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4화 (4/424)

004화 던전의 사람들

“아, 그…….”

유미르가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아레나가 그의 고개를 돌렸다.

“제 눈 똑바로 보고 답해요. 그때 말했던 신분의 차이는 저를 거절하기 위한 좋은 핑계일 뿐이었나요? 안타깝게도 전 당신의 솔직한 마음이 어떤지 몰라요. 제가 당신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그때 그 말을 듣고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당신은 보란 듯이 제 곁에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줬잖아요. 혹시 이것도 제 착각인가요?”

“…맞습니다. 그 날 이후로 아레나 당신 곁에 머물긴 했습니다.”

“역시. 그랬던 거죠?”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설마 귀족가의, 그것도 고귀한 프로메테 가문의 여인이 절 좋아하게 될 줄은…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제 눈에 당신이 계속 들어왔던 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점점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그 마음만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매번 제가 위험할 때마다 도와주러 와준 건가요? 제이스쿠스 군대와 싸웠을 때처럼……·.”

“그렇습니다. 당신을 잃을 순 없으니까요.”

유미르가 순순히 인정하자 아레나의 뺨이 화끈거리는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유미르의 손을 잡았다.

이에 유미르의 몸이 각목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얼굴엔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유미르의 다른 손이 괜히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유미르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아레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유미르는 자신의 숨소리까지, 심장박동의 소리까지 느끼고 있었다.

아레나가 새하얀 손을 유미르의 심장에 가져갔다.

“많이 떨린가 봐요?”

“거기까지 들렸습니까?”

“네.”

“솔직히 안 떨릴 수가 있나요. 당신이 그런 눈으로 절 바라보는데…….”

“후훗. 어떤 눈인데요?”

아레나가 슬쩍 웃자 반달 모양의 눈웃음이 드러났다.

그녀는 한 번씩 이런 눈으로 유미르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지곤 했다.

유미르는 자연스레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아레나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자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렇게 이성에 몸을 맡긴 뜨거운 시간이 지나가고 아레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아직 대답 안했잖아요?”

“무엇을요?”

“신분의 차이 말예요.”

“아아, 그건 사실입니다. 저 같은 천민이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마법기사단의 단장직까지 올라도 그런 멍에는 떨쳐버릴 수 없더군요.”

“하지만 이젠 상관없잖아요?”

“그렇죠. 이곳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후후, 그렇죠? 제 말대로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네?”

“가끔 꿈 꿨거든요. 이런 상황이 오는 것을. 아무도 없는, 우리 둘만 있는 공간에 있다면 어땠을까. 그때는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데 보아하니 거절이 아니었나 보네요.”

아레나가 또다시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유미르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레나는 몸을 기울여 유미르에게 기댔다.

“사실 조금은 지쳐있었거든요.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장만 매일같이 오갔으니까요.”

“그랬습니까. 하지만 아쉽진 않나요? 그토록 마법기사단장이 되고 싶어 했는데…….”

“마법기사단장으로썬 아쉬운 마음이 들지 몰라도 여인으로선 아니에요. 이렇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뭐예요 그 웃음은?”

“좋아서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레나가 유미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때 묻지 않은 진실된 눈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유미르의 눈동자가 좋았다.

귀족가는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했다.

그들은 지인 한 명을 만나더라도 그냥 만나지 않는다.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유미르는 아레나에게도 신선한 인물이었다.

처음 동경하게 된 테르세우스도 사람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 점이 신기했는데 그 모습을 유미르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귀족들의 등쌀에도 유미르는 꿋꿋이 자신을 지켜내며 주관을 만들어내었다.

편견 없는 그의 모습이 조금씩 아레나의 시선을 훔쳤다.

그러다 문득 어느 날 유미르만 지켜보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아레나는 자신이 유미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몰랐다.

“무슨 생각해요?”

상념을 깨는 유미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마저 그녀의 마음을 간질였다.

아레나가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당신은 후회하지 않겠어요? 이곳에서 저와 계속 함께 하는 걸요.”

“저는 이미 마력까지 잃은 몸입니다. 돌아간다 해도 더는 마법기사단장을 지낼 수도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면 농사나 지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곳에서 아레나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다니 잘 된 일입니다.”

“아…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당신의 마력까지…….”

“괜찮습니다. 그까짓 마력보다 당신의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요. 같은 상황이 오면 몇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유미르의 손을 두 손 꼬옥 말아쥐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내였다.

이런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하물며 유미르가 마력을 잃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떤 상태든 그녀에게 유미르는 유미르였다.

“혹시나 해서 미리 하는 말인데 마력을 잃었다고 해서 기죽거나 자신을 잃거나 하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 그대로가 소중한 거니까요. 마력이 없으면 이제 제가 당신을 지켜주면 돼요.”

유미르도 아레나를 따라 웃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멀리서 이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던 비체가 이만 다시 몸을 움직였다.

“보아하니 이제 마음의 정리들이 끝났나보구나.”

“아, 비체님!”

“그래. 결국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지?”

비체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그의 물음만으로도 부끄러웠는지 유미르와 아레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에 비체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젊은 것들이 뭐가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아? 아니지, 젊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더 잘 아는 건가? 나이 들면 얼굴에 철판 깔기도 쉽거든. 그나저나 거지같은 마물들만 보다가 이런 모습들을 보니까 나도 주책이구나.”

비체가 슬쩍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가 옷 속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은 작고 낡은 반지였다.

