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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10화 (10/424)

010화 발도르 왕국의 의식 (2)

비체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모두 이름만 들어본 수호신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들을 접한 것이다.

달빛의 수호신이 천천히 유미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라면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녀의 말에 유미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입니까?”

[계약은 인간의 몸에 많은 무리를 가하지. 하지만 난 나의 힘이 네게 깃들게 할 수 있다. 다른 신들이라면 길이 막힌 네게 힘을 주지 못하겠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달빛으로 힘을 전하는 존재. 나의 달빛은 길과 상관없이 네 몸에 머물 것이다.]

유미르가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조금 전 거력의 수호신 말에 당연히 계약을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헌데 지금 이 말은 생각지도 못한 희망이었다.

유미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주실 수 있습니까?”

달빛의 수호신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광명이 일었다.

빛은 천천히 날아가 유미르의 몸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따뜻해…….”

유미르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꺼냈다.

빛이 몸을 감싸면서 느껴지는 이 포근함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뿐만 아니라 무겁던 몸이 점점 가볍게 느껴졌다.

달빛은 유미르의 몸을 감싸고 찬란히 빛났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아레나도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었다.

[달빛은 어둠 속을 헤매는 자들의 희망이 되는 존재이자 누군가를 밝게 비추는 힘이기도 하다.]

달빛의 수호신이 유미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유미르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그려졌다.

달빛의 수호신이 유미르에게 자신의 힘을 건네주는 것을 보며 창공의 수호신이 아시테르를 내려다보았다.

[네겐 나의 가호를 내려주마. 언젠가 네가 나의 힘을 필요로 할 때. 그때 나의 힘이 온전히 네게 깃들 것이다.]

그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시테르는 마냥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창공의 수호신이 그런 아시테르의 머리칼을 쓰다듬곤 새하얀 날개를 펼쳤다.

그의 날개가 아시테르를 감싸자 환한 빛이 일었다.

창공의 수호신이 아시테르에게 자신의 힘을 전하는 동안 달빛의 수호신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이마에 문양이 빛나자 영체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디 나의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길.]

그녀는 마지막 말과 함께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달빛의 수호신이 사라지자 질풍의 수호신과 거력의 수호신도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공의 수호신이 몸을 돌렸다.

[발도르의 마지막 아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발도르의 영광을 이어줘서 고맙구나.]

“별말씀을…….”

천공의 수호신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이곳에 머무는 것을 더 이상 의식의 원이 버티질 못했다.

원이 요동치며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천공의 수호신이 원 쪽을 바라보았다.

[고대 신이 두 명이나 이곳에 있었으니 버티지 못할 만도 하지… 아쉽지만 짧은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야겠구나.]

그의 영체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아시테르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조막만한 손이 천공의 수호신을 붙잡았다.

천공의 수호신은 이를 자애롭게 바라보며 허리를 굽혔다.

[또 보자.]

영체가 온전히 사라지고 크게 열려 있던 원이 서서히 닫혀갔다.

원안에서 흘러나오던 빛도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꿈만 같았던 일들에 유미르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멍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새로운 힘이 조금 전 일이 꿈이 아님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휘와아아―!!

유미르가 주먹을 말아 쥐자 영롱한 빛이 일어났다.

“어떠냐? 새로운 힘이 제대로 느껴지느냐?”

“엄청납니다! 과거 마력을 다룰 때와는 또 다른…….”

“그래.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그 힘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네가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힘을 다루는 것부터 천천히 배워가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비체가 아시테르의 앞에 섰다.

그는 손을 뻗어 아시테르의 맥을 짚어보았다.

“흐음…….”

유미르와 달리 아시테르의 몸엔 영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마 아시테르의 몸에 자리 잡고 있던 마력을 피해 몸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우려했던 상황은 면했군.”

천공의 수호신 같은 최상위 수호신이 왔다갔으니 혹시나 영기의 힘이 너무 강해 마력과 충돌을 일으키진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영기와 마력은 공존을 택한 모양이었다.

