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1화 (1/424)

001화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 간다

이스트 왕국과 사우스 왕국의 국경지역 바일리온 산.

이미 이곳은 한 차례의 커다란 격돌이 벌어진 뒤였다.

이스트 왕국군인 홍련의 마법기사단과 사우스 왕국의 군대가 전쟁을 벌인 것이다.

홍련의 마법기사단을 이끄는 아레나는 사우스 왕국군을 상대로 분투했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때 전장에 나타나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심연의 마법기사단의 유미르 단장이었다.

그와 심연의 마법기사단의 참전으로 적장 제이스쿠스와 다이아 군대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어 지원군으로 들장미 마법기사단까지 전장에 합류하자, 결국 제이스쿠스도 후퇴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끝나고 아레나가 유미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심연의 마법기사단의 도움은 필요 없었어요.”

“아하하… 그랬습니까. 어쨌거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레나 단장.”

“…….”

아레나가 말없이 묘한 표정을 보였다.

유미르는 함께 달려와 준 들장미 마법기사단장 아그리나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그리나 단장.”

“함부로 말 걸지마 유미르. 단장이라고 너와 내가 같은 위치인 것 같나? 감히 천민 따위가…….”

그러나 돌아온 그녀의 답은 냉담하기만 했다.

아그리나가 들장미 마법기사단과 함께 전장을 수습하러 가고 두 사람만 남겨졌다.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고생 많았군.”

유미르는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군단장 테르세우스를 향해 예를 갖췄다.

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테르세우스가 미소를 보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의 한 마디에 아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차가워진 인상에 테르세우스가 헛기침을 해댔다.

“아아, 그러니까 내 말은…! 둘이 보기 좋다 뭐 그런…….”

“쓸데없는 말은 됐습니다. 부르신 용무가 무엇입니까?”

“미안하지만 두 사람이 곧바로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네.”

테르세우스가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시선을 읽은 유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잊으셨습니까? 군단장님께선 제게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고맙다 유미르. 역시 자네밖에 없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군단장님이 아니었다면 전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유미르가 웃으며 테르세우스를 바라보았다.

30대가 넘은 나이에도 그는 여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이 과연 이스트 왕국을 대표하는 최강자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군단장이 되면서 이제는 한층 더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가만히 테르세우스를 바라보던 아레나가 입을 열었다.

“웃는 모습이 저자와 똑같으시군요.”

“응? 그런가? 그러고보니 그런 얘기를 가끔 들었던 것 같기도 하군.”

테르세우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익살스런 얼굴로 아레나를 살폈다.

“아무튼 두 사람 다 이걸 보게.”

테르세우스는 가져온 지도를 펼쳐 한쪽 부분을 가리켰다.

그 부분에는 붉은색으로 X자가 그어져 있었다.

“여긴… 마녀의 숲 근처로군요.”

“그래. 여기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곳이지.”

“이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테르세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줄 수 있겠나? 자네들도 조금 전 전투를 마친 상태지만… 이곳에서도 우르마니아가 적들과 힘든 교전을 벌이고 있다. 가서 그들을 도와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네.”

두 사람이 동시에 답했다.

돌아서는 그들을 보며 테르세우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후발대로 들장미 기사단을 바로 보내도록 하지.”

* * *

홍련의 기사단과 심연의 기사단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전투의 여파가 남아 있는데다 제대로 휴식조차 취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서로를 향한 은근한 자존심 때문인지 모두가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선두에 가던 아레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늦게 무언 갈 깨달은 유미르도 굳은 얼굴이 되었다.

“함정이에요.”

“이건……!”

두 사람의 반응에 다들 의아함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유미르와 아레나는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마력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유미르 단장. 갑자기 왜 멈추신 겁니까?”

단원들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유미르가 소리쳤다.

“모두 피해!!”

유미르의 외침과 동시에 커다란 돌덩이가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단원들이 당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저기 비명이 퍼지는 가운데 또다시 마법 공격이 날아왔다.

“수비하겠습니다!”

“모두 진형을 갖춰!”

그러나 단원들에게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마법 방해진인가!”

“제기랄 마법을 펼칠 수 없어!!”

뒤늦게 깨달은 단원들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결국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피해 혼비백산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얼음송곳들이 쏟아지려는 때.

화르륵―!

허공에 치솟은 불길이 얼음송곳들을 녹여버렸다.

아레나는 연이어 손을 뻗으며 불길을 만들었다.

유미르도 두 손을 땅에 짚었다.

그러자 대지를 뚫고 나온 식물들이 떨어지는 마법 공격들을 막아주었다.

이어 줄기들이 뻗어 나와 단원들을 움켜쥐었다.

“이곳에 모여 있어봤자 계속 당하기만 할 뿐이야. 각기 흩어져서 목적지로 향한다!”

유미르는 외침과 동시에 단원들을 여러 방향으로 보내주었다.

그들을 향한 공격은 굵직한 나무기둥들로 막아주었다.

“역시 단장들인가… 이런 마법진 안에서도 저 정도 마법을 구사하다니……!”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냐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단장들이 시간을 벌어줄 때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는 거다!!”

홍련의 마법기사단원들과 심연의 마법기사단원들 모두 각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적들의 공격도 그들을 쫓았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유미르와 아레나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과 여기저기 솟아난 나무들이 적들의 공격을 방해했다.

협공을 이루기에 두 사람의 마법 상성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두 사람의 호흡은 최상이었다.

“이러니까 꼭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군요.”

“허튼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요.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은데 적들의 의도대로 둘 수 없어요. 병력 손실은 최대한으로 적어야 해요.”

