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발도르 왕국의 의식 (1)
비체와 유미르는 의식을 치르기 며칠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나 비체는 의식을 준비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그동안 아레나는 아시테르에게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엄마.”
“응?”
“아빠랑 할아버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음… 우리 아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계신거야.”
“선물?”
“그렇지.”
“와아―! 선물 좋아.”
아시테르가 한쪽에 놓아두었던 작은 조각상을 들고 왔다.
3살의 생일 때 유미르가 조각해준 선물이었다.
처음 받은 선물이기에 아시테르는 이 작은 나무 조각상을 소중히 간직했다.
“다 되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비체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주변으로 마법진 형태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특이한 물감으로 만든 문양 안에 단상을 놓았다.
비체가 유미르와 아시테르에게 다가갔다.
“둘 다 저 단상위로 올라가보겠나?”
비체의 안내에 따라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움직였다.
아시테르는 조막만한 손으로 유미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에 유미르가 웃으며 아시테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무섭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
아시테르가 연신 주위를 살폈다.
비체가 그린 문양 안으로 들어서니 이 묘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이윽고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단상 위에 올라섰다.
비체는 준비해두었던 통을 들고 왔다.
통 안에는 비체가 아침부터 만든 특이한 물감이 들어 있었다.
“이건 수호신들의 세계와 너희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거란다.”
비체는 엄지와중지에 물감을 묻혀 천천히 유미르의 얼굴에 묻히기 시작했다.
신중을 기하며 유미르에게 물감을 그린 비체가 이번엔 아시테르에게로 옮겼다.
“자, 이제 되었다.”
모든 것을 마친 비체가 엄중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문양의 끝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앉으며 두 팔을 들어 올리자 전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의식을 시작할 테니 너희들은 천천히 눈을 감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응.”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무언가 염려되었던 아레나가 조용히 비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비체님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말해봐라.”
“발도르 왕국의 힘은 마력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하지만 아시테르는 이미 마력을 갖고 있어요.”
“마력이 있다고 해서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기와 마력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못할 뿐이다. 수호신의 힘이 깃들면 그 힘은 아시테르의 몸 안에 잠들어 있을 거다. 그리고 언젠가 아시테르에게 그 힘이 필요해진다면, 그때 깨어나겠지.”
“아… 그렇군요.”
“그럼 이제 의식을 시작할 테니 아레나 너도 잠시 떨어져 있거라.”
“네.”
비체의 말에 아레나가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비체가 두 팔을 문양에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문양에 닿자 아지랑이가 빠르게 문양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비체가 있는 곳부터 시작한 황금빛 아지랑이는 빠르게 스며들며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있는 곳을 지나 끝 쪽까지 맞닿았다.
후우웅―!!!
문양이 빛나기 시작하자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옷과 머리칼이 흩날리면서도 비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팔로 원을 그리며 영기를 방출했다.
좀 더 대단한 수호신들을 불러내기 위해 그는 몸 안의 영기를 방출하는 것에 아낌을 두지 않았다.
영기의 아지랑이가 허공에 용솟음치며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아시테르와 유미르는 원의 바로 아래서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떴다.
“이제 나와주십시오.”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비체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영기가 한 차례 유미르와 아시테르를 휘감았다.
슈파앙!!
영기가 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원에서 여러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어떤 수호신이 나와줄지…….”
비체가 긴장되는 눈으로 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들의 위로 무언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왔나……!”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줏빛깔의 비늘을 가진 뱀이었다.
뱀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로 유미르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저주의 신인가…….”
비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주의 신은 사악한 원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이었다.
분명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저주의 신이 깃든 인간은 악한 성정에 물들어간다.
간혹 강인한 의지로 그것을 극복해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유미르와 아시테르에게 이러한 시련을 넘겨주고 싶진 않았다.
“저주의 신이여… 죄송합니다. 다른 후세를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주의 신이 강렬한 눈빛으로 비체를 바라보았다.
[너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살아 있었구나.]
“예. 질긴 목숨 이곳에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주의 신이 다시금 유미르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특히나 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머물렀다.
“죄송합니다만…….”
[그저 확인해보기 위해 나와 봤을 뿐이다.]
저주의 신이 다시 고개를 들어 비체를 바라보았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오랜만에 열린 문에 많은 신들이 반가워하고 있으니.]
저주의 신은 이만 원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영체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원에서 다른 빛이 일기 시작했다.
커다란 원에서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그마한 동자(童子)였다.
아이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유미르와 아시테르를 살폈다.
그러나 이내 영체를 감추었다.
“산록의 수호신…….”
산록의 수호신은 전투 능력이 뛰어난 신은 아니었다.
풍요를 상징하는 신들 중 하나였기에 과거 발도르 왕국에선 마을의 번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신이기도 했다.
이어 실타래를 두른 영체가 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사슴 형체의 수호신이 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모두 오랜만에 열린 문에 신나서 달려와 본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나왔던 수호신들 중 가장 상위 신은 저주의 신이었나.”