둘 사이의 충돌은 따로 느껴지지 않았다.

“후후, 아시테르야. 너는 정말 축복을 받은 모양이로구나.”

비체가 아시테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똘망똘망한 그의 눈망울에 비체는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시테르는 괜찮은 건가요?”

“그래. 영기의 힘이 생각보다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몸 안에 깃들어 있다.”

“그렇군요. 앞으로 성장하는데도 문제가 없겠죠?”

“당연하다! 어렸을 때부터 자리 잡은 영기는 마력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혹시 몰라 걱정했던 아레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체에게 몇 번이나 미리 얘기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시테르를 꼬옥 안아주었다.

* * *

의식이 끝나고 3년이 흐르는 동안 유미르는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달빛의 힘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친 힘이었다.

파콰앙―!!!

유미르의 검에서 달빛이 흘러나가면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폭발의 흔적들을 보며 유미르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다보았다.

지켜보던 비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 달빛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이 힘에 ‘달빛검’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유미르였다.

다른 거창한 이름보다 이렇게 간단한 이름이 부르기 편했다.

어쨌거나 꾸준히 수련해 온 검술에 달빛의 영기가 더해지자 더욱 커다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검끝에서 나오는 파괴력만큼은 비체조차 한 번씩 놀랄 정도였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강한 힘을 지닐수록 더욱 무겁게 신경 써야 한다. 영기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법이니.”

그는 유미르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몇 번씩이나 유미르와 함께 마수 토벌에 나서며 실전 감각을 키워줬다.

유미르와 비체가 노력하는 동안 아레나도 쉬고만 있진 않았다.

그녀는 신수가 선물해준 힘을 더욱 기르는 한편, 아시테르에게 자신의 마법들을 가르쳤다.

아레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서 불덩이가 일어났다.

“알겠지? 이렇게 마력을 한데 모은다는 느낌으로 하는 거야.”

“이렇게요?”

아시테르가 손을 들자 작은 불씨가 허공에 피어났다.

“아…….”

아시테르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레나가 그런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처음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단다. 자, 이제 다시 한 번 해볼까?”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마력을 다루는데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아시테르는 끊임없는 시도 끝에 결국 작은 불덩이를 소환해내는데 성공했다.

“잘했어!!”

아레나가 칭찬하자 아시테르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아시테르와 함께 기뻐해주는 한편 아시테르가 너무 방방 뛰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한 번 성공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해서도 안 돼. 평소엔 잘 펼치더라도 전투할 때는 실수하기 마련인 게 바로 마법이야. 그러니까 자만하지 말고 실전을 연습처럼!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해. 알겠지?”

“네 알겠어요!”

아시테르의 힘찬 대답에 아레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먼발치서 다가오던 유미르가 손을 흔들었다.

“오오!! 우리 아들 엄마한테 칭찬받고 있었구나!”

“아빠!”

유미르가 다가오자 아시테르가 그를 향해 뛰쳐갔다.

아시테르는 단번에 유미르의 품에 안겼다.

“아들! 오늘은 이 아빠랑 내기나 할까?”

“좋아요!”

“후후, 오늘은 이거다!”

유미르는 미리 먼발치 세워놓은 비석들을 가리켰다.

이를 본 아시테르가 벌써부터 내기를 눈치 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비석 맞추기에요?”

“후후 당연하지 이것만큼 재밌는 것은 없잖냐.”

“에에…….”

“녀석.”

“그치만 이건 매번 아빠가 지잖아요?”

“크흠… 그래서 이번엔 조건이 있다.”

“그게 뭔데요?”

“우리 둘 다 서로 오늘 배운 것을 사용하는 거다. 너는 화염구 마법을, 나는 달빛검기를!”

“오오, 좋아요!”

아시테르가 의지를 불태웠다.

두 사람은 곧장 그어진 선에 섰다.

