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남겨진 사람들과 시작하는 사람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어두컴컴했던 하늘은 대낮이 되도록 여전히 그대로였다.
“해라도 뜰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에 더더욱 무게를 더해주는 것만 같구나…….”
검은색 옷을 갖춰 입은 테르세우스가 슬픈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곁에 서 있던 사내가 들고 있던 우산을 움직였다.
“비 맞으십니다.”
“내버려 두게. 오늘은 비를 좀 맞고 싶구만…….”
씁쓸한 미소를 내비친 테르세우스가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두 개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한쪽은 프로메테 가문의 묘비였고 다른 한쪽은 가문 이름조차 없는 묘비였다.
심지어 한눈에 보아도 문상객의 차이는 심했다.
심연의 기사단 단원들만 모여 있는 유미르의 묘와 다르게 아레나의 묘 앞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테르세우스는 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서 아레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인물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가 보기엔 어떻게 해서든 프로메테 가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순 없었다.
아레나의 죽음조차 이용하는 프로메테 가문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아레나도 참 딱한 아이였어…….”
가문의 억압에 눌려 살았던 아이.
그게 테르세우스가 아레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었다.
감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던 모습.
그 모습이 늘 테르세우스의 머릿속에 맴돌아 마법기사단을 창단하자마자 아레나를 먼저 데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의 마법기사단에서 표정이란 것을 찾아갔다.
이 표현도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표정을, 아레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레나의 표정을 찾아주고 있는 게 놀랍게도 유미르라는 것을 눈치 챈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압적인 가문에서 태어나 인형처럼 자란 그녀에게 유미르 같은 자유로운 존재는 새로운 느낌이었을 터다.
“그랬는데 두 사람이 결국…….”
아레나와 유미르의 죽음.
그 보고를 처음 듣자마자 테르세우스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 다 자신이 아끼는 수하들이기도 했지만 벌써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이들이었다.
마법기사단에게도 군단에게도 나아가 왕국에게도 그들의 죽음은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대들처럼 유능하고 멋진 마법기사단장들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단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모든 단원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두 사람의 희생 덕분에 두 마법기사단은 심각한 피해를 면할 수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후발대와 힘을 합쳐 적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유미르와 아레나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영웅담은 곧 왕국 전체로 퍼졌다.
일각에선 그들을 질투해 악담을 퍼트리는 자들도 존재했다.
유미르와 아레나가 눈이 맞아서 도망갔다는 둥, 사우스 왕국에 포섭되어 왕국을 배신했다는 둥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유미르와 아레나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런 헛소문 따윈 전혀 믿지 않았다.
테르세우스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유미르와 아레나의 묘 앞에 각각 꽃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묵념으로 그들의 안정을 바랐다.
“고생했다. 언젠가 나도 그곳으로 갔을 때, 두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삶을 살다가마. 부디 그곳에선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길.”
테르세우스와 함께 다른 단장들이 고개를 숙였다.
들장미 마법기사단의 단장 아그리나도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아레나보다 유미르의 묘에 시선을 머무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식…….”
아그리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테르세우스는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었다.
몇몇 수하들이 그와 함께 있으려 했으나 테르세우스는 그럴 필요 없다며 만류했다.
“개인적으로 고마운 녀석들이라 이렇게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고 싶다. 조금만 더 이 녀석들과 함께 있고 싶으니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서 쉬도록 해.”
결국 수하들이 돌아가고 테르세우스는 심연의 마법기사단 단원들과 술을 기울였다.
보통 장례식에 술을 기울이진 않지만 특이하게도 심연의 단원들은 단장인 유미르가 술을 좋아했다며 마지막으로 함께 마시겠다 고집을 피웠다.
그들은 단장을 잃은 것에 슬퍼하면서도 분개하고 있었다.
“테르세우스님…….”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가 죽고 유미르 단장이…….”
그들의 울분에 테르세우스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녀석은 녀석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한 거다. 단원들을 위해 언제든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바로 단장이란 위치야. 너희들의 목숨을 책임지기 때문에 단장이란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그러니 늘 최선을 다해온 저 녀석을 위해서라도 마지막엔 웃으며 보내줘라.”
“하지만 너무나도 분합니다. 단장의 목숨을 빼앗아간 사우스 왕국 녀석들에게도 분하지만… 마법기사가 된 후 매일같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온 우리 단장인데… 보십시오. 아레나 단장쪽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여기는 우리를 제외한 몇몇 마법기사들이 다녀간 것이 전부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인단 말입니까? 겨우 천민이라는 그 출신 하나 때문에요? 아니면 세상에 외면 받았던 저희들이 모인 심연의 단장이기 때문입니까?”
“…미안하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무어라 해줄 말이 없구나.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더욱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니 오늘까지만 슬퍼하자. 우릴 지배하는 감정에 멈춰있으면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세상이 변하려면 우리부터 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정을 이겨내라. 유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테르세우스는 조용하고 묵직한 어조로 전했다.
