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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화 (2/424)

002화 기연(奇緣)을 만나다

“아레나 단장. 괜찮습니까?”

“후우… 후욱… 난 괜찮아요.”

말과 다르게 그녀는 계속해서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유미르는 그런 아레나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벌써 이 던전에 온지도 며칠이 흘렀다.

던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 몇몇 몬스터들을 마주했지만 처리하는 덴 문제없었다.

하지만 정말 큰 문제는 갑자기 아레나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힘을 잃고 쓰러진 아레나의 입술은 파래지고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유미르는 손을 가져가 그녀의 땀을 닦아내주었다.

“몸이 이토록 차가울 수 있다니…….”

그는 황급히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을 지피기 위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소용없다.”

그때 다른 한쪽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유미르가 다급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으하하하!! 그렇게 겁먹을 것 없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백발이 성한 노인이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손에 들린 호리병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유미르와 아레나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너희는 인간이냐?”

“예……?”

“인간이냐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너무도 황당한 질문이라 순간 유미르도 당황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의 답이 노인에겐 다소 신선한 충격인 모양이었다.

노인이 광소했다.

“인간이라!! 인간이란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인간이지!?”

환호한 노인이 순식간에 유미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에 유미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멀리 있던 노인이 어느새 바로 앞에 서 있다.

어떻게 다가오는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아차리긴 커녕 그의 움직임조차 눈으로 쫓지 못했다.

마법을 의심했지만 노인에게선 마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미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아레나도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만약 눈앞의 노인이 적의를 품는다면 그녀를 보호하며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 몸의 회복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전투는 가능했다.

그런 유미르의 각오가 무색하게 노인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아레나의 곁에 섰다.

“흐음…….”

“어느새……!”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 경계할 것 없다. 빌어먹을 마수놈들이라면 당장에 죽였겠지만 너희는 인간이잖나. 오랜만에 만난 인간을 죽이고 싶진 않다. 그러니 그것들부터 치워라.”

노인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꼬아져 있는 나무줄기들을 가리켜 말했다.

하지만 유미르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레나의 곁에 섰으니 당장 경계심을 물릴 순 없었다.

백발의 노인도 이를 눈치 챘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녀석아. 당장 이 여인부터 걱정해라. 이건 프시케의 독이라는 거다.”

“프시케의 독이요?”

“이대로 독이 오장육부까지 퍼지면 온 몸이 굳어 버릴 거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게 돼. 보아하니 이 근처 웅덩이의 물을 마셨나보군.”

노인의 말에 유미르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보니 아레나가 근처에서 손으로 물을 떠 마신 적이 있었다.

자신은 목이 마르지 않아 지나쳤는데 그것이 행운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곤란하게 되었어.”

“많이 심각한 겁니까……?”

어느새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유미르가 노인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기습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거리는 남겨두었다.

노인도 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제법이로군.”

“예?”

“아니야. 그것보다 이 처자 말이다. 다행히 독이 많이 퍼진 상태는 아니로구나. 손가락 끝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이지? 이 색깔이 까맣게 죽기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위험한 상태야. 즉, 당장은 시간이 있다는 소리지.”

“그렇군요. 그럼 혹시 어떻게 독을 치유할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신다면 염치 불구하지만 알려주십시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노인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유미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이곳으로 쭉 가면 드레인 지대라는 곳이 나온다. 내가 붙인 이름이긴 한데… 어쨌거나 드레인 지대에 피어 있는 파란색 꽃을 가져오면 된다. 그 꽃잎을 달여서 이 여인에게 먹이면 금방 해독될 거야.”

“아…!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는 더 남았으니까.”

“또 다른 것들이 있는 겁니까?”

“그 파란 꽃의 이름은 아시밀리온이다. 특이하게도 마력을 양분삼아 자라는 꽃이지. 아마 드레인 지대에 들어선 순간 자네의 마력도 빨려나가는 것을 느낄 거야.”

“아,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끝가지 들어라 이 녀석아. 그것만이 아니니까. 아시밀리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거기에 피는 꽃은 아시밀리온뿐이니까. 그리고 아시밀리온의 꽃잎에서 나오는 독가루는 마시는 순간 평생 몸에 남아 마력이 쌓이는 것을 방해한다.”

“네? 그 말은…….”

“그래. 쉽게 말해 둘 중 하나다. 저 여인을 죽게 놔두고 네놈의 마력을 보존할건지. 아니면 평생의 마력을 모두 잃고 저 여인을 구할 것인지.”

노인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결국 선택은 유미르의 몫이었다.

그는 내심 유미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무슨 선택을 하던 존중 받을…….”

노인이 그만 말을 멈추고 말았다.

유미르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길을 나설 준비를 했던 것이다.

노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놈은 마력을 잃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거냐? 보아하니 바깥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는 녀석 같은데. 여기서 운 좋게 나가더라도 다시는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력을 모두 잃는 다는 것은 그런 거란 말이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것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욱 소중합니다.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제 팔을 내놓으라고 해도 그럴 겁니다.”

유미르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눈빛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이 모습에 노인도 감탄하고 말았다.