유미르는 아시테르보다 열 걸음 뒤에 섰다.

“오늘은 당신이 이길 수 있을까요?”

“후후 걱정 말라고. 이번엔 내가 아시테르를 이겨 보일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비석맞추기 만큼은 늘 졌잖아요.”

“그건 워낙 이 녀석 실력이 장난 아니라서지… 당신 아들이라 마력 컨트롤만큼은 엄청 뛰어나.”

지켜보던 비체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그의 말에 유미르와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선 곳에서 비석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다 비석의 크기도 겨우 손바닥만 할 정도로 작았다.

비석은 총 다섯 개.

뒤에 갈수록 더 멀리, 더 작은 비석을 배치해놓았다.

“저부터 할게요!”

아시테르가 자신 있게 나섰다.

아시테르의 손에서 작은 화염구가 나갈 때마다 작은 비석이 하나씩 쓰러졌다.

마지막 다섯 개째의 화염구가 쏘아져나갔다.

콱!

하지만 가장 멀리 있던 비석은 멀쩡했다.

“아……!”

아시테르가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비석 맞추기를 해서 다섯 개 다 맞추지 못한 것은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후후, 우리 아들이 실수도 하고 별일이네.”

“아니 이건…….”

“덕분에 이 아빠도 해 볼만 하겠구나.”

“이익…!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아시테르가 소리쳤다.

사실 비체와 아레나는 아시테르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는 유미르도 내심 마찬가지였다.

오늘 배운 마법을 사용해 저 멀리 있는 비석들을 4개나 맞췄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자아… 언제까지고 계속 지기만 할 순 없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유미르가 표정을 달리 했다.

그가 한 차례 호흡을 고르며 검을 들어올렸다.

“섹시해…….”

탄력적인 근육들을 보며 아레나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유미르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저 멀리에서도 보였다.

“집중해라 이 녀석아.”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유미르가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끝에 맺힌 달빛검기가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날아갔다.

슈우웅―!

콰가가가각!!!

달빛검기는 가장 앞에 있던 비석부터 시작해 마지막 비석까지 한 번에 뚫고 지나갔다.

“와아…….”

“어머…….”

아시테르는 물론 아레나도 놀라 감탄했다.

빠르고 정확한 일격에 비체도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봤느냐 아들!?”

유미르가 뿌듯한 얼굴로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어깨가 한껏 올라간 그를 보며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석 맞추기는 자신의 자부심과도 같았다.

이것만큼은 유미르에게 늘 이길 수 있는 종목이었는데 무참히 패배해버리고만 것이다.

“쳇… 이건 반칙이에요!”

“한 번에 비석을 모두 맞추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아아!!”

한 차례 짜증을 낸 아시테르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유미르는 그런 아시테르를 붙잡지 않고 한 마디 외쳤다.

“저녁때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대답 없이 계속 뛰었다.

그런 아시테르를 아레나가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시테르가 많이 실망한 모양인데요?”

“그렇겠지. 태어나서 한 번도 져본 적 없을 테니까. 비석 맞추기만큼은 말이야.”

“당신이 좀 봐주지 그랬어요.”

“너무 봐줘서도 안 돼. 가끔은 실패나 패배도 겪고 이겨내 봐야지.”

“그러기엔 이미 다른 방면에선 모두 당신이 이기고 있잖아요?”

“아하하… 그런가?”

유미르가 머쓱함에 코끝을 매만졌다.

입맛을 다신 그가 아시테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분도 풀어줄 겸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해줘야겠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알고 있을까?”

“뭘요?”

“지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성장을 보이는지 말이야.”

“하긴, 이 나이 또래에 비해 우리 아들의 성장속도는 뛰어나죠. 이것 참 우리 두 사람의 아이이기 때문일까요?”

“흐흐, 그렇지 않을까?”

꽁냥꽁냥 깨를 볶아대는 아레나와 유미르를 보며 비체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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