받기 하루 전날이었다.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공교로운 시기였으며, 심지어 그 전에 RS엔터로 연락해 무언가 강요했다는 제보까지 등장해 추측에 신뢰를...]
해당 기사를 보고 있던 류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RS엔터의 부대표, 최서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거, 정말로 배후가 유중렬이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 그 녀석은 당해도 쌉니다.”
류성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감히……! 다시 떠올려도 기분이 더럽네요.”
“마찬가지예요.”
“아무튼, 생각보다 상황이 잘 풀리고 있군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의아할 정도긴 합니다. 이건 무슨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도와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지…….”
솔직히 지금, 류성은 묘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그보다, 기자 이름이 박연후군요.”
“네, 아는 분이신가요?”
“아뇨. 그냥 이 사람도 이렇게 우리 RS재단을 돕고 있구나 싶어서요.”
이 기사를 쓴 박연후 기자는 물론이고.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검사도.
게시글을 작성한 RS재단 직원도.
SNS에 공유하는 이들도.
그걸로 영상을 만드는 너튜버와.
기사에 댓글을 다는 이들까지도.
보이진 않으나 모두가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다수가 그렇게 RS재단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사익을 위함이 아니라 RS재단의 곤란에 분노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들의 마음이.
소리 없이, 그러나 강하게 와닿았다.
“……좋네요.”
류성은 그저 웃었다.
어쩐지 보답받는 기분이 들어 그저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