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마음이 움직이다
그가 떠나자 유미르는 한 차례 꿈을 꾼 것 같았다.
“후우…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건지…….”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몸에 넘쳐흐르던 기운들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활력 있게 움직이던 수레바퀴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마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단은 아레나를 살리고 보자는 마음에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문득 실감이 나려한다.
“돌아가도 다시 마법기사단장을 하지는 못하겠군. 그런데 이런 날 제자로 거두어서 뭘 어쩌시겠다는 건지.”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힘들게 신음하던 아레나가 어느덧 편안한 모습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유미르는 혹시나 그녀가 추워할까 싶어 불을 더 강하게 지폈다.
다행히 근처에 땔감으로 쓸 만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으음…….”
“아, 깨어났습니까?”
아레나의 소리가 들리자 반색한 유미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런 유미르를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예?”
“몇 번씩이나 제 목숨을 구해줬잖아요. 고맙다구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뇨. 저를 구하기 위해 당신이 뭘 포기했는지 전 잘 알아요. 그동안 쭉 당신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더더욱.”
아레나의 눈동자가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유미르가 괜히 시선을 돌렸다.
붉게 홍조를 띈 그녀의 얼굴과 한층 더 부드러워진 시선 때문에 유미르도 자연스레 귀가 빨개지고 있었다.
“그… 괜찮습니까? 천민인 제게 도움 받는 것을 당신은 읍……!”
유미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레나가 양손으로 그의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이어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입술에 전해졌다.
놀란 유미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그도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진한 키스가 오가고 아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이제야 정신을 차린 아레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유미르는 아직도 몽환적인 기분에 취해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아레나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미안하긴요… 저는 영광, 아니 감사, 아니, 아니아니…….”
당황한 유미르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도 지금 본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레나와 유미르가 침묵을 지키자 답답했는지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무슨 내외를 하고 있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비체가 구시렁거리며 돌아왔다.
그의 옷가지엔 핏물이 한 움큼 묻어 있었다.
“아, 비체님…….”
“님은 무슨. 그나저나 여기도 썩을 것들이 몰려오고 있구나.”
비체가 다른 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유미르와 아레나는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비체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일단의 마수들이 몰려오고 있던 것이다.
“이런!”
유미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당장 무기로 쓸 수 있을만한 것을 집어 들었다.
이에 비체가 코웃음 쳤다.
“마법이나 쓰던 놈이 마력도 없이 그깟 몽둥이나 든다고 상대할 수 있을 성싶으냐?”
“아…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후후, 괜히 나서다 몸상하지 말고 뒤에서 지켜보기나 해라.”
유미르가 멋쩍은 미소로 머리를 긁적였다.
비체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엔 어느새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마침 잘 되었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내 제자가 되라고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편이 낫겠지.”
비체는 뒤돌아 유미르를 보며 웃었다.
아레나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르신께 피해를 끼칠 순 없어요. 제가…….”
유미르가 손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다.
아레나는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직 몸이 성치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유미르가 지켜보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덕분에 아레나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잠자코 앉아 비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쿠워어―!!”
“그르릉!!”
하이에나처럼 생긴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 이쪽으로 달려들어 왔다.
광기에 찬 녀석들의 시선은 아레나와 유미르를 향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사냥하기 쉬운 먹잇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부상을 입은 자와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
이것만큼 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먹잇감은 없었다.
그러나 녀석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중앙에 선 노인.
비체는 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분수를 알라고 말이다.”
슈와아아―!!
비체의 검에서 뻗어나간 수십 가닥의 빛줄기가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빛줄기에 닿을 때마다 마수들의 몸이 잘려나갔다.
비체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검끝이 회전하면서 빛줄기들도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말도 안 돼…….”
“저건 대체 무슨 마법일까요?”
“이상해요. 저 사람에게선 아무런 마력도 느껴지지 않아요. 마력과는 다른, 더 특이한…….”
아레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노인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유미르와 같았다.
그동안 유미르에게선 특이한 마력이 느껴졌었다.
아마 그가 사용하는 마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그를 남몰래 주시해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도 그러했다.
그를 마주했을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혹시나 마력을 감추는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레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력이 아니에요. 저 분이 보여준 힘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힘이었다.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증명해주었다.
한순간에 쌓인 시체더미를 보며 유미르는 물론 아레나까지도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눈에 잘 담아두었느냐?”