유미르에게 한소리 내뱉은 아레나가 양 손에서 붉은 화염구를 쏟아내었다.

평소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런 마법진 안에서 아무런 영향을 안 받을 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도 충분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화염구의 위력은 다른 화염마법사들보다도 강했다.

유미르도 정신없이 마법을 사용하며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아군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전투를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

“특별히 준비한 이 마법진 안에서 그 정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니. 실로 놀라워.”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을 바라본 아레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당신은……!”

“안녕하신가. 나는 사우스 왕국 트럼프 중 한 명인 롤스로체카라고 한다네.”

전쟁과 맞지 않는 멋들어진 옷을 갖춰 입은 중년의 신사가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제길. 하필 지금 저 자를 만나다니…….”

“최악이로군요.”

유미르와 아레나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무대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롤스로체카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다른 곳에서 수십 명의 인영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롤스로체카가 이끄는 스페이드 군대일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이쯤 시간을 끌었으면 들장미 마법기사단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이곳까지 왔을 텐데. 아니면 우르마니아의 마법기사단이라도…….”

“저도 그걸 이상하게 느끼던 참입니다. 저들이 우리가 이곳을 지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도 의심스러워요.”

“…어쩌면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아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약 배신자가 존재하고 이 정도의 정보를 갖고 있을 정도라면 최소 마법기사단장만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미르의 말에 아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힘을 합쳐 몸을 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가는 것은 이스트 왕국군 쪽이었다.

짙은 안개와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공격들 때문에 여간 힘든 상황이 아니었다.

“이리로!!”

유미르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한쪽으로 달렸다.

그의 마법이 길을 열어주었다.

한참을 달아난 끝에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암산(巖山)이었다.

“제길! 안개 때문에 이곳이 어딘지 확인을 하기가…….”

콰앙!!

그때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며 주변을 깨부쉈다.

벌써 적들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아칼.”

“말해 단장.”

“롤스로체카가 어디에 있을지 추적이 가능해?”

“흠… 백퍼센트 확신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다.”

“어디쯤이지? 내게 알려줘.”

“뭘 하려고?”

“단 한 번이라도 놈의 집중이 흐트러지면 이 안개를 걷어낼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생길지 몰라. 게다가 느낌상 마법진의 영향도 이곳에선 약해진 것 같아.”

“흐음… 알겠다.”

아칼이 잠시 고민하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유미르는 망설이지 않고 아칼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최선을 다한 공격 마법을 날렸다.

아레나의 입가에 순간 미소가 스쳐갔다.

유미르에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텁다는 얘기였다.

쿠웅!!

굉음과 함께 일시적으로 안개가 옅어졌다.

유미르는 그와 동시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수많은 나무줄기들이 뻗어 나와 주변을 어지럽혔다.

덩굴처럼 얽힌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더욱 가려졌다.

유미르가 그 사이에 이런 마법을 준비한 것을 보며 아레나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시간이 없다. 너희들 먼저 빠져나가라.”

유미르는 다시 마법을 사용해 나무줄기들로 남은 단원들이 모두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콰앙―!!!

그 사이 다시 적들의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둘 뿐이었다.

“아레나. 이 정도면 책임을 다한 것 아닙니까? 다들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은데.”

“이제 우리들 차례예요.”

“하아… 그런데 이거 미안합니다. 제 다리가…….”

유미르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거듭된 무리로 결국 몸이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더 이상 단 한줌의 마나도 쥐어짜낼 수 없었다.

팔다리에 경련까지 일어나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레나가 그를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말고 저를 두고 먼저 가십시오.”

“아뇨. 그럴 순 없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의 상태도…….”

아레나도 유미르만큼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해서 마법을 펼치다보니 이미 마력이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마력이 없으면 제아무리 마법기사라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유미르를 데려가기 위해 노력했다.

“아레나 단장!”

“살아요. 당신은 출신이 천민이라는 온갖 무시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마법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올라왔어요. 그런데 겨우 여기서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 때문에 당신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당신도 제 목숨을 매번 구해주었잖아요. 그쪽이 아니었다면 저도 지금의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아레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 역시 유미르의 도움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유미르도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쿠르릉―!!

커다란 폭음과 함께 유미르가 만들어놓은 넝쿨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와 밖으로 피하기엔 늦어버렸다.

“어떻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찰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우웅――!!

“유미르. 저길 봐요.”

“저건… 던전 게이트가 아닙니까?”

“맞아요.”

“갑자기 던전 게이트가 생기다니… 그런데 던전 게이트의 색깔이 검은색인 건 처음 봅니다.”

“어때요?”

아레나가 진지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유미르도 알아차렸다.

“선택권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좋아요. 그럼……!”

아레나는 곧바로 유미르를 데리고 던전 게이트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던전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게이트의 문이 좁아지며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이어 암산의 바위들이 무너지며 유미르와 아레나가 있는 곳을 덮쳤다.

한참 뒤, 그곳에 롤스로체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롤스로체카님. 시체가 있나 확인해볼까요?”

“헛수고하지마라. 제 아무리 단장들이라고 해도, 이 마법진 안에서 그렇게 큰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한 상태였다. 남은 마력도 없을 텐데 저 큰 바위들 틈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어. 거기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을 많이 썼다.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수 없어.”

롤스로체카가 혹시나 싶어 눈매를 좁히며 안쪽을 쳐다보았다.

안쪽에선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단원들은 모두 살려내고 자신들만 죽은 건가. 적이지만 훌륭한 자들이로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