“이게 뭔 줄 아느냐? 이건 ‘레티나’라는 신기한 광물로 만든 반지다. 이걸 이렇게 서로의 손가락에 끼우고.”

비체는 유미르와 아레나의 손을 덥석 붙잡아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곤 반지를 끼운 두 사람의 손을 맞대었다.

키잉―!

청아한 소리와 함께 반지에서 환한 빛이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반지를 보며 아레나와 유미르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 빛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호오… 아름다운 색이구나. 레티나가 만들어낸 푸른빛의 사랑이라니.”

“비체님 그런데 이건……?”

“너희 두 사람이 예뻐 보여서 주는 작은 선물이다. 레티나의 반지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데, 함께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의 몸이 위급한 상태가 되면 반지의 색깔이 빨강색으로 물든다. 만약 상대가 목숨을 잃을 경우엔 반지의 색깔도 까맣게 죽어버리지.”

“아…….”

“허어…….”

두 사람은 각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들의 손가락에 반응하듯 반지는 더욱 강한 빛을 띠었다.

“우리 왕국에서도 레티나 반지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정말 저희들에게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뭐 어떠냐. 나는 쓰지도 못할 물건인데. 오히려 제 주인을 찾아 간 거지. 그리고 레티나 반지를 꼈다는 것은 곧 부부를 의미한다. 결혼반지거든 레티나의 반지는.”

비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유미르와 아레나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우리 셋밖에 없지만 딱이질 않느냐. 내가 세상과 하늘에 대고 증인이 되어주마. 너희 두 사람이 오늘부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부, 부부라니…! 비체님 어떻게 그런…….”

“뭐야!? 아니 그럼 너희밖에 없는 이 던전에서 뭐 연애라도 할 거냐? 마수 잡는 데이트라도 할래? 아니면 던전 탐방 데이트라도 하면서 시간 보낼 생각이냐? 에잉, 그딴 것들 집어치워라! 그냥 부부부터 시작해! 아무도 뭐라 안하니까.”

비체의 말에 아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미르도 괜히 멋쩍은 웃음만 보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비체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자자… 그럼 부부가 된 기념으로, 그래! 키스 한 번 찐하게 하자. 어떠냐?”

이제는 비체 본인이 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우습게도 그가 유미르나 아레나보다 더 신나보였다.

결국 그에게 떠밀려진 유미르와 아레나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주춤거리며 다가서던 그들에게 비체가 하나의 기폭제가 된 셈이었다.

“크으… 뜨거운 청춘이로다.”

키스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비체가 돌연 입술을 샐쭉거렸다.

“그만해! 부부된 기념으로 키스하랬지 누가 그렇게 진하게 하랬나!! 그만해 그만해!!”

비체가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자 유미르가 익살스런 미소를 보였다.

아레나는 괜히 손으로 살짝 뺨을 눌렀다.

한껏 장난치던 비체도 어느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깊은 시선으로 유미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떠냐? 내 제자가 되는 것은.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할 것도 없을 텐데 내게 배우는 것이 어떻겠냐?”

“제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제가 잘 배울 수 있을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마력을 잃은 것 때문에? 그건 걱정하지마라.”

코웃음 친 비체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쪽의 검을 들어 바위를 겨냥했다.

“잘 봐라. 이제 네가 배울 것은.”

휘링―!

후우우웅――!!

비체의 손에 들린 검에서 환한 빛무리가 일어났다.

빛무리는 날카로운 선이 되어 거대한 바위를 단번에 갈라버렸다.

그 엄청난 힘에 유미르는 물론 아레나도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력이 전혀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우면 된다.”

한 차례 시범을 보인 비체가 피식 웃어 보이며 뒤돌았다.

“방금 그게 무엇입니까?”

“본 그대로인데 뭘 물어보는 거냐?”

“제 눈에는 짐승처럼 생긴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호오… 너 영기(靈氣)를 읽을 줄 아는 거냐? 이거 정말 놀랍구나. 아니지. 마력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보인건가? 너와 달리 저 처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으니까.”

비체의 말대로 아레나의 눈엔 그냥 환한 실선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유미르는 그 자리에서 비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말 마력 없이 비체님, 아니 스승님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이제 좀 마음이 생긴 거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마침 내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거든.”

“예?”

“내가 언제까지고 계속 살아 있을 리가 없잖나. 그래서 하늘에다 대고 빌었지. 아니 정확히는 이 던전의 그 녀석에게 빌었지. 더도 덜도 말고 썩 괜찮은 놈 하나만 던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웬걸! 네가 딱 나타났지 뭐냐.”

“아, 그럼 설마 비체님은 처음부터……?”

“이 아둔한 놈아. 처음부터 널 내 후계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다. 잠깐이지만 네게서 썩 괜찮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한 거지. 못난 놈이었으면 내가 먼저 널 죽였을 거다. 괜히 이 던전에서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감사의 말씀을…….”

“그럴 필요도 없다. 네 생각보다 난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네 마력을 모두 잃게 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나? 뭐, 그것에 대해 날 원망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상관없습니다. 어쨌거나 제게 도움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레나를 살릴 수 없었을 겁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또한 제가 마력을 잃은 것은 비체님이 저를 아무 이유 없이 도와주신 대가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 비체님을 원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비체가 눈매를 좁혔다.

참으로 이상한 놈이었다.

생각 없이 구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생각이란 걸 하는 놈이었다.

“묘한 놈이로군. 어쨌거나 재밌겠구나. 매일 홀로 지내던 이 던전 생활도 적적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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