그들에게 다가온 비체가 미소를 보였다.
조금 전 그 무시무시한 힘을 보지 못했더라면 당장 눈앞에 있는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믿었을 터였다.
“어떻게 그런 힘을……?”
“후후, 어떠냐. 이제 좀 내 제자가 되어볼 마음이 생겼나?”
“하지만 비체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마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걸 가르쳐주시려는 건지…….”
“아둔한 말을 하는구나. 너는 지금 내가 다룬 힘이 너희들이 말하는 그 마력 같아보였느냐?”
“아뇨. 솔직히 처음 보는 힘이었습니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힘을 다루는 것만 같았습니다.”
“호오…….”
유미르의 말에 비체가 눈을 빛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연… 마력이 아닌… 아!”
아레나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곧 토끼눈이 되었다.
이에 유미르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녀를 향했다.
“왜 그럽니까?”
“생각났어요.”
“뭐가요?”
“자연하니까 떠올랐어요. 지금은 멸망한지 100년도 더 지났지만,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어요. 마력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
“저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아마 그럴 거예요. 그들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련된 자료는 모두 없애버렸다고 했거든요. 저도 어렸을 적 할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에요. 그 왕국의 이름은 아마 ‘발도르’였던 것 같아요.”
아레나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비체에게로 향했다.
유미르도 고개를 돌려 비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비체가 슬쩍 느긋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미르와 아레나가 자연스레 상체를 기울였다.
시선을 비체에게 두고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것도 어쩐지 닮아보였다.
“보면 볼수록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라니까. 이참에 두 사람이 잘해볼 생각은 없나? 보아하니 둘 다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다른 이유들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거라면 내 특별히 힘써서 도와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의 입에서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오자 아레나와 유미르 둘 다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다가도 곧 비체의 말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크흠… 그보다 아레나 단장이 말한 대로 어르신께선 발도르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래 맞다. 나는 이미 멸망한 발도르 왕국의 왕자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비체를 보며 유미르는 그만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아레나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이에요? 정말 발도르 왕국의…….”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 본거냐? 이런 모습으로 왕자라니 우스운 건가?”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관련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그곳의 왕자님이셨을 줄은…….”
“흐흐흐, 정확히는 ‘왕자였던’ 이다. 나는 왕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이곳으로 온 거거든.”
비체는 짧게 자신의 얘기를 전했다.
그는 본래 발도르 왕국의 왕족으로 왕자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 동생에게 차기 국왕의 자리를 넘겨주고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런 던전으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발도르 왕국은 선대 때부터 줄곧 해온 일이 있다. 바로 이곳 중심부에 있는 ‘아포칼립스’라고 불리는 문을 지키는 일이지. 난 그곳의 문지기를 자처한 거다.”
“아포칼립스? 그게 무엇입니까?”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그 문이 열리면 안 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그래서 내 힘으로 선대 때부터 이어져온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거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평범한 던전은 아니었군요.”
“흐흐, 그래. 너희도 이곳에서 지내면 심심하진 않을 거다. 아포칼립스의 틈새에서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덕분에 이것저것 시험해보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지.”
“저런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단 말씀이십니까?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이곳에서 나가려 합니다. 혹시 비체님께서 이곳의 출구를 알고 계신다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하하하!! 꿈도 크구만!! 내가 처음 들어온 그때와 달리 이제 이곳 어비스 던전은 출구도, 입구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게이트가 나타나는 것은 아주 잠깐의 순간. 운이 좋으면 너희 앞에 나타나 나갈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 게이트로 나간다 해도 어디로 나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예?”
“네??”
아레나와 유미르 모두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너희가 어떤 인물들이었고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만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바깥에서의 일은 잊고 지내는 것이 좋을 거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그나마 내가 알고 있던 마지막 게이트는 발도르의 멸망과 함께 무너졌다.”
비체의 말에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나는 듯 했다.
아레나와 유미르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그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일 터였다.
비체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두 사람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저한텐 차라리 잘 되었어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미르. 당신이 예전에 제게 한 말 기억나요?”
“어떤 말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비췄을 때, 당신이 먼저 말했었죠. 저와 당신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안 될 거라고. 저는 제대로 고백하기도 전에 당신에게 차인 기억이 있다구요.”
“아… 그랬, 었죠…….”
유미르가 괜히 얼굴을 붉혔다.
조금 전 아레나와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