그는 곧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미르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보니 잠시 멈칫한 이유는 나 때문이로군?”

“죄송합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내 말이 과연 모두 사실일까 의심도 들었을 테지. 그런데 왜 의심을 거두고 순순히 아시밀리온 꽃을 구하러 가는 거냐?”

“처음에 당신의 말을 의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노인분께서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저와 저 여인을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노인은 대답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게 대답이라 여겼는지 유미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걱정마라.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인은 내가 지켜주마.”

“감사합니다.”

유미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지 노인이 먼저 답을 해주었다.

그가 아레나의 곁에 자리를 차지하자 유미르도 이만 몸을 돌렸다.

“껄껄, 괜찮은 청년일세.”

“유미르… 그러지 마세요…….”

아레나가 미약한 소리로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유미르에게 들릴 리 없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무슨 관계지?”

노인이 아레나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멀어지는 유미르의 뒷모습만을 쫓고 있었다.

그 눈빛이 아련해 노인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버렸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멋대로(?) 짐작해버린 것이다.

“그럼 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겠군. 아시밀리온 꽃의 다른 효능이 말이야.”

아레나는 노인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물밀 듯 밀려오는 고통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편 길을 나선 유미르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노인이 말한 드레인 지대는 아레나와 유미르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았다.

“와아……!”

던전 내부에 이런 곳이 있을 줄 누가 예상했을까.

쏟아지는 푸른빛에 유미르는 절로 탄성을 내뱉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취색 광명들이 유미르의 시선을 훔쳤다.

그곳에서 아시밀리온 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통 파란꽃들이로군.”

아마 대기의 빛무리는 아시밀리온의 꽃가루일지 몰랐다.

어쨌거나 유미르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슈와아――

기이한 느낌과 함께 몸속에서 마력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서둘러야겠어.”

다른 것보다 이런 상황에서 던전의 마수라도 만나면 골치 아파진다.

그리고 이런 상상은 늘 현실이 된다.

“그워어――!!”

유미르의 앞에 투박한 외형의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녀석들은 유미르를 보며 위협적인 울음을 토해내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급해서 말이다.”

유미르가 두 팔을 펼쳐들자 대지를 뚫고 나무줄기들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 * *

자리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던 노인, 비체가 고개를 들었다.

들려오는 인기척에 상념에서 깨어난 것이다.

“벌써 다녀온 건가?”

비체가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넝마가 된 모습이었다.

아마 그곳에 서식하는 마수들을 만난 것이리라.

그럼에도 마수들을 뚫고 꽃을 구해왔다.

그것도 마력을 빼앗아가는 최악의 지대에서 말이다.

“대단하구만.”

“다녀왔습니다.”

아시밀리온 꽃을 한 움큼 가져온 유미르가 멀찍이 섰다.

이를 본 비체가 인상을 찌푸렸다.

“왔으면 서둘러 가까이 와 꽃잎을 달여 먹일 것이지 왜 그러고 서 있나?”

“그게…….”

“아하하!! 걱정마라. 아시밀리온 꽃은 뿌리와 연결되어 있을 때 독가루를 뿌려대니까. 그렇게 꺾인 상태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나와 저 여인에게 아무런 해를 미칠 수 없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제야 안심한 유미르가 서둘러 달려왔다.

몸도 성치 않건만 그는 곧바로 꽃잎을 달일 준비부터 했다.

비체가 미리 준비해놓은 덕분에 잎을 달이는 것은 한결 수월했다.

유미르는 손수 약을 먹이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아레나를 보살펴주었다.

그 정성이 너무도 갸륵해 지켜보던 비체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처자가 그리도 소중한가?”

“사람의 목숨은 누구나 귀한 법입니다.”

“아니 그런 말 말고. 네놈에게 얼마나 특별한지 묻는 거다. 나도 눈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행동하진 않지. 말은 안 해도 그 여자가 네겐 특별한 거겠지?”

“후후,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천민 출신이고 이 사람은 귀족이니까요.”

“크하하하!! 사람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출신이 뭐가 중요한가? 그딴 것들은 남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다. 여기는 던전이야. 우리 셋 말곤 아무도 없는데 누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비체가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말했다.

유미르는 그저 누워있는 아레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네놈이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들어.”

“예……?”

“그래서 말인데 내 제자가 되어볼 생각 없나?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저 처자와 함께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이곳에서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너도 이곳에 많은 마수들이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챘지?”

“예. 아무래도 이곳이 던전이니…….”

“마력도 없는 그 몸으로 마수들에게서 저 여인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냐? 게다가 여기는 단순한 던전이 아니야. 뭐, 그것은 차차 알게 될 테니 우선은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도록 하마. 그러니 그동안 내 제자가 되는 것도 천천히 생각해봐라. 어떠냐?”

이 말과 함께 비체가 몸을 일으켰다.

쿠르릉―

비체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비체가 몸을 일으킨 이유 같다.

그가 말도 없이 훌쩍 떠나려하자 유미르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뭐냐?”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 이름은 비체다.”

“비체라… 감사합니다. 꼭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뭐라는 거냐. 곧 다시 볼 텐데.”

비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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