저주의 신 이후 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들은 모두 자주 볼 수 있는 신들이었다.
보아하니 상위 수호신들은 아직 움직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후우…….”
비체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영기를 불어넣었다.
저주의 신이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갔으니 분명 상위 수호신들 중 누군가가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을 터였다.
그 순간 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에?”
유미르와 아시테르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때쯤 커다란 진동에 둘 다 놀란 얼굴을 보였다.
지켜보던 아레나도 이번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후우웅!!!
거센 바람과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머리에 사슴 같은 뿔이 달린 사내였다.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사내가 푸른 눈동자를 움직였다.
특이하게도 그의 발아래엔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질풍의 수호신!”
비체가 놀라 외쳤다.
질풍의 수호신은 발도르 왕국 역사상 모습을 드러낸 적이 몇 번 없을 정도로 잘 나타나지 않는 상위 수호신이었다.
게다가 그가 힘을 빌려준 인물들은 모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었다.
“질풍의 수호신께서 함께해주신다면……!”
비체의 말을 들은 것인지 질풍의 수호신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말없이 유미르의 앞에 섰다.
유미르는 넋을 놓고 질풍의 수호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영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질풍의 수호신은 손을 올려 유미르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뭘 하는지 몰랐기에 모두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쉽구나… 너는 나의 힘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어 질풍의 수호신이 아시테르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유미르와 달리 아시테르에겐 따로 접촉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라면 아직 가능하다. 네 안의 다른 힘을 지우고 나의 힘을 받아들이겠느냐?]
아시테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질풍의 수호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지?]
[크하하!! 그럼 그 아이는 내게 양보해라 슈라!]
그 순간 위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탄탄한 근육질의 거한이 원에서 뛰어내렸다.
[무테허. 순서를 지켜라. 지금은 나의 영역이다.]
[저 녀석은 네 힘을 줄 수 없고. 저 아이 또한 거절했으니 이미 네 순서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무테허라 불린 수호신이 큼지막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를 본 비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괴력의 수호신……!”
싸움을 좋아하는 전투광 수호신이었다.
게다가 그의 성정만큼이나 강한 힘을 지닌 수호신이기도 했다.
무테허가 유미르쪽을 바라보다 비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은 뭐냐?]
“이번 의식의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글렀다. 이미 몸 안의 길들이 막혀 있다. 길들이 막혀 있으면 우리들의 힘이 스며들 수 없어.]
무테허의 말에 비체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싶었던 마음에 시도해 본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호신의 진언으로 직접 들으니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상위 수호신들과 계약은 가능하다. 계약은 이 녀석의 몸에 영기가 스며드는 것이 아닌 일시적으로 우리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니까.]
수호신과의 계약.
몸에 수호신의 힘이 깃드는 것은 영기를 사용하는데 제한이 없지만 계약은 달랐다.
계약자가 수호신에게 빌려올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은 힘을 받으면 계약자의 몸이 망가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무테허와 슈라가 아이테르와 유미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느냐?]
[계약이라면 내가 해줄 수도 있다.]
둘의 질문에 유미르가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서는 때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오고 있어.”
아시테르의 눈동자에는 확실히 비춰지고 있었다.
원 안에서 다가오는 누군가가 말이다.
휘콰아아앙――!!
아시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원에서 엄청난 파동이 울렸다.
슈라와 무테허가 나타났을 때완 비교도 안 되는 힘의 파동이었다.
대기를 울리는 묵직한 힘에 슈라와 무테허가 유미르와 아시테르를 보호해주었다.
비체도 아레나를 보호해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마법을 펼쳐 자신을 보호하는 중이었다.
슈와아아!!!
거센 풍압에 눈조차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시테르……!”
유미르가 아시테르를 품에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아시테르의 눈동자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쫓고 있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아이야.]
그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백의 날개를 커다랗게 펼친 사내가 아시테르를 보며 웃었다.
그를 보며 무테허와 슈라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수호신의 등장에 비체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내는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부르진 않았지만 아까부터 보여서 보고 있었어.”
[이것 참 신기하구나…….]
사내가 천천히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 질풍의 수호신과 괴력의 수호신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후후, 아무래도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군.]
[그렇구만.]
둘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또 한 번 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원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이것 참 신기한 일이야.]
새하얀 빛과 함께 은발의 여인이 대지에 발을 내딛었다.
여인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자 허리까지 내려온 은발이 한 차례 흩날렸다.
특이하게도 여인의 이마엔 초승달 문양이 박혀 있었는데 그 문양에서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정확히 아시테르와 유미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내려온 것이냐. 별일이로군.]
[흥미가 생겼어요.]
갑자기 나타난 여인과 사내를 보며 비체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둘 다 처음 보는 수호신들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모습들이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비체의 말을 들은 거력의 수호신이 입을 열었다.
[너는 모르겠구나. 저 두 분은 바로 창공의 신과 달빛의 신. 모두 고대의 수호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