그와 심연 기사단 단원들 밖에 없어서인지 테르세우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명의 여인이 더 함께 하고 있었다.
“네가 이곳에 남아줄 줄은 몰랐는걸.”
“…….”
“그대는 유미르를 싫어하지 않았나? 말도 붙이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아그리나.”
“천민은 싫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남은 거냐?”
“천민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유미르는 마법기사단의 단장이었습니다. 또한 왕국을 위해서 숱한 임무들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는 겁니다. 이것은 ‘천민’이 아닌 ‘단장’으로써 예우해주기 위함이에요.”
아그리나의 말을 들은 테르세우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가 아그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그리나. 너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구나.”
사실 테르세우스는 아그리나가 어째서 유미르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아레나와 마찬가지로 유미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아레나와 다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부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 유미르에게 까칠하게 대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테르세우스도 그런 아그리나가 싫진 않았다.
아그리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심연의 마법기사단과 조금 떨어져 있는 위치였다.
아마도 심연의 마법기사단 단원들이 자신을 불편해하지 않도록 배려해주기 위한 위치 선정이었을 터다.
“녀석…….”
뒤돌아섰던 테르세우스는 바깥의 광경에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단장들의 장례식을 시작한 첫날엔 왕족과 가족 이외엔 발을 들일 수 없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엔 귀족들이 다녀갈 수 있다.
그리고 네 번째 날부터 비로소 평민들과 천민들에게 장례식 참석이 허락된다.
헌데 셋째 날인 오늘부터 벌써 유미르의 묘 앞에 평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테르세우스조차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유미르… 보이나? 이것이 네 노력의 결과다.”
* * *
어둠속에 누워있던 유미르는 오늘 따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허공을 보며 옛날 생각에 잠겼다.
처음 마법기사가 된 이후 줄곧 시기와 질투, 무시와 멸시를 곁에 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절할 순 없었다.
철저히 외톨이가 된다고 해도 유미르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렸을 적 기억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데울리도 마법기사였다.
마법기사단장를 꿈 꾼 것은 어렸을 때부터 봐온 데울리의 영향이 컸는지도 몰랐다.
언제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던 아버지였지만 그에게도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있었다.
바로 출신이라는 것.
천민의 아들은 천민으로 태어난다.
천민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태어나보니 천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데울리는 출신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단장은커녕 부단장으로도 승격조차 하지 못했다.
기껏 맡게 된 직책은 선임 마법기사.
하지만 그마저도 인정받지 못하는 선임 마법기사였다.
귀족 출신의 마법기사들은 천민 출신인 데울리를 대놓고 무시했다.
심지어 동료들조차 데울리를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천민 출신의 마법기사들이 적은 것은 마법기사로 잘 뽑히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이러한 등살에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데울리는 이러한 것들을 강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언젠가 유미르가 속상한 마음에 물었을 때 데울리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냐? 마법기사인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너희들을 지키는 거다. 우리 아들처럼 어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으려면 너희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왕국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왕국을 이어가는 것이 또 미래의 너희지. 그러니 나는 왕국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그깟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
하지만 데울리는 결국 그 해 전쟁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워낙 많은 얘기들을 들어온 탓에 아무도 데울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유미르의 착각이었다.
아버지 데일리의 동료들이 찾아와 함께 울며 슬퍼했다.
데일리의 용감무쌍한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어 데일리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때 유미르는 많은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을 정할 수 있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강해지기로 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마법기사가 되어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자신을 가장 먼저 알아봐준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현 군단장인 테르세우스였다.
테르세우스는 신분이나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미르의 능력을 알아봐주었고 그를 자신이 만든 마법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삼았다.
그때 당시 유미르와 함께 부단장으로 임명된 인물이 바로 아레나였다.
그것이 아레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아레나와는 숱한 임무를 함께 하며 부딪혔다.
처음 아레나 또한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천민인 유미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레나도 점차 유미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천민 출신이라는 배경보다 유미르라는 사람 그 자체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태도가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은 유미르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직 안 자고 뭐해요?”
상념을 깨우는 고운 목소리였다.
유미르의 가슴에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어 그의 몸에 스스륵 파고드는 인영이 있었다.
짓쳐드는 향기로운 내음에 유미르가 몸을 돌려 아레나를 안아주었다.
“그냥. 옛날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어떤?”
“당신이 대체 언제부터 내게 반했을까… 하고.”
“음… 처음 본 순간 호감이었고 당신에게 빠져든 순간은 나도 몰라요.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난 빠져있는 상태였으니까.”
“후후, 당신이 이렇게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거 알아요? 감정 없이 지내던 날 이렇게 바꾼 게 당신이란 걸.”
“그래요?”
“네. 그래서 늘 감사해 하고 있었어요.”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요.”
“그럼 이 참에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을 알려줄까요?”
“음? 그게 뭡니까?”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유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당신도 이제 아빠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